촬영감독 정광석

by.배수경(객원연구원) 2018-02-12
촬영중인 정광석 촬영기사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 촬영현장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부부>(곽건, 1960) 촬영 현장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새댁>(이봉래, 1962) 촬영현장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성난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성난독수리>(김기, 1965)에 사용된 비행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오지명과 윤정희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박암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윤정희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오지명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총격액션 장면 1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총격액션 장면 2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총격액션 장면 3
<황혼의 부르스>(장일호, 1968)의 총격액션 장면 4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의 오픈 세트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눈 쌓인 산 속 추격전 장면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눈 쌓인 산 앙각 촬영 모습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장동휘의 오토바이 촬영 장면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꼬방동네 사람들>(배창호, 1982)의 골목길 장면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꼬방동네 사람들>(배창호, 1981)의 공옥진 춤장면
<꼬방동네 사람들>(배창호, 1981)의 공옥진 춤 촬영현장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적도의 꽃>(배창호, 1983) 의 도입부 1
<적도의 꽃>(배창호, 1983) 의 도입부 2
<적도의 꽃>(배창호, 1983) 의 도입부 3
<적도의 꽃>(배창호, 1983) 의 도입부 4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의 강릉 시장 장면 이미숙, 안성기
<고래사냥>(배창호, 1984)의 강릉 시장 장면 이미숙, 안성기 2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에서 이미숙이 안경을 훔치는 장면 1
<고래사냥>(배창호, 1984)에서 이미숙이 안경을 훔치는 장면 2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장면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깊고 푸른밤>(배창호, 1985)의 안성기와 장미희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꿈>(배창호, 1990)의 안성기와 정보석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의 기차길 내기 장면 1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의 기차길 내기 장면 2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의 기차길 내기 장면 3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투캅스>(강우석, 1993)의 총격전 장면 박중훈 1
<투캅스>(강우석, 1993)의 총격전 장면 박중훈 2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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