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Na Un-kyoo / 羅雲奎 / 1902  ~  1937
대표분야
감독, 배우, 편집, 제작/기획,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1950, 1960, 197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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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오몽녀 (나운규, 1937)
아리랑(3편) (나운규, 1936)
강건너 마을 (나운규, 1935)
무화과 (나운규, 1935)
그림자 (나운규, 1935)
칠번통소사건 (나운규, 1934)
암굴왕 (나운규, 1932)
개화당이문 (나운규, 1932)
금강한 (나운규, 1931)
철인도 (나운규, 1930)

기타정보

기타이름
춘사(春史), 라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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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함경북도 회령 출신. 4년제 회령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간도로 건너갔다. 용정 명동중학을 다니다가 1921년 서울로 가 중동중학에 들어갔다. 연안의 비밀 독립단체인 도판부에 가입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2년간 복역하기도 하였다(한국영화감독사전; 동아일보a). 조선키네마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1925)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들어섰다(동아일보a). 윤백남이 윤백남프로덕숀을 만들어 제작한 영화 <심청전>(1925)에서 심봉사역을 맡으며 비중있는 연기를 선보였다(한국영화감독사전).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은 <아리랑>(1926)을 통해서였다. <아리랑>은 일본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설립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농중조>에 이어 내놓은 두 번째 영화였다. 나운규는 감독, 각본, 주연을 모두 맡아 영화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나이 25세 때 였다. <아리랑>은 “오늘날까지 나아온 영화 중에 이만큼이라도 순전한 조선인의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또한 영화제작상 여유를 보여 준 영화가 드물 것”이란 평가 등 호평을 받았다<별건곤; 동아일보b; 동아일보c>.
이후에도 조선키네마에서 <풍운아><1926), <들쥐>(1927), <금붕어>(1927) 등을 찍었고, 독립해서 나운규프로덕션을 만든 후에는 <잘있거라>(1927),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을 통해 감독으로서만이 아니라 배우로서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동아일보d; 동아일보e; 동아일보f; 동아일보g; 동아일보h).
1930년을 기점으로 슬럼프가 찾아와 조연을 맡거나 지방공연을 하기도 하였다(한국영화감독사전). 인기에 영합한 무절제한 사생활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심훈은 “그가 그만한 인기를 독점하고 잇섯든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 그 원인을 캐여보면 무슨 시국에 대한 大志나 품은 듯한 룸펜의 써-커스적 활약과 鳴咽而不鳴하는 곳에 어떠한 사상의 암시가 숨은 듯이 深刻?痛을 가장한 일종 흥행가치에 잇섯든 것이 아닐까?”라고 나운규의 영화를 비판하면서 “千?飛鳳이여든 饑不粟하라”고 그의 사생활에 대하여 일침을 놓았다(심훈). 그런 가운데 1930년대에도 <철인도>(1930), <개화당이문>(1932), <강 건너 마을>(1935)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내놓았지만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웠다. 폐결핵과 싸우면서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오몽녀>(1937)가 그의 유작이다. 그의 장례식은 많은 영화인들이 모인 가운데 단성사에서 치러졌다(동아일보i).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6년 10월 14일 5면.
동아일보b 1926년 10월 7일 5면.
동아일보c 1926년 12월 19일 5면.
동아일보d 1926년 12월 19일 5면.
동아일보e 1927년 3월 11일 5면.
동아일보f 1927년 5월 1일 11면.
동아일보g 1928년 10월 12일 3면.
동아일보h 1928년 12월 2일 3면.
동아일보i 1937년 8월 10일 3면.
<局外者로서 본 오늘까지의 朝鮮映畵>, <<별건곤>> 제10호, 1927년 12월호.
심훈, 「조선영화인 언파레드」, 『동광』 제23호, 1931년 7월호.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2년 10월 27일 (양력 11월 26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2동 399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나형권(羅亨權)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4년제인 회령 공립 보통학교를 신흥 나와 다음해 일어난 3 1 독립운동 시위 사건에 자극받아 4월 초순 회령 지역 어른들이 주도한 독립선언문 수천장을 교회 지하실에서 등사 배포한 혐의를 받고 러시아로 피신, 한대 백군 맨스베끼군에 들어가 용병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쓰라린 체험을「나의 러시아 방랑기」(문예 영화·1928. 창간호)라는 글을 통해 토로한 바 있다. 1920년 간도로 돌아온 후엔 두만강 연안의 독립군 비밀 조직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하고 이듬해 봄 원산에서 서울로 오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중동중학 고등예비학과 교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돼 이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중동중학 고등예비학과 재학중인 스무살 때 철길굴 폭파가 미수로 끝난 도판부 주모 사건이 빌미가 돼 회령 경찰서에서 급파한 일본 형사에 의해 검거, 보안법 및 제령 제 7호 위반죄로 2년 동안 복역했다. 이때 독립투사인 이춘식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널리 불려지고 있는 춘사(春史)라는 아호를 얻게 되었다. 그후 회령에 왔던 극단 예림회의 순회 공연에 깊은 인상을 갖고 있던 나운규는 그 인솔자인 안종화(安鍾和)의 뒤를 이어 1924년 부산에 창설된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하게 된다. 이때 그에게는 열여섯 살 때 조혼한 두 살 연상인 창령 조씨(曺氏) 정옥(貞玉)와의 사이에 1남(종익) 1녀(신자)가 있었다. 일설에는 그가 연회전문학교에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보관중인 연세대학교 학적부에는 그의 둘째 형인 나시규(羅始奎)가 문과에 입학한 사실만 입증해 주고 있을 뿐이다.
문학을 좋아했던 그가 은막에 처음 등장한 것은 스물 네 살 때인 1925년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雲英傳)>이었다. 세종대왕의 네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총애하는 궁녀가 청빈한 선비를 흠모하면서 빚어지는 사랑의 비극으로, 그는 여기에서 여주인공을 가마에 태워가는 교군(較軍)의 한 사람으로 출연했다. 그가 비중있는 배역을 맡게된 것은 같은 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탈퇴하고 서울에 개인 프로덕션을 세우면서 만든 <심청전>(이경손 감독)의 심봉사 역이었다. 스물 네 살의 젊은 나이에 중년 역을 맡았을 만큼 그는 성격배우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혼자 원작 각색 감독 주연을 맡아 기량을 발휘한 <아리랑>(1926)을 내놓으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 본정(本町 충무로)에서 요도야(淀屋)라는 모자점을 경영하고 있던 일본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설립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농중조(弄中鳥)>(1926)에 이어 두 번째 제작한 영화이다. 유감스럽게 그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오늘날까지도 <아리랑>의 명성은 사그라지지 않은 채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검열과 자유스럽지 못한 사회 상황 때문에 비록 감독의 명의를 제작 실무 책임자인 일본인 스모리 히데카쯔(津守秀一)로 내세우긴 했지만, 당시의 보도와 그 뒤인 증언들은 <아리랑>의 작품성과 흥행성공, 그리고 나운규의 재능에 대해 한결같이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 한국영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특유의 표현기법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었으나 남모를 일로 실성하여 동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된 영진(나운규)은 지주의 앞잡이인 천지기로부터 시달림을 받던 여동생(신일선)이 그의 마수에서 무너지려는 찰라 낫을 빼어들어 살인을 하게 되고, 이 영화는 일제통치와 피압박자의 대립을 상기케 하는 개와 고양이(자막)의 비유, 침략자의 패망과 독립에의 열망을 암시한 진시황 죽음 운운의 대사 및 사막의 환상 장면 등 상징적인 몽타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요소들이 이 작품을 우회적인 항일영화, 고유의 전통 인습과 정서가 배인 민족영화로 받아들이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러시아 용병으로 나갔다가 조국에 돌아왔으나 차거운 현실에 직면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르는 한국청년 이야기 <풍운아>(1926)를 비롯, <들쥐>(1927) <금붕어>(1927) 등 다섯 편의 조선키네마프러덕션 제작 영화를 내놓고 자신이 세운 나운규 프로덕션으로 자리를 옮겨 <잘있거라>(1927)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 등 모두 다섯 편을 제작하게 된다. 이중 <사나이>(홍개명 감독) 한 편만 제외하고는 다 그가 감독한 것이다. 특히 그 자신의 각본 감독 주연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찾아서>는 당초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검열 당국의 지시로 이루어진 <저 강을 건너서>에 이어 세 번째 제목이 바뀌는 곡절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치솟는 인기에 자만한 신변 관리와 무절제한 여성편력의 후유증은 일본인(원산만프로덕션)이 제작한 <금강한>(1931)에 조연을 맡게된 것을 고비로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 시기에 <홍길동>을 비록 <암굴왕>(1932),<내가 죽인 여자>,<장화홍련전>(1933)등 10여 편의 활동사진 연쇄극과 지방 공연에 빠져야 했던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는 이 무렵에 출연 또는 감독한 <철인도>(1930),<개화당이문>,<임자 없는 나룻배>(1932),<종로>(1933)를 포함, 12년 간의 영화활동을 통해 <무화과>,<강 건너 마을>,<그림자>(1935),<아리랑 3편>(1936 발성),<아리랑 3편>(1936 발성),<오몽녀>(1937 발성) 등 26편의 영화를 내놓았다. 이를 다시 분류하면 제작 5편, 각본 <들쥐>,<강 건너 마을>등 18편, 감독 <아리랑>,<풍운아>,<오몽녀>등 16편, 출연 <사랑을 찾아서>,<임자없는 나룻배>등 24편, 편집 <철인도>,<무화과>등 11편이다. 이밖에 <말 못할 사정>(1931),<10년>(1931),<황무지>(1936),<불가사리>(1936)등 빛을 보지 못한 4편의 시나리오가 있다. 그의 말년은 폐결핵과의 싸움이었다. 나운규는 병든 몸을 이끌고 혼신의 힘을 다해 촬영한 윤봉춘 노재신 주연의 <오몽녀>(1937)를 유작으로 남겼다. <오몽녀>는 슬럼프에 빠져 쇠퇴의 길로 들어선 그의 말년을 반전시킬 수 있는, 주목할 만한 가작이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태준이 휘문고보 2학년 때 교지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지참봉이란 인물이 주워다기른 오몽녀의 수난과 사랑을 그린 문예물로서 나운규는 출연은 하지 않고 메가폰만 잡았다. <오몽녀>에 대해 뒷날 이규환은 '재기가 번뜩이는 명작'이라고 전제한 후 개인적으로는 <아리랑>보다 우수한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나운규는 역시 연기자라기보다는 연출자로서 역량있는 영화인이었다고 회고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영화 60년/중앙일보-1980.1.19) 그는 1937년 8월 9일 오전 1시 25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장례는 최초의 영화인장으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지금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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