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훈
Jin Hoon / 秦薰 / 1902  ~  1971
본명
강홍식 (Gang Hong-sik)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2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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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내고향 (강홍식, 1949)
배우 :
거경전 (방한준, 1944) 春川砲手
망루의 결사대 (이마이 다다시, 1943) 김 순사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 안인규
복지만리 (전창근, 1941)
먼동이 틀 때 (심훈, 1927)
산채왕 (이경손, 1926)
장한몽 (이경손, 1926)

주요경력

1917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행
일본 대성중학교 4년 때 동경가극단에 입단,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서 춤과 노래를 사사
1921년 다이카츠(大活) 영화사에 입사
1922년 다이카츠(大活)가 쇼치쿠에 인수되며 퇴사
닛카츠 영화사에서 石井輝男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
1925년 귀국, <장한몽>으로 조선영화계 데뷔
1926년 닛카츠 복귀
1927년 심훈의 권유로 조선에 돌아와 <먼동이 틀 때> 출연
1929년 신파극단 취성좌 입단
1929년 12월 취성좌 탈퇴 후 조선연극사 창설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처녀총각>, <이 잔을 들고> 등 취입
1941년 조선연극문화협회 산하 현대극장 입단
1945년 8월 15일 황해도 신천에서 예술공작대 책임자
1946년 북조선연극동맹 중앙위원
1947년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 연출부장
1949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고향> 연출
1951년 조선영화동맹 위원
1971년 10월 9일 함경남도 요덕수용소 수감 중 사망

기타정보

기타이름
石井輝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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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평양에서 태어나서 평양 광성고보 2학녀인 15세 때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성중학교 4학년까지 들었다고 한다. 동경오페라에 들어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테너로서 하이 C까지 뽑아 올리는 능력에 이시이 바쿠가 그를 애지중지 했지만, 사생활 문제로 오페라 가수로는 성공하지 못 했다고 한다. 이후 일활(日活)에 들어가서 야마모토 가이치(山本嘉一)에게 연기를 배웠다. 1925년 <쌍옥루>, 1926년 <장한몽>과 <산채왕>에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1927년 일활 관서촬영소 신극부 전속배우로 활동하던 강홍식은 귀국하여 심훈이 감독한 <먼동이 틀 때>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심훈은 “남성미의 권화(權化)인 듯한 당당한 체구”와 “명랑하고 저력잇는 음성”에 “원숙한 그의 연기”가 덧붙여진 강홍식을 배우로서 최상이라고 평가하였다(동아일보c; 동아일보d; 심훈). 이후 강홍식은 연극계로 진출하였다. 취성좌를 거쳐 조선연극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조선연극사에서 무대감독의 중임을 맡았다고 한다. 1933년 무렵 부인인 전옥과 함께 조선연극사를 탈퇴하고, 빅터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활동하였다(동아일보e; 조선일보면; 심훈).
강홍식을 다시 영화로 불러내려고 한 것은 심훈이었다. 1936년 심훈은 <상록수>를 영화화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강홍식과 전옥을 남녀주인공으로 <상록수>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동아일보f). 하지만 심훈이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사망하면서 이는 이루어지지 못 했다. 결국 강홍식과 전옥의 영화출연은 1938년 제작에 들어간 <복지만리>에서 이루어졌다(동아일보g). 일제 말기에는 <집 없는 천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거경전>(1944) 등에 출연하였다. 해방 이후, 강홍식은 1949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의 연출을 맡았다(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6년 2월 28일 5면.
동아일보b 1926년 11월 11일 5면.
동아일보c 1927년 8월 14일 3면.
동아일보d 1929년 1월 26일 8면.
동아일보e 1931년 7월 11일 4면.
동아일보f 1936년 3월 18일 3면.
동아일보g 1938년 4월 16일 5면.
조선일보 1933년 5월 28일 석간 3면.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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