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탁
Jeong Gi-tak / 鄭基鐸 / 1905  ~  1937
대표분야
제작/기획, 배우, 감독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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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상해여 잘 있거라 (정기탁, 1934)
삼웅탈미 (정기탁, 1928)
화굴강도 (정기탁, 1928)

기타정보

기타이름
정기택, 정운파, 鄭基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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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평양에서 태어난 정기탁은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광성소학교를 졸업한 후, 배재고보에 입학하여 2학년까지 다녔다. 그 후에는 상해에서 4년간 있으면서 운동과 음악에 힘썼다고 한다. 다시 조선에 돌아와서는 <개척자>에서 변영일 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하였다(동아일보b). 1926년에는 최초의 활극으로 꼽히는 <산채왕>에 출연하였으며, 조일재를 주축으로 조직된 계림영화협회 제1회 작품인 <장한몽>에서는 김중배 역을 맡았다(동아일보a; 조선일보). <봉황의 면류관>에서는 자신이 직접 제작하여 주연을 맡았다. 계속해서 1927년 조선키네마 제5회 작품으로 나운규가 감독한 <금붕어>에 출연하였다. 정기탁은 이 영화에서 나운규, 신일선, 김정숙, 주삼손 등과 함께 연기하였다(동아일보b; 동아일보c). 그 후, 1927년 하반기에 정기탁은 김동평, 이경손과 함께 평양키네마를 설립하고 뒤마의 작품인 <춘희>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하였다. 1928년 개봉한 <춘희>의 감독은 이경손이 맡았다. 정기탁은 신인여배우인 김일송과 함께 주인공을 맡았으며, 이를 계기로 연인 관계가 된 두 사람은 1928년 4월 1일 상해로 떠났다(동아일보d; 동아일보e; 동아일보f). 상해에서는 여운형의 소개로 대중화백합영편공사에서 안중근의 최후를 스토리로 한 <애국혼>과 <흑의의 기수>, <상해여 잘 있거라>, 그리고 중국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는 <출로(出路)>(1934) 등의 감독, 각색, 주연을 맡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당시 상해에 있던 이경손, 김일송, 한창섭 등과 함께 여러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상해 생활을 청산한 이후에는 일본 쿄토에 있는 제국키네마에서 이창용과 함께 영화연구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심훈; 대중예술인 사전; 김종원).

* 참고문헌
조선일보 1926년 3월 1일 조간3면.
동아일보a 1926년 2월 28일 5면.
동아일보b 1926년 10월 26일 5면.
동아일보c 1927년 7월 1일 3면.
동아일보d 1927년 11월 16일 3면.
동아일보e 1928년 4월 2일 3면.
동아일보f 1928년 6월 15일 8면.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일명 운파. 1905년 평양시 수옥리에서 미곡상을 하는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 광성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 감리교 계열인 배재고보를 다니다가 2년 만에 휴학한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가 영화계에 등장한 것은 4년 간의 상해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1925년 이경손 감독의 <개척자>에 출연하면서 부터이다. 이듬해 <장한몽>(1926)에서 주인공 이수일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신사역을 비롯 <산채왕>(1926),<금붕어>(1927)등에 출연, 미남형의 배우라는 말을 들었다. <산채왕>의 흥행 실패로 이경손이 어렵게 되자 평양의 부친을 설득해 정기탁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그를 끌어들여 <봉황의 면류관>(1926)을 제작, 주연한다. 이 영화의 실패로 아버지의 돈을 모두 탕진하게 되자 새로운 자본주를 물색하여 알렉산더 뒤마 원작 <춘희>(1928)를 제작,주연했으나 이 영화 역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가 감독 작품으로 첫선을 보인 것은 같은 해 상해로 건너가 만든 <애국혼>(1928)이었다. 이른바 상해파 영화의 기점이 된 이 영화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 정기탁에게 진정한 영화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교포사회에 널리 읽힌 박은식의 <애국혼>을 각색하여 여운형의 소개로 중국 3대 영화사의 하나인 대중화백합영편공사를 찾아가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안중근 이야기는 반일감정이 높은 중국 관객에도 좋은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이 영화의 감독 뿐만 아니라 주연까지 맡았다. 계속해서 <화굴강도>(1928),<여애도>(1929),<흑의 기사>(1933)등과 대표작이 된 <상해여 잘있거라>(1934)를 연출하게 된다. 그는 13편의 영화에서 감독, 또는 주,조연을 했다. 그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자살설 등 여러가지로 엇갈릴 뿐 분명하게 알려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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