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웅
Na Ung / 羅雄 / 1909  ~ 
본명
나준영 (Na Joon-dae)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20, 19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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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우르러라 창공(원제:仰げ大空) (김영화, 1943) 아오키 선생님
아내의 윤리 (김영화, 1941)
어화(漁火) (안철영, 1938) 장용운(장주사)/ 철수(장주사 아들)
홍길동전(후편) (이명우, 1936)
연애광상곡 (김영환, 1931)
젊은이의 노래 (김영환, 1930)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양철, 1930)
약혼 (김영환, 1929)
지나가의 비밀,일명 흑진주 (유장안, 1928)
나의 친구여 (유장안, 1928)

주요경력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 연극인
1929년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창립회원
극단 신건설 및 동방키노에 관계
1932년 영화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방면
제2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체포
신건설사 사건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로 참여
일제 강점기 말 조선연극문화협회에 가담
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 제1회 연극경연대회 연출상 (산풍)
1945년 8월 16일 일본 항복 선언 이틑날 조선연극건설본부 결성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및 조선연극동맹에 가담
1946년경 월북

기타정보

기타이름
나준대 (羅俊大), 라웅
수상내역(기타)
■ 수상내역(연극)
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 제1회 연극경연대회 연출상 (산풍)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나웅은 나도향의 조카이다. 심훈은 나웅이 배우로서보다는 시나리오 작가에 더 어울린다고 평하기도 하였다(심훈). 영화배우로서 나웅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약혼>(1929)이었다. 대륙키네마의 제2회 작품인 <약혼>은 팔봉 김기진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기쁜 가운데에도 슬픔이 들어보이는 그의 표정” 연기에 대해서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중외일보; 동아일보). 참고로 <약혼>은 대륙키네마의 다른 작품인 <흑진주>(1928)와 동시에 북경에서 로케를 진행하였는데, 나웅은 이 두 작품에 모두 출연하였다(조선일보a). 그러나 <흑진주>는 제작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김종원).
그리고 나웅은 이운방, 손용진, 서월영 등과 함께 대구 녹성(綠星)키네마를 조직하고 제1회 작품으로 어부들의 실생활을 묘사한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1931)에 출연하였다. 이 작품은 동해안에서 2개월여 촬영되었으며, 조선 최초의 해양극이었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나웅은 1929년 12월 계급의식을 파악한 예술운동을 주장하며 창립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참여하였다. 그는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연극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조선일보b). 나웅은 이후 김태진(남궁운), 박완식, 추적양, 강호, 이규설 등과 함께 영화제작소 동방키노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33년 ‘연극부대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연극부대>는 동방키노의 기관지 이름이었다. 연극부대 사건은 동방키노의 인물들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과 접촉하며, <영화구락부(映畵クラブ)>라는 유인물을 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배포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조선일보d; 경종경고비). 이 사건에서는 풀려났지만 1934년 ‘신건설사 사건’으로 재검거 되어 구속되었다.
이후 나웅은 <미몽>(1936), <어화(漁火)>(1938), <아내의 윤리>(1942) 등 영화에 출연하였고 1938년 조직된 전향자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경고특비 제1831호의 1). <우르러라 창공(仰げ大空)>(1943) 등의 친일 영화에 출연하였다. 개인적으로는 1940년에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인 정약수(鄭若水)와 결혼하였다(조선일보e).
해방 후에는 조선영화동맹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2월에 개최된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영화동맹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하였다. 이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조직한 교육 및 문화대책연구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자유신문a; b). 이후 월북하였다.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8년 3월 23일 석간 3면.
조선일보b 1929년 12월 17일 석간 5면.
조선일보c 1930년 9월 19일 석간 5면.
조선일보d 1933년 5월 28일 석간 3면.
조선일보e 1940년 4월 2일 조간 4면.
중외일보 1928년 3월 21일 3면
동아일보 1929년 2월 24일 3면
자유신문a 1946년 2월 9일 2면.
자유신문b 1946년 2월 26일 1면.
심훈, 「조선영화인 언파레드」, 『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56-66쪽.
京鍾警高秘 第1937號 「演劇運動社員竝映畵部隊社員等檢擧ニ?スル件」, 1933년 2월 10일.
京高特秘 第1831號ノ1 「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團聯盟京城支部員ノ勤勞奉仕ニ?スル件」, 1938년 8월 10일.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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