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규
Ju In-gyu / 朱仁奎 / 1902  ~  1956
대표분야
배우,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1940
DB 수정요청

필모그래피 (12)

더보기
각본 :
도적놈 (윤봉춘, 1930)
배우 :
거경전 (방한준, 1944) 松田船長
태양의 아이들 (최인규, 1944)
망루의 결사대 (이마이 다다시, 1943) 황창덕
복지만리 (전창근, 1941)
딱한 사람들 (황운, 1932)
도적놈 (윤봉춘, 1930)
낙원을 찾는 무리들 (황운, 1927)
뿔빠진 황소 (김태진, 1927)
풍운아 (나운규, 1926)

주요경력

1922년 악극단 예림회에 가입, 안종화를 만남
1924년 예림회 해체 이후 부산으로 간 안종화의 권유에 따라 무대예술연구회 가입 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자격으로 입사
1925년 <운영전> 실패 이후 윤백남을 따라 서울로 와서 백남프로덕션 창립에 출자
1925년 여름 백남프로덕션 해산
1926년 조선키네마사의 <아리랑>에 출연
1926년 <풍운아>에 출연한 뒤 조선키네마사를 나와 계림영화사로 옮김
1927년 <먼동이 틀 때>의 실패로 계림영화사가 문을 닫자 나운규프로덕션으로 옮겨 <뿔빠진 황소>에 출연. 이 영화가 실패한 뒤 함흥으로 돌아감
1930년 <도적놈>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계 복귀, 출연 후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 함흥질소회사에 취업 후 노조 활동
1932년 황운과 더불어 함흥에 길안든영화사를 설립 후 <딱한 사람들> 제작
1932년 6월 19일 적색노조사건 이후 체포
1934년 10월 징역 5년 언도
1938년 출소 후 고려영화협회의 <복지만리>로 영화계 복귀
1939년 고려영화협회 직속극단 고협 창설
1945년 소련군에 의한 함흥 해방 이후 함흥 검찰소 소장으로 활동
1946년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 영화동맹 위원장으로 선출
1947년 2월, 건설이 시작된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장으로 선출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박한군의 서울 점령 후 서울의 영화인을 평양으로 데려가는 한편 전황을 기록하고 인민군을 위안하는 업무를 맡음
1956년 9월 숙청이 한창이던 중 자살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주인규는 부산에 설립한 조선키네마사의 연구생이었다. 윤백남이 독립하여 윤백남프로덕션을 만들 때, 나운규, 남궁운, 이경손 등과 함께 옮겨갔다.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주인규는 이경손 감독의 <개척자>를 통해 주연으로 데뷔하였다. <개척자>에서 주인규는 성애(性哉) 역을 맡았다. 이후 <풍운아>, <아리랑>, <뿔 빠진 황소>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주인규는 악역으로 1인자였다고 한다. 박력 있는 그의 연기는 정말 특출난 것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액션이 좀 과장된 측면도 있었다고 한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심훈).
주인규의 영화경력에서 인상 깊은 인물로는 같은 함흥 출신인 황운이 있다. 두 사람은 1927년 <낙원을 찾는 무리들>에서 감독과 배우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미국에 가서 영화공부를 하고 온 황운이 함흥에 길안든영화사를 만들고, 첫 작품으로 제작한 <딱한 사람들>에 주인규가 출연하였다. 물론 이는 주인규가 1931년부터 함흥으로 내려와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영화의 내용이 “불합리한 해고로 인해 생긴 실업자들의 실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흥남질소비료회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도 주인규가 영화에 출연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규는 1931년 무렵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제3유산계(硫酸係)에서 일하면서 인안계(인안계)의 파업을 지도하는 등 그곳에서 공산주의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한 사람들>의 촬영에 공장 직공 1500명 정도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주인규의 도움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동아일보c; 동아일보d; 사회주의인명사전).
주인규는 함흥지역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1931년 10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프로핀테른 연락부로 가서 범태평양노동조합의 ‘10월 서신’을 받아왔다. 이후,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太勞)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4년 10월 함흥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고려극단이라는 이동극단을 조직해 국내와 만주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러면서, <복지만리>(1941)와 <망루의 결사대(원제:望樓の決死隊)>(1943) 등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함남도당 검찰부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정한 영화촬영소 건설사업을 담당했고, 이후 영화제작부문 최고책임자가 되었다(사회주의인명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5년 5월 10일 2면.
동아일보b 1931년 7월 25일 5면.
동아일보c 1931년 11월 13일 4면.
동아일보d 1932년 6월 15일 5면.
조선일보a 1927년 5월 11일 석간2면.
조선일보b 1927년 6월 12일 석간3면.
심훈,「朝鮮映畵人 언파레드」,『동광』제23호, 1931년 7월호.
강만길ㆍ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