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Yim Hwa / 林和 / 1908  ~  1953
본명
임인식 (Yim In-Shik)
대표분야
배우, 평론
활동년대
1920, 19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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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 :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 조선어 대사
배우 :
지지마라 순이야 (남궁운, 1930)
지하촌 (강호, 1930) 민효석
혼가 (김유영, 1929) 김영일(젊은 마부)
유랑 (김유영, 1928)

주요경력

1928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가입
1930년 일본으로 가 '무산자' 그룹에서 활동
1931년 귀국
1932년 카프 서기장
1945년 8월 17일 문학건설본부 창립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 결성 주도
1947년 11월 월북
1953년 8월 남로당 중심인물들과 함께 북한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음

기타정보

기타이름
김철우, 림화, 성아, 쌍수대인, 임다다, 임유, 청로
저술내역
시집 『현해탄』(1938)
평론집『문학의 논리』(1940)
시집『찬가』(1947)
시집『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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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영화계에서 임화는 배우와 영화평론가로 주로 활동하였다. 임화의 영화 평론 중에서 확인 가능한 최초의 글은 1926년 6월 20일 ??매일신보??에 발표한 ?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를 들 수 있다. 임화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시대극 제작 열풍을 “흥행 효과와 경비 감약(減約)만을 위”해 민중을 속이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비판하였다(매일신보). 1927년에는 고한승, 김기진, 안석영, 김영팔 등이 발기하여 조선영화예술협회를 건설했는데, 임화는 김유영, 서광제, 조경희 등과 함께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임화는 영화이론과 분장술, 그리고 연기 실습 등을 공부하였으며, 나중에는 이 단체의 주도권을 접수하였다(김종욱; 대중예술인 사전). 1928년에는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 같이 영화를 공부했던 김유영, 김영팔, 서광제, 이우, 차곤 등과 함께 만든 영화가 바로 <유랑>(1928)이었다. 이 영화는 김영팔의 각본을 김유영이 감독하였는데, 임화는 주연을 맡았다(동아일보). 프롤레타리아 영화를 표방한 <유랑>은 흥행에서 실패하였다. 그리고 1929년 서울키노가 제작한 <혼가>에서 임화는 다시 주인공으로 참여했지만 이 영화도 흥행에 참패하였다. 여기서도 임화는 주연을 맡았지만, “표정의 심각미가 적은 까닭”에 관객들에게 “인상의 강렬성”을 주지 못 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중외일보b).
1920년대 후반기에는 카프를 둘러싼 논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여름에 임화는 심훈이 각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먼동이 틀 때>를 공격하였다. 임화는 먼저 심훈이 카프에 가담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은 뒤,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공할 만한 위대한 기능”을 현실을 위한 “투쟁의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영화의 목적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따르지 않는 심훈을 소부르주아로 규정하였던 것이다(중외일보a). 1929년에는 영화소설 ??신문지와 말대리??를 아동잡지 ??별나라??에 연재하였고, ??조선지광??에는 ?영화적 시평?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고 한다. 1929년 가을 박영희의 도움을 받아 카프진영 내에 부상한 동경파(東京派)의 이론적인 면을 습득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는 이북만의 집에 기거하며 무산자사에서 사원생활을 하였다. 1930년에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의 당면한 중심적 임무」란 글을 통해 카프의 볼쉐비끼화를 주장하였다.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와 결혼한 후, 1931년 귀국하였다. 이후 임화는 김남천과 손잡고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카프 제1차 검거 사건으로 박영희와 함께 3개월가량 복역하였다. 1932년 윤기정의 후임으로 카프 서기장이 되었으며, 김남천의 감옥 체험이 반영된 소설 <물>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34년 카프 제2차 사건 때 구속되었으나 폐결핵으로 풀려났다. 1935년 김기진,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경찰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였다. 1940년 고려영화사 문예부, 1943년 조선영화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1944년까지 근무하면서 ??조선영화 연감??, ?조선영화발소사? 등을 썼다. 이외에도 임화가 남긴 영화비평으로는 ?조선영화의 제경향에 관하여(朝鮮映?の諸傾向に就いて)?(1930), ?서울키노 영화 <화륜>에 대한 비판?(1931), ?조선영화론?(1941), ?영화의 극성과 기록성?(1942) 등이 남아 있다. 해방 이후, 남로당의 문화담당 최고이론가가 되었고 이 시기에 ?인민항쟁가?를 짓기도 하였다. 월북 이후, 박헌영ㆍ이승엽의 남로당계열에서 활동한 임화는 1953년 남로당 숙청과정에서 사형 당했다(김종욱; 대중예술인 사전; 인명사전).

* 참고문헌
매일신보 1926년 6월 20일 3면.
동아일보 1928년 1월 17일 3면.
중외일보a 1928년 7월 30일 3면.
중외일보b 1930년 3월 13일 3면.
조선일보 1931년 4월 2일 석간 5면.
김종욱, <일제강점기 임화의 영화 체험과 조선영화론>, <<한국현대문학연구>> 31, 2010.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강만길ㆍ성대경 엮음,『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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