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수
Im Hwa-su / 林和秀 / 1924  ~  1961
본명
권중각 (Kwon Jung-gak)
대표분야
제작/기획
활동년대
1950,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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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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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랑,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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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부인 (박성호, 1959)
실례했습니다 (박성호, 1959)
여인숙 (김화랑, 1959)
재생 (홍성기,박찬, 1959)
자나 깨나 (홍성기, 1959)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신상옥, 1959)

주요경력

1946년 평화극장 사장
1948년 제일극장 사장
1955년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1957년 국내 최초의 외국 합작 영화인 한홍합작 영화 <천지유정> 제작
1958년 반공예술인단장
1958년 화랑동지회 이사장
1959년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단장
1959년 반공예술인단 단장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쿠데타군에게 체포되어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음
1961년 12월 21일, 사형 집행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4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주간조선). 본명은 권중각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개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임화수로 개명했다고 한다. 영화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 이후로, 종로 4가에 있는 제일극장의 매점원으로 일하면서부터 이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제일극장을 염가에 불하받고, 1951년 8월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여 극장주가 된다(주간조선). 1955년 영화, 연극, 악극, 국극 등 당시 연예, 공연의 모든 형태를 망라하는 대형 연예회사인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사장으로 나서며(한국일보) 한국 연예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1954년에는 연예지 『연예시보』를 창간하고, 『카오스』라는 연예 월간지 또한 발행했다. 1957년에는 한국 영화 역사에서 최초의 합작영화 <이국정원>(1957)을 홍콩의 쇼브라더스와 합작 제작한다(주간조선). 그러던 1959년 1월 대한반공청년단의 종로구단 책임자로 나서고, 1959년 3월에는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연예인들을 선거의 선전공작대로 활용하고(오유석), 자유당 이승만을 위한 영화인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과>(1959) 등을 제작하며 3.15 부정 선거 전후의 정치 상황에 깊숙이 개입한다. 1960년 5.16 이후, 혁명군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61년 12월 21일 처형된다.

* 참고문헌
한국일보 1955년 8월 2일 4면
주간조선 1782호, 2003년 12월 11일
오유석, “서울에서의 4월 혁명-3.1절 삐라사건에서 4.26까지”, 4월 혁명과 한국의 민주주의 학술회의, 2010년 4월 16일

[작성: 황미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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