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인
Bae Seok-in / 裵錫仁 / 1929  ~ 
대표분야
감독, 배우, 편집, 제작/기획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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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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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아름다운 대한민국 (Dance of the East) (배석인, 1986)
가스시대 (배석인, 1982)
L.P가스 안전사용 (배석인, 1982)
문자와 활자 (배석인, 1981)
영수의 자전거 (배석인, 1981)
정상에 오르기까지 (배석인, 1975)
기생충을 예방하자 (배석인, 1974)
한국의 수출완구 및 우수운동구 (배석인, 1974)
사랑의 피 (배석인, 1974)
한국의 공예품 (배석인, 1973)

주요경력

부산고등학교 영어교사
USIS 상남 촬영소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1955-1958년 주한미국공보원 영화과 근무
1958-1967년 국립영화제작소 근무
1964년 미국 국무성 초청 연수, 미국 남가주대학 특강
1965-1968년 이화여자대학교, 남산 드라마센터 출강
1971년 한국문화공사 설립
1972-1984년 배프로덕션 설립 및 운영
1976년 한국문화영화제작자협회 부회장
1984-1997년 대한생명 63 아이맥스영화관 상임이사
1985년 대한생명 산하 여의도 63빌딩 아이맥스 영화관 개관 당시 담당자
1997년 리스본 엑스포 한국관 설치 자문위원

기타정보

주요기타작품
■ TV
1965-1968년 외화 <왈가닥 루시>, <백의의 천사> 번역
1971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의 미(美)> 제작
수상내역(영화)
1963년 제2회 대종상영화제 문화영화상 수상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1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아대학교 정경과를 다니던 중 야간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51년 대학 졸업 후 주한미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다(한국영상자료원). 영화 데뷔는 김홍 감독의 1955년작 <자유전선>에 주연배우로 출연하면서였으며(경향신문a),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그해부터 주한미국공보원(USIS) 영화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한국영상자료원). 그곳에서 영화 제작을 배우며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만들던 그는 1958년 마산일보사를 주제로 한 문화영화 <지방신문 편집자>를 제작하기도 했다(한국영상자료원, 유에스아이에스). 1958년 대한민국 정부의 국립영화제작소로 옮긴 그는 미공보원에서 체득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에서 주로 교육을 담당했다고 한다(한국영상자료원). 감독으로서 역량을 대외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안팎부터로, 이은상 원작의 <피어린 육백리>로 제2회 대종상 문화영화상을 받았고, 이 영화와 <자유의 방색>,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등을 아시아영화제에 출품했다(한국영상자료원, 동아일보a, 경향신문b). 1964년에는 유현목, 김인걸, 최일수 등과 함께 “전위적인 단편영화 제작”을 목표로 하는 동인회 시네포엠을 발족하기도 했다(경향신문c). 같은 해 9월에는 배우 김희갑과 함께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약 4개월 간 미국 연수길에 올랐으며(동아일보b), 당시 미국 남가주대학교에서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한국영상자료원). 귀국 후 1967년 김희갑을 주연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의 집을 순회하는 부부를 담은 장편영화 <팔도강산>을 연출했으며, 공보부와 국립영화제작소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제작한 정권 홍보성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경향신문d, 김희갑). 이 작품의 성공으로 인정을 받은 그는 같은 해 “세계무전여행”을 주제로 ‘자유’ 진영 각지를 로케이션 촬영한 영화 <지상최고의 여정(세계로 뻗는 한국)>을, 그 이듬해 1968년에는 남태평양 사모아에서 세미다큐멘터리 풍의 극영화 <사모아의 연풍>을 연출했다(동아일보c, 경향신문e). 1968년을 마지막으로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한 배석인은 1971년 호현찬, 양종해와 함께 문화영화 제작사인 한국문화공사를 설립했으며, 이 영화사가 문을 닫게 되자 1972년 다시 배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한국의 미(美)>, <출판문화> 등이 있다(매일경제a, b, 한국영상자료원). 1976년에는 유현목을 회장으로 한 한국문화영화제작자협회를 창립하여 양종해와 함께 부회장직을 맡았다(동아일보d). 1984년 대한생명의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에 스카웃된 그는, 캐나다에서 아이맥스 영화제작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서 1986년 국내최초의 아이맥스 영화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개봉했다(한국영상자료원, 매일경제c). 아이맥스영화관에서 상임이사로 1997년까지 근무한 후 퇴사했으며, 1998년 리스본에서 열린 엑스포의 한국관 설치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한국영상자료원).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55년 4월 29일자 4면
경향신문b 1963년 4월 8일자 5면
경향신문c 1964년 1월 20일자 5면
경향신문d 1967년 3월 18일자 8면
경향신문e 1968년 3월 9일자 5면
동아일보a 1963년 1월 30일자 5면
동아일보b 1964년 9월 15일자 6면
동아일보c 1967년 7월 6일자 5면
동아일보d 1976년 12월 8일자 5면
매일경제a 1972년 1월 6일자 7면
매일경제b 1972년 11월 27일자 6면
매일경제c 1986년 6월 28일자 9면
김희갑, 『어느 광대의 사랑: 김희갑 자전 회고록』, 삼진기획, 1992, 215-254쪽.
유에스아이에스 코리아, 『USIS FILM CATALOGUE 1964 ? 미국공보원 영화목록』, 주한미국공보원, 1964, 2-232쪽.
한국영상자료원 편, 『2009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사업 <생애사> 배석인』, 한국영상자료원, 2009, 35-106쪽.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6.25 직후 미국공보원(USIS)에 근무했으나 공보부 선전국 영화과로 옮겨 뉴스 편집을 담당했다. 1955년 김홍 감독의 <자유전선>과 <언덕의 종은 울려도>(1959)가 만들어 질 때는 각기 출연과 편집으로 참여하였다.
1967년 <팔도강산> 작품으로 데뷔했다. 김희갑, 황정순, 김진규, 허장강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전국적으로 대히트를 친다.
1남 6녀를 자식으로 둔 노부부가 팔도강산 곳곳에 뿔뿔히 흩어져 사는 아들 딸들의 초대를 받아 전국 유람 여행을 떠난다. 가는 곳마다 몰라보게 변모한 조국의 근대화된 모습은 노부부를 흐뭇하게 만든다. 더구나 아들 딸들은 하나 같이 건실하게 직접 간접으로 조국 근대화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게 전국 유람을 마친 부모에게 아들 딸들은 정성 모아 회갑 잔치를 크게 열어 드린다. 노부부에게 더 이상 기쁜 일은 없었다.
<팔도강산>은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 취지에 맞춘 계몽영화이다. 이밖에 사모아에 출어중인 청년이 펜팔을 통하여 사귄 아가씨를 현지에 초청한 것을 계기로 사랑의 결실을 맺기까지를 그린 <사모의 연풍>(1968)과 현지로케를 통하여 해외로 뻗는 한국인의 기상을 그 고장의 풍물과 함께 담은 장편 기록영화 <세계로 뻗는 한국>(1968)이 있다. 그는 대한생명 산하 아이멕스 영화관의 업무를 관장하는 상임이사로 재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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