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백남
Yun Baek-nam / 尹白南 / 1888  ~  1954
본명
윤교중 (Yun Gyo-jung)
대표분야
시나리오, 감독, 제작/기획
활동년대
1920, 1930, 1940,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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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정의는 이긴다 (윤백남, 1930)
촌의 영웅 (윤백남, 1925)
운영전(총희의 연) (윤백남, 1925)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

주요경력

1911년 보성전문 강사
1912년 극단 "문수성" 조직
1913년 『매일신보』 편집국장
1916년 반도문예사 설립 후 『예원』창간, 극단 "예성좌" 조직
1917년 백남 프로덕션 설립
1918년 김해 합성학교 교장
1919년 동아일보사 입사
1922년 예술협회 소속 극단 "예술좌" 참여, "민중극단" 조직
1930년 경성소극장 창립 동인
1931년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
경성방송국 문예부 주임
1934년 만주로 이주
재만(在滿) 조선 농민문화향상협회 상무이사
1945년 귀국
1946년 국민대학 이사 겸 교수
해군 공보실장(중령)
1953년 서라벌 예술학교 초대 학장
1954년 예술원 초대 회원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한국 영화의 여명기에 기여한 대표적인 영화인의 한 사람이다. 1901년 수형조합 이사로 재직하였으나, 한일합방 이후 사퇴하고 보성전문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연극계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 일재 조중환과 함께 극단을 설립하고, 원각사를 인수하는 등 신극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는 문수일, 이월화, 안종화 등을 이끌고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민중극단의 인물들을 이끌고 체신국의 의뢰를 받아 이월화 주연의 <월하의 맹세>를 감독하였다. 이 영화가 한국 최초의 극영화였다. 이를 계기로 영화계에 투신하여 안종화, 이월화 등과 함께 일본인 왕필렬이 부산에 세운 조선키네마사에 들어갔다. 조선키네마사에서 김우연을 주연으로 한 <운영전>의 각색과 감독을 담당하였다. 이후 윤백남은 조선키네마에 연구생으로 있던 이경손, 나운규, 남궁운, 주인규 등을 이끌고 조선키네마사를 나와 윤백남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1925년 나운규와 김우연을 주연으로 하는 <심청전>을 내놓고, 제2회 작품으로 <개척자>를 준비하다가 자금문제로 해산하였다. 이후 동아일보사가 제작한 강석연, 이춘 주연의 <정의는 이긴다>(1930)를 감독하고 간헐적으로 시나리오 등을 집필하지만, 초기처럼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못 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이청기). 해방 이후 서라벌예술학교 학장을 역임하고 심장병으로 1954년 9월 사망하였다(동아일보c).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5년 11월 21일 5면.
동아일보b 1931년 7월 25일 5면.
동아일보c 1954년 10월 1일 2면.
이청기, <한국영화의 전사시대 및 발생기의 특성에 관한 연구>, <<예술논문집>> 제6집, 대한민국예술원, 1967.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교중. 아명 학중이다. 1889년 11월 7일 충청남도 논산군 성동면 화정1리 73번지에서 파평 윤씨 시병의 3남 1녀 중 2남으로 출생. 1901년(13세) 경성학당(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자리) 중학부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1906년 (18세)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과에서 동경고등상업학교로 옮겼다. 이때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1910년(22세) 동경고등상업학교 졸업. 일본 연극인 샤오리게이 이찌로오에게 사사, 귀국하여 관립 한성수형조합(상업은행 전신) 이사대리로 근무. 그 후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교수로 재임하면서 1912년 (@4세) 조일재와 극단 문수성을 조직하여 연극 <불여귀>를 원각사 무대에 올렸다. 1922년 민중극단을 창립하고 창작극 <등대지기>를 공연. 35세 때인 1923년 극영화 <월하의 맹서>(이월화,권일청,문수일,송해천,안광익 출연)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우리날 영화감독의 효시가 되었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정순(이월화)과 약혼한 청년 영등(권일청)이 노름과 주색으로 가산을 탕진하기에 이르자, 정순의 아버지(문수일)가 저축한 돈으로 ?G을 갚아주는 내용으로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저축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관제 보급영회이다. 4월 11일 경성호텔에서 국내 각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시사회를 열었다. 1925년(37세) 부산 조선 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 세종대왕의 네째 아들인 안평대군(유수준)이 총애하던 궁녀 운영(김우연)이, 문장이 뛰어난 선비 김진사(안종화)를 흠모하면서 빚어지는 사랑의 비극을 다룬 극영화 <운영전>을 각색,감독한다. 그는 정월 14일부터 5일간 단성사에서 상영한 이 영화에 나운규를 단역인 가마꾼으로 출연시켜 오늘을 있게 하는 발판이 되게 하였다. 같은 해 2월 윤백남 프로덕션을 서울 황금정(을지로5가)에 개설하여 <심청전>(1925,이경손감독)을 제작. 그러나 이경손 등 참여 스탭들의 이탈로 이 프로덕션은 사실상 7월로 해체된다. 1929년(41세)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 영화 <정의는 이긴다> 각본, 감독을 맡는 것으로 영화활동을 종결하였다. 이후 그는 경성방송국 문예부 주임으로 취임(1933)하게 되지만 만주 화북으로 이주하면서, 재만 조선 농민문화향상협회 상무이사에 취임(1937.5)한다. 이무렵 영화소설 <바다로 가는 사람>을 발표(1937).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후엔 국민대학 이사 겸 교수(1946)가 되었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종군하면서 해군 중령으로 임관, 공보실장을 지냈다. 그 뒤 서라벌 예술학교 초대 학장(1953)과 예술원 초대 회원으로 선임(1954)되었다. 그는 최초의 감독이 된 영화계의 선구자로 개인영화사(윤백남 프로덕션)를 설립했을뿐만 아니라, 연극 운동가이자 작가요 교육자로서 일생을 보내다가 1954년 9월 29일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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