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동
Kim So-dong / 金蘇東 / 1911  ~  1988
대표분야
시나리오, 감독, 제작/기획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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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신라성 (김소동, ) 연출
오! 내고향 (김소동, 1959)
(김소동, 1958)
아리랑 (김소동, 1957)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김소동, 1956)
목단등기 (김소동, 1947)

주요경력

한국영화과학연구소 창설
1954년 영화감독협회 회장
1957년 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장
1960년 한양대학교 영화학과 창설(한국 최초) 및 초대 영화학과 과장
1972년 한양대학교 문학박사 취득(한국 최초) "언어의 리듬이 영상에 미치는 영향"
1972년 영화학회 초대회장
한양대학교 영화학과 명예교수

기타정보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1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했으며, 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라 니혼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집안에서 원하는 법률가보다는 예술방면에 애착을 가져서 대학 재학중에 영화클럽 만드는 일을 주도했고, 상급반 때인 1935년에는 레코드 제작에도 손을 댔다(한국영화감독사전). 1939년 귀국하여 한국영화과학연구소를 창설하였다. 직접 각본을 쓴 <목단등기(牧丹登記)>로 1947년 감독 데뷔하였다. 이 영화는 한국 최초의 16mm 발성영화로 중국 구종길의 소설 『목단등기』를 각색하여 영화화한 것이다. 그는 설화나 구전소설 등을 영화화하는 것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대표작인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역시 잘 알려진 구전설화인 고구려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의 자명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영화의 새로운 진보를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경향신문a). 김소동은 나운규의 <아리랑>을 1957년 리메이크하여 그해 문교부 선정 우수국산영화상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1959년 근대화와 산업화가 시작되는 농촌사회의 현실을 비정하게 그린 <돈>은 당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과 비견되며 호평을 얻었으며(한국일보) 제2회 영평상 감독상을 수상했다(경향신문b). 김소동은 자신의 감독작뿐만 아니라 <목단등>(1964, 백호빈), <고가>(1977, 조문진) 등 다수의 다른 작품들에서 각본을 담당했다. 그 중 <고가>는 조선 개화기의 한 가족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그는 1953년 영화감독협회 회장, 1957년 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0년 한양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영화학과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초대 영화학과 과장으로서도 후진 양성에 앞장섰다고 한다(한국영화감독사전). 1972년에는 영화학회를 발족시켰다. 1988년 11월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56년 6월 17일자 4면
경향신문b 1959년 4월 29일자 4면
한국일보 1958년 3월 9일자
김종원 외,『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아호는 동파(東坡). 1911년 6월 3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중농(中農)인 함령 김씨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7년 서당교육이 향교교육으로 바뀌는 전환기에 향교건물을 사용하는 함창(咸昌) 보통학교 6년을 나오자 한복에 두루마기를 갖춰입고 상경,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에 들어갔다. 상급반에 오른 1930년 전후하여 조선극장에서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 <동도(東道)>(1920), 나운규의 <아리랑>(1926) <사랑을 찾아서>(1928)를 보고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제일고보를 졸업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일단 일본대학 예과에 적을 두었다. 불문과에 다니면서 프랑스의 토키 시대를 연 르네 클레르의 <파리의 지붕밑>(1930)을 비롯한 이 시대의 영화를 통해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우에노(上野)에 있는 중앙음악학교 작곡과에 들어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음해인 1933년 일본대학 법문학부 법률학과에 입학. 영국법을 전공하고 1936년 졸업하자 변호사가 되기 위해 2년 동안 준비한 고등문관 시험을 봤으나 낙방했다. 그는 집안에서 바라는 이 길보다 예술 방면에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대학 재학중에 영화클럽 만드는 일을 주도했고 상급반 때인 35년에는 레코드 제작에도 손댔다. <국경의 거리>로 유명한 일본의 작곡가 호소가와 준이찌와의 친교를 계기로 일활 촬영소 조감독이었던 친구 이병일을 끌어들여 코리아 레코드사를 설립. 서울에서 박기채 감독이 촬영중인 <춘풍>의 주제가 작사 작곡의 부탁을 받고 레코드를 제작해 보내기도 했다. 김목운(金牧雲)이라는 예명으로 그가 작곡한 이 레코드판 양면에는 ‘고별의 밤’과 ‘깨어진 정열’이라는 곡이 가수 김안라의 취입으로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스스로 표현했듯이 ‘동키호테 같은 행각’(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82. 2. 24~ )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을 대준 후원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 귀국하자 서울에서 운송회사, 기계공구상, 토목업에 종사하는 가운데 해방을 맞게 된다. 모교인 경기중고에서 교편을 잡는 것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으나 을지로 2가에 한국영화과학연구소를 창설하게 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와는 달리 변화있는 외길을 걷게 된다. 시청각 교육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형문화 영화 제작에 주력하는 한편 문교부를 통해 그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데뷔작인 <목단등기(牧丹登記)>(1947)도 자신이 설립한 한국영화과학연구소가 제작한 것이다. 한을 남기고 죽은 처녀 귀신이 성불하기 위해 한 남자와 동침한다는 괴기물로 중국소설 전등야화(前燈夜話) 에서 소재를 빌려 왔다. 이 한편을 만들어 놓고 후속타가 나오기까지는 9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다. 6. 25전쟁중 구하기 힘든 네가 필름을 모아 <신라성(新羅城)>이라는 키노드라마(연쇄극)를 만들어 대구에서 공개한 적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두 번째 영화가 선보인 것은 1956년,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가 바로 그것이다. 김진규·엄앵란 주연의 이 영화는 의상의 화려함을 내세우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에 주력한 사극이다.
김소동은 잇따라 나운규 20주기를 맞아 그의 원작인 <아리랑>(1957)을 비롯하여 <돈>(1958) <오! 내 고향>(1959)을 내놓았다. 민족정서와 항일정신을 담은 <아리랑>은 장동휘를 발탁하여 주인공인 영진 역으로 기용하는 한편, 나운규의 <아리랑>에 나왔던 신일선과 임운학을 출연시켜 작품성과 흥행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홍콩으로 수출되어 <阿里郞(아리랑)>(개봉명)은 한국영화 수출 제1호로 기록된다. 배금주의를 비판한 <돈>(김승호·최은희 주연)은 친구의 꼬임에 빠져 투전판에서 돈을 잃게 된 농사꾼 수전노가 이를 계기로 인생관이 달라지는 모습을 그린 것. 리얼리즘을 추구한 이 작품은 한국의 농촌을 어둡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호평과 비판이 엇갈렸으나 김승호의 중후한 연기와 함께 수작으로 평가되어 영화평론가협회상을 받았다. 자유당 말기의 사회 부조리와 도탄에 빠진 민중의 소리를 담아낸다는 거창한 의도를 갖고 제작(김 푸로덕션)한 <오! 내 고향>은 양공주로 전락한 시골처녀가 애인과 함께 부패한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줄거리를 가진 것으로 한때 일본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木下惠介 각본)와 유사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오! 내 고향>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감독생활에서 은퇴. 한양대학교에 우리나라 최초로 영화학과를 창설(1960)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한편 초대 영화학과 과장으로 후진 양성에 앞장섰다. 1972년엔 한양대학교에서 영화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학박사 학위 (논문 ·언어의 리듬이 영상에 미치는 영향)를 취득하게 된다. 또한 영화학회를 발족(1972)시켜 장기간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밖에 영화감독협회 회장(1954), 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장(1957)을 역임. 1988년 11월 10일 70세로 별세했다. 1921년생인 동생 김한일 역시 <여성의 적>(1956)으로 데뷔한 영화감독이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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