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Jang Seok-jun / 張錫俊 / 1935  ~  1980
대표분야
촬영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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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없어도 의리만은 (장석준, 1972)
지지하루의 흑태양 (장석준, 1971)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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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5년에 태어났다. 시인의 꿈을 꾸고 1953년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들어간다. 재학 시절 같은 대학 연극영화과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촬영감독 전조명과 친교를 나누며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많은 촬영을 하고, 또 현상 시설을 직접 마련하는 등 기술 쪽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대학 2년 시절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에서 단역 배우 겸 촬영감독 김영순의 조수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한다. 대학을 마치고 국방부 영화제작소에서 군 복무를 하며, 당시 정훈부 영화과의 대위였던 김수용, 대학 동기인 전조명과 만나 함께 영화 촬영을 공부하고 제대 후, 김수용 감독의 <구혼결사대>(1959)로 데뷔한다. 이후 <연애전선>(1960), <안개>(1967), <만선>(1967), <봄봄>(1969), <토지>(1974) 등 10여 편의 영화에서 김수용 감독과 함께 작업하고, <전쟁과 노인>(1962), <망부석>(1963), <십년세도>(1964), <몽녀>(1968) 등 10여 편의 영화에서 임권택 감독과 함께 작업한다. 그 가운데 <몽녀>는 하나의 카메라 바디 안에 두 개의 렌즈를 인간 양안의 시차만큼 떼어놓고 설치하여, 두 개의 필름 릴에 각각 보통 영화 사이즈의 반 사이즈로 촬영한 뒤, 나중에 현상하면서 다시 그 반 사이즈의 이미지를 다시 하나의 필름에 좌, 우를 나누어 인화하는 방식으로 만든 입체영화로, 하나의 촬영기, 영사기로 입체 영화가 가능했던 세계 최초의 방식으로 팬-스코프라고 불렸다(이는 1970년대 한국영화계에 유행했던 테크니스코프 촬영으로 활용된다). 1971년에 촬영한 <춘향전>은 한국 최초의 70mm 영화로 그 촬영을 위해 본인이 카메라 바디를 두드리고, 여러 부품들을 조립하여 만들었다. 이처럼 기술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촬영감독인 동시에, 1971~1972년에는 <지지하루의 흑태양>(1971), <없어도 의리만은>(1972) 등 두 편의 영화를 직접 감독하기도 한다, 1980년 간암으로 사망한다.

* 참고문헌
다큐멘터리 <한국영화기술의 개척자, 촬영감독 장석준>(구본진, 2003)

[작성: 황미요조]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5--사망. 서울 출신. 서라벌 에술대학 졸업.
그는 베타랑 촬영감독 출신이다. 유명 감독들과 촬영하며 영화사(史)에 남을 명작을 다수 남겼다. 그가 극영화 감독을 한 건 특별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1971년도 <지지하루의 흑태양>이란 작품으로 데뷔. 장동휘 박노식 출연. 독립자금을 위해 일본군 금괴 수송 차량을 습격한 독립군은 명수의 계획된 배신으로 습격 당한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혁과 용필은 복수를 다짐한다.
그는 촬영중인 틈틈히 촬영기재 개발에 힘써서 독자적으로 80미리 촬영기를 개조하여 <춘향> 영화를 80미리로 찍기도 했다. 그는 학구파 촬영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학에도 꽤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전조명 촬영 감독과는 서라벌예대에서 함께 수학한 사이다. 1980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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