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열
William w Jun / 全右烈 / 1940  ~ 
대표분야
감독
데뷔작품
내청춘 황혼에 지다 1967
활동년대
1960, 197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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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대비상망 (전우열, 1974)
그 얼굴에 햇살을 (전우열, 1973)
청춘 하이웨이 (전우열, 1973)
어머니 (전우열, 1972)
작별 (전우열, 1972)
황혼의 제3부두 (전우열, 1971)
목숨걸고 왔수다 (전우열, 1971)
이복 3형제 (전우열, 1971)
돌아온 항구의 사나이 (전우열, 1970)
너는 인정사정 보지마라 (전우열, 1970)

주요경력

1968년 <잊으려 해도> 신인 감독상 수상
1968년 <잊으려 해도>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 출품
1989년 재미 동부영화인협회 회장
1990년 제1회 뉴욕 남북영화제 집행부 부위원장
1990년 CINEMA EMPIRE 뉴욕소재 부사장
1992년 GALAXY FILM & VIDEO PRODUCTION 대표
1994년 OMNI MEDIUM 영화제작소 CHIEF CONSULTANT
1994년 미주 영화인협회 회장
경북고등학교 미동부 총동창회장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1959년 한형모 감독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영화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 수업을 하다 감독으로 데뷔.
주요 영화작품
내청춘 황혼에 지다(1966,정창화·전우열감독)
잊으려해도(1968)
조용히 살고 싶어(1969)
낮과 밤 (1968)
명동가시내(명동가시나)(1970)
상해의 방랑자 (1970)
이복 3형제(1971)
어머니(1972)
그 얼굴에 햇살을(1973)
그림자(1970) 등





애착작품 및 사유
<조용히 살고 싶어>, <이복삼형제>.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은 악의 수렁에 빠졌다가 다른 인간이 되고 싶어 부단한 노력을 한다는 점을 그린 영화라 애착이 간다.
영화속 명소
당시는 지금처럼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장소가 별로 없었는데 그중에는 <검은 베레 대작전>을 찍었던 북평 바닷가의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처음 시작부터 액션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수상내역(영화)
1968년 대종상 신인 감독상 (잊으려 해도)/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전우열은 1959년 한형모 감독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한형모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한국영상자료원). 그 후 한형모 감독의 문하생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이봉래, 박상호, 이강천 감독과 함께 일한 후 감독 데뷔 전까지 정창화 감독과 일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정창화 감독으로부터 연출력을 인정받아, <황혼의 검객>(1967)을 촬영하던 중 홍콩 쇼브라더스와의 전속계약으로 홍콩으로 떠나야할 상황이 되자 <황혼의 검객>(1967)의 나머지 촬영을 전우열에게 맡겼다(한국일보a).
전우열은 <내 청춘 황혼에 지다>(1967)로 데뷔하였고(한국일보b), <잊으려 해도>(1968)로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이 작품은 로카르노 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경향신문). 전우열은 청춘 액션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본인 또한 액션물에 애착을 가졌다. 특히 폭력배의 세계를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전우열은 1981년 미국 뉴욕 퀸스로 이민을 떠나(동아일보), 재미 동부 영화인 협회 회장, 미주 영화인 협회 회장, 경북고등학교 미동부 총동창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재미동포 영화인 친목과 단합을 위해 활발히 일하였다(한국영화감독사전). 그의 부인은 <대합실의 여인>(1971)로 데뷔한 배우 윤세희이다(동아일보).

* 참고문헌

한국영화감독사전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3784&keyword=전우열)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3784&keyword=전우열)
동아일보 1990년 10월 19일자 31면.
경향신문 1968년 6월 22일자 5면.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16> '황혼의 검객'(1967)과 트램펄린 효과”, 한국일보a, 2011/06/14.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106/h2011061402382091560.htm)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10> '콘티뉴어티' 가 있는 연출을 지향하다”, 한국일보b, 2011/05/02.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105/h2011050221101791560.htm)

[작성: 김성희]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40년생.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천. 경북고등학교와 성균관 대학 영문과를 나왔다. 현재 재미 동포의 신분이 된 그의 미국식 이름은 William w Jun
영화계에 입문을 하게 된건 한형모 감독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후 이봉래 박상호 이강천 감독을 거처 정창화 감독 밑에 정착을 했는데 <내 청춘 황혼에 지다>(1967년) 작품을 가지고 데뷔를 했다.
특히 정창화 감독이 제자 전우열을 인정 해 데뷔에 힘써 준 건 특기 할만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남다르게 빠른 데뷔를 할 수 있었다.
신성일 문희 주연의 처녀작 <내 청춘 황혼에 지다>(1967년) 영화는 6. 25 때 부모를 잃고 깡패로 자란 신성일이 두목의 손에 의해 크게 성장한다. 신성일은 문희라는 아름다운 피이니스트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문희에세 감화를 받고 깡패 세계에서 발을 빼려 하나 두목은 이를 저지하려고 끝내 임신한 몸의 문희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신성일은 두목을 살해하고 그 자신도 자살한다.
이 영화로 전우열은 무난한 데뷔를 하게 된다.<낮과 밤>(1968년) <잊으려 해도>(1968년) <그림자>(1970년) <조용히 살고싶어>(1972년) <너는 인정사정 보지 마라>(1970년) <상해의 방랑자>(1970년) <어머니>(1972년) <용서 ?S지 못할자>(1970년) <황혼의 제삼부두>(1971년) 등 41여편의 작품을 쉴새없이 만들었다.
청춘 액션물에 솜씨를 보이면서도 멜로에도 안정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고 특히 깡패 세계를 능숙한 연출로 보여줘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잊으려 해도>(1968년) 영화는 그에게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안겨주었고 르카르노 영화제 에 출품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윤정희 오영일 주연의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정희는 돈 많은 사장의 도움으로 대학을 마친다. 그리하여 학비를 마련해 준 사장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후 정희 앞에는 이상적인 남자 영일이 나타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열열히 사랑하게 된다. 어느날 과거 정희를 도와 준 일이 있는 사장이 나타나 방해하기 시작한다. 정희는 모든 과거를 영일에게 순순히 고백한다
그는 경상도 사나이답게 서글서글하고 체격도 운동 선수처럼 다부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1981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난 전우열은 <재미 동부 영화인 협회 회장> <미주 영화인 협회 회장> <경북고등학교 미동부 총 동창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재미 동포 영화인 친목과 단합을 위해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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