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순
Lee Kyeong-sun / 李敬淳 / 1921  ~  2008
대표분야
음향효과, 녹음
데뷔작품
악야(신상옥) 1952
활동년대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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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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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녹음 :
산불 (김수용, 1967)
빙점 (김수용, 1967) 녹음
서울아줌마 (장일호, 1967)
피아골 (이강천, 1955) 녹음

주요경력

1941년 일본 빅타 축음기 주식회사 경성영업소 라디오부
1947년 주한미국공보원녹음실
1951년 진해협동영화제작소 녹음 및 현상실
1954년 공보처 영화과녹음실
1958년 정릉녹음실, 수도영화 안양녹음실 설치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문화위원 위촉
1962년 한양녹음실
1969년 녹음실을 증축하여 한양스튜디오로 개칭 오늘에 이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기술분과위원장
1971년 서울신문사 우수영화심사위원
1984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해방전 RCA 빅터에서 음향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그 토키 기술 때문에 영화계와 관련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영화녹음 현장을 보게 되었고 영화 녹음에 매료되었다. 해방후 이미 영화녹음 기사로 활동하고 있던 최칠복씨를 통해 미502부대 녹음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미502부대는 영화기재 등을 관리하고 있었고 이땅의 영화기술진을 통해서 대한민국 공보처가 만들던 <대한뉴스>를 제작하고 있었다.
주요 영화작품
악야(1952,신상옥감독)
춘향전(1955,이규환감독)
꿈(1955,신상옥감독)
피아골(1955,이강천감독)
시집가는 날(1956,이병일감독)
백치 아다다(1956,이강천감독)
잃어버린 청춘(1957,유현목감독)
실락원의 별(1957,홍성기감독)
그대와 영원히(1958,유현목감독)
나 혼자만이(1958,한형모감독)
지옥화(1958,신상옥감독)
사랑하는 까닭에(1958,한형모감독)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전창근감독)
비극은 없다(1959,홍성기감독)
흙(1960,권영순감독)
이 생명 다하도록(1960,신상옥감독)
하녀(1960,김기영감독)
과부(1960,조긍하감독)
오발탄(1961,유현목감독)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신상옥감독)
상록수(1961,신상옥감독)
김약국집 딸들(1963,유현목감독)
하숙생(1966,정진우감독)
하얀 까마귀(1967,정진우감독)
산불(1967,김수용감독)
막차로 온 손님들(1967,유현목감독)
수학여행(1969,유현목감독)
분례기(1971,유현목감독)
무녀도(1972,최하원감독)
애착작품 및 사유
이기환<춘향전>, 윤봉춘<고향의 노래>, 이병일<시집가는 날>, 유현목<오발탄>,-유현목 감독은 어두운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기억이 난다. 김기영 <십대반영>, 이강천<피아골> - 지리산에 들어가 진짜 모두 빨치산처럼 괴물같이 장발에 씻지도 못하고 들짐승처럼 살며 촬영했다. 이 영화에서 김진규, 허장강, 이예춘씨가 데뷔했고 후에 심의 문제도 있었다.
영화속 명소
이기환<춘향전> 경기도 구리시 금곡에 있는 능인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상에서 옥중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현장에 나가지 않았는데 (녹음이니까) 그때 본 배우들의 열정에 감명받았고 그 장소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배우: 조미련(춘향), 이민(이도령) 석금성(월매) 전택이(방자)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감독과 많은 대화를 통해 작품의 내용과 느낌의 흐름을 파악 작품에 알맞는 소리를 찾으려 했다. 초창기엔 경제적인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타 국가들에 뒤지지 않고 영화제에서도 경쟁이 될 수 있도록 녹음의 질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였다. 오직 작품의 질적 향상과 완성도에 혼신을 다했다.
저술내역
『소리의 창조: 나의 영화녹음 오십년』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1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났다. 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5년 서울로 거처를 옮겨 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 실습연구생으로 들어갔다. 1937년에는 빅터사에서 본격적으로 현장연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경성전기학교(京城電氣學校) 야간부에 들어가 1941년에 졸업했다. 이 무렵 서울 약초극장(若草劇場)에서 RCA토키장치의 출장서비스를 담당하게 되었고, 빅터사에서 알게 된 최칠복을 따라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영화녹음 현장을 견학하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후 경성전기회사(京城電氣會社) 통신계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최칠복의 소개로 주한미군 502부대 녹음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이필우, 이명우, 김학성 등과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주한미국공보원과 함께 진해로 내려가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1951년 당시 국방부가 제작하던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의 녹음을 위한 시설 대여 요청을 미공보원이 거절한 데 충격을 받아서 퇴직하게 된다. 이때 조백봉, 김형근, 김봉수 등 함께 나온 동료들과 함께 목욕탕을 개조해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했다고 하며, 손전의 <내가 넘은 삼팔선>(1951), 신상옥의 <악야>(1952),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등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녹음을 담당했다.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홍성기의 <열애>(1955), <춘향전>(1961), 신상옥의 <지옥화>(1958),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등 중요한 작품들에 참여했으며, 1962년 한양녹음실, 1969년 (주)한양스튜디오로 개칭한 자신의 스튜디오를 통해 1990년대 후반까지도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이경순). 한국영화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2008년 5월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했다(연합뉴스).

* 참고문헌
연합뉴스 2008년 5월 22일자
이경순, 『소리의 창조: 나의 영화녹음 오십년』, 한진출판사, 1996.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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