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우
Lee Phil-woo / 李弼雨 / 1897  ~  1978
대표분야
촬영, 감독, 편집
데뷔작품
1920
활동년대
1920, 19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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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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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창덕궁 순종황제 묘의 (이필우, 1928)
홍련비련 (이필우, 1927)
멍텅구리 (이필우, 1926)
한강대홍수(을축년수해) (이필우, 1925)

주요경력

1913년 우미관 영사기사 조수
1916년 일본 오사카 제국키네마 고사카 촬영소에서 촬영과 현상 기술 습득
1920년 문예단의 이기세와 만나 연쇄활동사진극 <지기>를 촬영
1924년 단성사 촬영부 전속기사
1925년 고려영화사 창립
1926년 반도키네마 창립
1927년 극동키네마 창립
1933년 7월 PKR 발성장치 개발 성공
1964년 한국영화인협회 부산지회 초대회장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서울이 본적이며 어렸을 때 나의 집은 을지로의 네거리의 있었다. 거기에다가 시계포 차려놓은 나의 부친은 거기에서 말안장이며 엽총 시계등을 팔았다. 이때는 우리나라가 개화기의 조류가 휩쓸려 들어왔을때다. 이 무렵 나의 부친은 가게 이름을 이필우 시계라고 달아주었는데 나와 다섯 살 아래 동생인 이명우의 삼촌이 집의 일을 돌보아 주었으나 돈을 벌기는 커녕 바람기가 있어서 재산을 거의 탕진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에 나의 가게에 시계를 대주던 일인 오리이가 나의 모친으로부터 경영을 부탁받고 가게 한쪽에 오리이 사진부를 차렸다. 말안장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집어치우고 약2년동안 시계, 축음기, 그리고 사진부로 바뀌게 되었다. 12~13세때 나의 동생이 이명우와 함께 가게에 있는 현상기와 활동사진기를 만지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특히 프로젝터를 만지면서 활동사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원각사의 영상기사를 통해 영상기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성소학교를 졸업해고난 뒤 우미관의 영상기사가 되었고 그 뒤 다시 촬영쪽에 욕심을 내게 되었다.
주요 영화작품
지기(1920,이기세) 촬영, 편집
장한몽(1920,이기세) 촬영,편집,현상
장화홍련전(1924,김영환) 촬영,편집
한강대홍수(1925,이필우)
쌍옥루(1925,이구영) 제작 기획
멍텅구리(1926,이필우)
홍련비련(1927,이필우)
흑과 백(1927,김윤택) 촬영
낙원을 찾는 무리들(1927,황운) 촬영,편집
낙양의 길(1927,천한수) 촬영,편집
창덕궁 순종황제 묘의(1928,이필우)
혈마(1928,홍개명) 촬영,현상
종소리(1929,김상진) 촬영,편집,현상
홍길동전(1934,김소봉) 촬영,편집
전과자(1934,김소봉) 촬영,현상
대도전(1935,김소봉) 촬영,편집,현상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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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촬영감독]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 촬영감독 계보 1934년 조선일보에 실린 박완식의 글을 보면 영화는 “기술의 종합과 기술가의 조직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며 “생산의 거대한 자본성으로 인한 기업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이는 동인제로 영화가 제작되던 무성영화... by.배수경(영화사연구소 객원연구원) 2011-05-04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이필우는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로 영화기술의 개척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소학교를 졸업했다. 1913년 우미관에 들어가 영사기사 일을 배우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촬영과 현상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활동사진 연쇄극 <지기>(1920), <장한몽>(1920)을 촬영하였다. 1924년에 단성사 촬영부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은 각본부터 촬영까지 조선인이 만든 영화로, 이필우가 촬영을 맡았다(대중예술인사전). <장화홍련전>으로 명성을 얻은 이필우는 박정현, 이봉익, 이구영, 정암과 함께 고려영화제작소를 만들고 첫 영화 <쌍옥루>(1925)의 촬영을 맡았다(조선일보a). <쌍옥루>이후 이필우는 반도키네마를 만들어 조선일보의 연재만화 <멍텅구리>(1926)를 영화화 하였다. 이필우는 이 작품의 감독과 촬영을 맡았다.(조선일보b).
1930년경, 미국의 발성영화를 접한 후 발성기술을 연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1933년 조선에 돌아와 경성촬영소에 들어갔다. 경성촬영소는 이필우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를 기획하였다(대중예술인사전). 그 결과가 동생인 이명우가 감독 및 촬영하고 이필우가 녹음한 발성영화 <춘향전>이었다(동아일보). 이후 대규모 스튜디오가 주도하는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영화제작 시스템의 도입, 일본에서 기술을 수련한 신진세력들의 등장으로 기술분야의 주도권을 잃게 되면서 영화계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한다(대중예술인사전). 이밖에 그의 촬영작으로 <흑과 백>(1927), <종소리>(1929), <전과자>(1934), <대도전(大盜傳)>(1935) 등이 있다(김종원).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5년 8월 24일 조간3면.
조선일보b 1926년 1월 2일 조간3면.
동아일보 1935년 9월 1일 석간3면.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897년 11월 27일 서울 중구 을지로 출생. 보성 소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가서 동경금성중학교 졸업. 1920년 활동사진 연쇄극 <지기>,<장한몽>(이기세 연출)등을 찍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가 된다. 이후 한국인이 제작(단성사 촬영부)하고 각본을 쓰고 감독하고 출연한 최초의 순수한국영화 <장화홍련전>(1924)의 촬영 등 기술을 맡아 완성. 전례드문 성황을 이루었다. 권번 기생을 출연시켜 화제를 모은 <낙양의 길>(1927),검열로 상처 투성이가 된 <낙원을 찾는 무리들>(1927),제목에서부터 수난을 겪은 <혈마>(1928)등 순탄치 않은 시련의 연속에서도 촬영작품을 내놓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평론가로서 뒷날 <낙화유수>를 감독하기도 한 이구영과 손을 잡고 고려영화사를 창립. 매일 5컷으로 구성된 조선일보의 연재만화를 영화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희극 <멍텅구리>(19260주연 이원규,김소진)에서 그는 제작 각색 감독 촬영 편집 현상에 이르기까지 1인 6역을 소화한다. 당대에 이름을 떨치던 명월관 기생 강명화의 사랑과 죽음을 그린 <홍련비련>(1927-주연 복혜숙,이규설)도 그가 각본을 쓰고 촬영,감독한 작품이다. 1964년 한국영화인협회 부산지회를 창설, 초대회장을 지냈으며,1978년 10월 20일 8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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