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남
Go Yeong-nam / 高榮男 / 1935  ~  2003
본명
진석모 (Jin Seok-mo)
대표분야
감독, 편집, 제작/기획, 시나리오
데뷔작품
잃어버린 태양 1964
활동년대
1960, 1970, 1980, 199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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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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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그림일기 (고영남, 2000)
봉성부인 (진석모, 1992)
나의 아내를 슬프게 하는 것들 (고영남, 1991)
금병풍월 (진석모,유국웅, 1990)
코리안 커넥션 (고영남, 1990)
매춘 2 (고영남, 1989)
제2의 성 (고영남, 1988)
위험한 향기 (고영남, 1988)
미리 마리 우리 두리 (고영남, 1988)
화려한 변신 (고영남, 1987)

주요경력

1980년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1988년 영화진흥공사 자문위원

1993년 아트시네마 대표이사

1995년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2001년 아시아디지털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대부분 예능인들이 그렇듯 하루아침에 영화감독이 되거나 유명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고영남 감독도 하루아침에 모든것을 얻은 사람은 아니었다. 가장 어렸웠던 전후시대를 겪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이념들을 정립하며 선천적 자질고 예술에 대한 집념을 갖고 맨손으로 연극계에 뛰어들면서 고영남 감독의 영화로의 길은 시작되었다. 영화제작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나 단체는 그시절(1950년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어떻게 영화를 찍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영화를 제작한다는 일 자체가 무리였던 시절이었다. 고영남 감독은 그당시 "故이광래감독"밑에서 연출보조를 맡고 있으며 "신협"의 연구생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영남감독의 선배였던 "김상호"(그당시 영화사 제작주임겸 무대감독)씨의 권유로 영화사의 제작국에서 영화에 관한 일들이 도우며 영화에 관한 지식을 쌓아갔고 '故조긍하감독"의 권유로 '육체의 길'이라는 영화에서 '故조긍하감독'의 지도아래 연출보조를 하며 연극과 영화의 접목이라는 막연하지만 인간을 표현하는 방봅에 대한 개념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故권영순감독'의 작품'흙'
주요 영화작품
"잃어버린 태양"
"명동44번지"
"잃은자와찾은자"
"소령 강재구"
"설국"
"소나기"
"빙점"
"외인들"
"비목"
"코리안 커넥션"
66년 국내 최초 뮤지컬 제작(홍콩 합작) 사랑은 파도를 타고 (이두영 작가)
애착작품 및 사유
1970년대 황순원씨의 원작을 영화화 한 '소나기'가 고영남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고감독은 그 작품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하자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스크린에 옮기려 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동심을 완벽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감독은 휴머니즘으 기본에 충실하려 하였고 그 결과 가장 애착이가는 작품으로 고감독의 가슴에 남아있다. '소나기'는 그당시 "백림영화제'에도 출품되었다.
영화속 명소
107편의 영화를 찍었다고 하면 그 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촬영장소역시 안가 본곳이 없을만큼 많은 명소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고감독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소는 바로 '소나기'에서 그 배경이 되었던 충북영동지방 구례근처의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금강줄기의 한자락을 차지하는 마을이라 한다. 정확한 지명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고곳은 언제 보아도 고향을 연상케 언제나 마음편히 쉴 수있는 안락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국난을 겪은 이푸의 우리나라에서 예술과 영화에 눈을 돌리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화를 감독하는 이들이 겪어야 하는 가장 쓰라린 기억이 아닐수 없으며 자신의 작품이 그저 존재한다는 것으로도 감독은 행복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영남 감독이 1964년에 제작한 '명동44번지'라는 작품은 그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한극액션영화의 변화를 시도했으며 그 시도는 그당시 600만이 채 안되는 서울인구중에 20만여명이 관람을 했을정도로 공존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그 이후에도 스케일이 큰 '결사대작전', '독수리 전선', '공수특공대작전'과 같은 전쟁영화와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1970년대 초에 일본영화계를 견학한 고감독은 영화의 작품성에 대한 커다란 자각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 결과 70년대 걸쳐서 인간을 그리는 휴머니즘과 진정한 의미의 인간 성형성에 대한 참된작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또한 1980년대 이후 관객이 좋아할 수 있는 작품성있는 영화라는 개념을 도입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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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고영남은 충청북도 충주 수안보 출신으로 고교시절 배구선수로 활동했다. 홍익대학교 국문과 재학 중 이광래 교수로부터 희곡론, 연출론 등을 배웠고(한겨레), 대학 재학 중 명동에서 활동했던 극단 '신협'의 연구원으로 입단하였다. 충무로에서 제작부로 일하던 선배의 제의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그는 <육체의 길>(1959)에서 연출부로 일을 시작했다.
이광래, 조긍하, 권영순, 김기덕 감독의 연출부를 하다가 당시 서울극장 대표이자 전국극장연합회 회장이던 곽정환의 제의로 <잃어버린 태양>(1964)의 연출을 맡아 감독데뷔를 했다. <잃어버린 태양>(1964), <명동 44번지>(1965), <소령 강재구>(1966) 등이 연속으로 흥행하면서 고영남은 흥행감독으로 충무로에서 각광받았다. 그는 액션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었고 <결사대작전>(1969), <독수리전선>(1976), <공수특공대작전>(1977) 등과 같은 전쟁영화도 다수 연출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주로 연출했다.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1977)을 영화화했고, 황순원 원작의 <소나기>(1978)를 연출했다. 2000년 <그림일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2001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아시아디지털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2003년 폐암으로 별세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한국영상자료원).

* 참고문헌
한겨레
(http://hanimovie.cine21.com/Movie/person_view.php?person_id=615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한국영화감독사전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1305&keyword=고영남)

* 1996년 예총 제정 예술문화공로상 (영화부문), 사망일-네이버 인물검색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은 진석모(陳錫模). 1935년 2월 22일 충청북도 충주시 출생. 그는 홍익대 국문과 재학중 극단 '신협'의 연구원으로 입단하여 문화계에 첫 발을 들여놓았따. 풍부한 젊음의 감성과 열정으로 희곡론, 연출론 등을 깨우친 그는 당시 연극의 메카 명동에 입성하여 까다롭기로 유명한 극단 '신협'에 입단하게 되는데 이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연극에 깊이 천착하기도 전에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명동과 인접해 있던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서 제작부로 일하던 선배가 찾아와 영화작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해 온 것. 그는 호기심에 기꺼이 응했다. 그때 제작되고 있던 영화는 외국 소설을 번안한 멜로드라마 <육체의 길>이었다. 그는 이 영화의 연출부로 일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 후 1964년 당시 서울극장 대표이자 전국극장연합회 회장이던 곽정환 씨가 제작을 한 <잃어버린 태양>의 연출을 맡으면서 감독으로 정식 데뷔했다. 당시 <주유천하>라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곽사장은 현재의 위치와 성공을 예고라도 하듯 놀라운 추진력으로 충무로를 종횡무진했다. 이무렵 곽사장은 그에게 대뜸 영화 <잃어버린 태앙>의 연출을 의뢰한 것이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온 정열을 쏟아 자신의 데뷔작을 연출했다. 데뷔작의 흥행성공에 힘입어 그는 <명동 4번지>,<소령 강재구>등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들 역시 연속 히트를 치면서 그는 액션물과 멜로물 장르의 대표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충무로의 모든 제작자들은 그를 연호했고, 그에게 앞다투어 메가폰을 맡겼다. 그는 마치 급류에 휩쓸리듯 겉잡을 수 없이 거품인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몰되어갔던 것이다. 그가 연출한 108편이라는 엄청난 편수는 대부분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행군은 곧 창의력의 고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개가 태작이라는 자괴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1977년 그는 심기일전하여 새 작품에 몰두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의 대표작이 된 <설국>의 탄생이었다. 그의 연출력의 절정은 또 다른 대표작인 황순원 원작의 <소나기>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이 영화는 걸작 단편의 후광을 뛰어넘어 한국적 영상미학을 서정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그는 <꽃신>,<빙점81>,<외인들>,<영원한 관계>,<코리아 커넥션>등 종전과는 다른 장르들을 섭렵해 나갔다. 그는 2000년 <그림일기>를 마지막으로 연출 활동을 마감했다. 그는 2001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아시아디지털대학' 연극영화과 교수를 맡아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신작 <향수>의 시나리오 작업을 할만큼 정열적인 영화인이었다. 그는 1980년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을 맡은 이래로 1988년 영화진흥공사 자문위원, 1993년 아트시네마 대표이사, 1995년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을 역임했다. 2003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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