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인호
Sohn In-ho / 孫仁鎬 / 1927  ~ 
본명
손효찬 (Son Hyo-chan)
대표분야
녹음
데뷔작품
이 생명 다하도록 1960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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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관광열차 (김귀섭, 1967) 가수
음악 :
새싹 (조홍장, 1963)

주요경력

어린 시절 수풍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긴 뒤 중국 장춘으로 이주
1944년 장춘실무고등학교 졸업
1946년 평양에서 열린 관서콩쿠르대회에서 1등 수상 후 청운의 꿈을 안고 월남
KPK 악단에서 가수 생활
1953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후 공보처 영화과 녹음실 근무
1957년 공보처에서 <산적의 딸>을 단독으로 녹음 작업
1960년 <이 생명 다하도록>으로 정식 녹음기사 데뷔
1961년 한양녹음실 근무
1964년 작곡가 박시춘에게 노래 "나는 울었네", "숨쉬는 거리"를 받아 취입하여 히트
1982년 제20회 영화의날 공로상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6.25동란전 KPK악단에서 근무하다. 군입대, 제대후 매부이신 이경순씨의 권유로 영화쪽일 하게 되었고,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입사근무하였다. 이경순씨는 이미 영화계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의 영화계 선배이라고도 할 수있다.
주요 영화작품
모녀(1958,최 훈감독)
동심초(1959,신상옥감독)
로맨스빠빠(1960,신상옥감독)
삼등과장(1961,이봉래감독)
단종애사(1963,이규웅감독)
빨간 마후라(1964,신상옥감독)
신화를 남긴 해병(1965,설 봉감독)
전쟁과 여교사(1966,임권택감독)
단발머리(1967,김수동감독)
슬픔은 파도를 넘어(1968,김효천감독)
독짓는 늙은이(1969,최하원감독)
원산공작(1976,설태호감독)
배우수업(1978,이형표감독)
상처(1978,김 긱감독)
청춘의 덫(1979,김 기감독)
최후의 증인(1980,이두용감독)
만추(1981,김수용감독)
겨울사냥(1982,김 기감독)
불새의 늪(1983,고응호감독)
상한 갈대(1984,유현목감독)
춤추는 딸(1986,노세한감독)
나신들(1988,나영균감독)
내사랑 동키호테(1989,석래명감독)
어둠의 딸(1990,전태식감독)
검은 모자(1992,이혁수감독)
복카치오 `93(1993,김기영감독)
도둑과 시인(1995,진유영감독)
러브스토리(1996,배창호감독)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6,오일환감독)
크레이지댄스(1997,박한순감독)
애착작품 및 사유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소리의 원근감도 살리고 혼혈을 기울여 정식으로 최선을 다 했던 작품이다. 당시에는 보기힘든 일로, 녹음만 무려 보름정도 걸렸던작품으로 등장인물도 많았고 많은 효과음들이 있어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족보>(임권택) 이작품 역시 최선을 다했던 작품으로 시사회때 임권택감독이 매우 만적해 했던 작품이다. 최선을 다하면 항상 즐거운 것 같다.
영화속 명소
<연산군>(이혁수) 온양근처의 고가가 있던 곳으로 첫 동시녹음을 나갔던 곳이다. 당시 국내에선 처음 동시녹음을 시도하는 것이있을꺼다. 그곳에서허리를 다쳐 난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되었고 다시는 동시녹음를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작품도 결국 후시녹음을 하게 되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작품경향및추구하는스타일 예전에 언제나 후시 녹음이었다. 그러다 동시녹음을 알게 되면서 동시녹음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난 허리를 다쳐 동시녹음을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시녹음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현장성을 중시, 생생한 소리들을 위해 직접 현장으로 소리 채집을 나가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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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났다. 창성보통학교 6학년 시절, 수풍댐으로 마을이 수몰되게 되자, 가족 모두 만주 장춘으로 이주해 생활하다, 광복 후 신의주로 돌아온다. 평양에서 열렸던 ‘관서 콩쿠르대회’에서 ‘집 없는 천사’를 불러 1등을 하는데, 이 때 심사위원 중 한명이 소질을 살리려면 이남에 가라는 권유를 받고서 형과 함께 서울에 내려온다. 작곡가 김해송이 이끌던 KPK 악단에 가수로 뽑혀 활동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제대 후 문화공보부 국립영화제작처에서 일하며 ‘대한뉴스’ 녹음과 영화 녹음을 시작한다. 이즈음 영화 녹음일을 하던 매부 이경순과 함께 ‘한양녹음실’을 세운다. 이경순과 함께 영화 녹음을 위해 녹음기를 들고서 방방곡곡을 누비며 한국영화의 사운드 라이브러리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내고, 천둥 소리, 빗소리, 총소리 등 음향 효과를 스튜디오에서 개발하는 등 한국 영화 음향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양녹음실은 1961년대 개장하여 1990년대까지 대략 3500편의 한국 영화 녹음을 작업하였고, 그 가운데 2000편 가량이 손인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유명 가수이기도 한데, 녹음 작업 틈틈이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서 한 달에 몇 곡씩의 의무 녹음 곡수를 채우며 ‘비 내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하룻밤 풋사랑’ 등 1950~60년대 히트곡들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방송은커녕 무대에도 나선 적이 없어 아내조차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이 가수인 줄 알았다고 전해진다. (서울신문 a,b)

* 참고문헌
서울신문a 2006년 4월 27일
서울신문b 2006년 5월 4일

[작성: 황미요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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