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선
Kang Dae-sun / 姜大宣 / 1934  ~  2023
대표분야
제작/기획, 감독
데뷔작품
여고생의 첫사랑
활동년대
1960, 1970, 1980, 199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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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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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은빛 립스틱 (강대선,유가창, 1989)
동녀 (강대선, 1987)
요색유희 (강대선, 1985)
날마다 허물벗는 꽃뱀 (강대선, 1982)
흑녀 (강대선, 1982)
야간학교 (강대선, 1976)
바보 용칠이 (강대선, 1975)
5천리 대도망 (강대선,유가창, 1974)
천마신검 (강대선, 1974)
나이도 어린데 (강대선,유가창, 1974)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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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 1980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시나리오 사전 심의와 필름 검열 등 영화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영화인협회(현 영화인총연합회)내 몇몇 영화감독들이 주축이 되어 당시 선진국 수준의 영화예술 창작의 자유 보장을 위하여 "영화법 개정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는 검열폐지, 제작 및 표현의 자유를 골자로 한 영화법 개정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국회에 소원을 하였으며,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부의 눈에 벗어나 물리적 폭력을 당하기도 하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행히 본 법을 1986년을 개정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당시 강대선 감독이 영화법 개정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주요경력

1950년대 초 「영화세계」 기자 활동
1950년대 후반 비판신문, 국제신보 문화부 기자 활동
1950년대 후반 유한영화사 창립
1960년대 초 신필림 입사. 기획실장, 연기, 섭외부장 활동
1969년 형 강대창, 강대진과 함께 삼영필름 창립(1986년 각자 독립)
1979년 감독분과위원회 위원장
1983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1986년 양전영화사 설립(1992년 해체)
1987년 영화업자협회 회장
1988년 한국영화업협동조합 이사장
1988~1993년 아태영화제 한국대표 단장
1990년 뉴욕남북영화제 남측 단장
2004년 의정부극장사장
한국영화 감독위원회 위원장역임
영화인협회 이사장
한국영화제작자협동조합 이사장 2대 연임
국제영화제작자연맹 한국대표 5년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언론인 출신「영화세계」잡지의 편집부장으로 재직중 신상옥 감독과 인연이 신필름 창립. 신상옥, 최은희, 황남씨등과 함께 신필름을 창설하여 기획, 연기, 섭외실장을 맡게 됨. 현재의 삼영필름 전신인 유한영화사를 형님과 함께 경영하다가 영화연출을 시작.
주요 영화작품
여고생의 첫사랑(1971,강대선)
나에게 조건은 없다(1971,강대선)
여고시절(1972,강대선)
판사부인(1972,강대선)
용구와 용팔이(1973,강대선)
지나간 여고시절(1973,강대선)
빗방울(1973,강대선)
천마신검(1974,강대선)
5천리 대도망(1974,강대선)
바보 용칠이(1975,강대선)
야간학교(1976.강대선)
날마다 허물벗는 꽃뱀(1982,강대선)
흑녀(1982,강대선)
요색유희(1985,강대선)
동녀(1987,강대선)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피고(1987, 김정옥)-제작
은빛 립스틱(1989,강대선)
애착작품 및 사유
<여고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적인 하이틴 영화. 이후부터 본격적인 하이틴 영화가 발아하게 되었음. (작품, 흥행 양면) 문여송, 석래명, 김웅천 감독들이 주로 다루었던 하이틴 영화의 서막을 열음. 국내영화의 일반적 경향인 스타에 집착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과감하게 신인들을 기용하여 배우란 감독과 작품에 의해 좌우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
영화속 명소
<여고시절>의 화진포, 권금성 정상. (주인공의 첫 만남과 사랑이 싹트는 계기의 형성.)
<바보 용칠이>를 촬영하면서 안동 하회면을 방문하여 하회탈을 씌워 출연시킴.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하이틴 영화. 젊은 청소년들의 사춘기 변화기의 사고와 행동에 관심이 깊었음.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강대선은 대학시절 사촌누나 강인순(姜仁淳)이 사장으로 있던 영화잡지「영화세계」의 기자로 영화계에 입문했다(동아일보). 이후 비판신문, 국제신보의 문화부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60년대 초, 전성기를 누리던 신필름에 입사해 기획실장, 연기 및 섭외부장을 했다.
이후 형인 강대창, 강대진과 함께 삼영필름을 창립해 영화연출을 시작했다. 감독 데뷔작은 <여고생의 첫사랑>(1971)이었다. 강대선은 연출 초기 과감하게 신인배우를 주연으로 기용하였으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해 고전을 겪었다. 그러나 신인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여고시절>(1972)이 여고생 관객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흥행에 성공하여 흥행감독으로 자리매김을 하였으며, 이 작품의 흥행 이후 하이틴영화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한국영화를 말한다).
1974년에는 대만과의 합작영화 <5천리 대도망>(1974), <나이도 어린데>(1974)를 연출, 제작했했는데, <5천리 대도망>은 합작영화 사상 처음으로 대만의 국영영화사인 중앙전영(中央電影)과 함께 만든 영화로 동남아와 유럽, 미국 등지에 50만 달러에 수출되었다(매일경제). 1990년에는 남북한 영화교류를 추진하여 분단 이후 처음 남북 영화가 한자리에서 상영되는 뉴욕남북영화제를 개최시켰다(한국영화를 말한다).

* 참고문헌

한국영화사연구소, 『한국영화사 구술총서01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편, 이채, 2004, 10~27쪽.
동아일보 1958년 12월 23일자 3면.
매일경제 1974년 5월 24일자 8면.

* 기본정보, 주요경력-한국영화를 말한다, KMDB참조
* 한국영화감독사전에는 감독 데뷔작이 <소녀의 첫사랑>(1971)으로 되어있으나 <여고생의 첫사랑>(1971)의 다른 제명이거나 오기로 판단됨. 뉴스검색에도 <여고생의 첫사랑>으로 나옴.
* 1988년 한국영화업협동조합 이사장-경향신문 1988년 3월 11일자 13면.
* 1983년 영화인협회 이사장-경향신문 1983년 7월 13일자 3면.
* 1979년 감독분과위원회 위원장-경향신문 1979년 1월 26일자 5면.
* 1987년 영화업자협회 회장-경향신문 1987년 12월 26일자 3면.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4년 12월 28일 출생. 성균관대 문리대를 중퇴했으며, 잡지「영화세계」의 편집부장으로 있을 때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으로 신필름 창립에 관여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 신필름에서 그의 역할은 기획, 연기, 섭외실장이었다. 이후 그는 삼영필름 전신인 유한영화사를 형님과 함께 경영하다가 영화연출을 시작했다.
감독 데뷔작은 <여고생의 첫사랑>(1971)이었다. 가정환경이 복잡한 한 청년이 청순한 아가씨를 통해 자신의 탈선을 고치려하지만 실패한다는 내용의 청춘물로서, 김희라, 김순복 주연이었다. 같은 해, 출생의 비밀을 다룬 멜로드라마 <나에게 조건은 없다>(1971)를 연출한 후 1972년에 강대선 감독은 <여고시절>(1972)을 감독했다. 여름방학에 시골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신인을 과감히 기용한 감독의 전략이 맞아떨어져 흥행적으로 성공한 영화였으며, 이후 일어날 하이틴 영화를 예측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이듬해 속편인 <지나간 여고시절>(1973)을 연출했고, 학교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야간학교>(1976)도 연출했다.
이후 감대선 감독은 계몽 영화 <판사부인>(1972), 코미디 <용구와 용팔이>(1973), 멜로드라마 <빗방울>(1973), 괴기 영화 <천마신검>(1974), 반공 영화<5천리 대도망>(1974), 멜로드라마 <바보 용칠이>(1975) 등의 영화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오갔다. 특별나게 흥행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없었으나 왕성한 창작욕으로 꾸준히 영화를 감독하던 강대선 감독은 1980년대에는 에로적 경향의 영화를 감독했다.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1982), <흑녀>(1982), <요색유희>(1985), <동녀>(1987), <은빛 립스틱>(1989) 등의 영화가 1980년대에 연출한 영화이다.
감대선 감독은 연출 이외 다른 일도 했다. <무진 흐린뒤 안개>(임필형, 1986), <늪속에 불안개는 잠들지 않는다>(신우철, 1992) 등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김사겸, 1971)을 각본, 기획했다. 1991년 10월, 남북영화제 한국대표단장을, 1988년에서 1993년까지 아태영화제 한국대표단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영화 감독위원회 위원장, 영화인협회 이사장, 한국영화제작업 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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