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앵란
Um Aing-ran / 嚴鶯蘭 / 1936  ~ 
본명
엄인기 (Um In-gi)
대표분야
배우, 제작/기획
데뷔작품
단종애사(전창근감독) 1957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90, 2000, 2010
DB 수정요청

필모그래피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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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노라노 (김성희, 2013)
이해윤 은막의 스타,그 날개를 달다 (나윤희, 2001) 인터뷰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영화감독 이형표 (이성수, 1999) 인터뷰
(이영우, 1976) 김여사
증언 (임권택, 1973) 여류시인
시거든 떫지나 말지 (김기덕, 1973) 술예
떡국 (주동진, 1971) 홍숙(장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신성일, 1971) 이남의 처
천하일색 말괄량이 (박준영, 1970) 강숙(흥신소소장)
결혼교실 (정인엽, 1970) 미스엄(시골처녀)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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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2001년 한국복지재단 미아찾기 홍보대사
2004년~ 닥스클럽 대표 컨설턴트
2009년 7월 영양군 홍보대사
2010년 6월 김치 홍보대사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연극인이셨던 어머님 노재신씨의 친구분이셨던 전창근 감독께서 영화를 준비하시던 중 제가 감독님의 눈에 띄어 처음 데뷔하게 되었다. 당시 아역배우가 부족했던 터라 19살의 나이에 단종의 어린 왕비역에 발탁되어서 시작하게 되었다.
주요기타작품
■ 연극
엄앵란(여우)-단종애사
청실홍실-라디오연속극 최초 영화화
심정-일명:나는 이래서 남매를 잃었다
1966년 흑맥 (기획)

■ TV
HBS 세여자(토크쇼)
KBS 엄앵란 사랑방 토크쇼
엄앵란,강남길의 행복만들기(라디오)
아침마당 부부탐구
나의사랑 나의 가족
SBS 아이러브아이
SBS 행진(시트콤)
애착작품 및 사유
맨발의 청춘: 연기면에서나 스토리면에 참 좋았고 , 연기자로써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 때문에.
떠날때는 말없이: 슬픔이 묻어 있는 작품으로써 , 신성일-엄앵란의 주연영화로써 연기가 무르익었을때의 작품이라서.
말띠 여대생: 연기자로써 전성기를 누리던 때의 작품이고, 청룡상 인기상을 탐으로써 인정을 받은 작품이라서.
하고싶은 말
영화로 출세를 해서 이것을 기초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같다. 경제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허락이 된다면 받았던 영광을 후배들에게 돌리고 싶다.아직 구체적으로 실행된 것은 없지만 기회가 닿은다면 후배양성에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
영화계에 바라는 점-요즘 한국영화가 흥행에도 성공하고 해서 영화계가 윤택해진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몇몇의 소수의 사람으로 (배우나 감독등등)운영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몇몇의 얼굴이 계속 반복적으로 활동하기보다는 다같이 - 즉, 두터운 층이 되어서-잘되는 방향으로 됐으면 좋겠다. 다같이, 여럿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됐으면 좋겠다.
영화속 명소
'동백아가씨'에서의 부산 다대포-ALL로케로 이곳에서 모두 촬영했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라서 기억에 남는다.
'배신'의 강원도의 팔당호수-모터보트가 달리는 씬을 찍었던 곳으로써, 프로포즈를 받은 곳이라서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지금까지의 연기 스타일: 시대극도 거의 없었고 , 댄서나 부인과 같은 여러 역할도 하질 않았었다. 그때의 확고부동한 이미지는 오로지 '발랄한 여대생'이미지 뿐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미지만을 보여줬다.
앞으로 하고 싶은 배역: 노후의 역작을 남기고 싶다. 나의 생각과 모든 것을 투자해서 마음으로 하는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다.
자기소개 및 취미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영화배우 신성일과 결혼하여 2녀 1남을 두었다. 활동하던 당시엔 너무 바빠서 취미 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다. 일에 대한 정열로 활동하던 때였고 , 청춘의 시간을 긴장감으로 보냈다.
특기: 골프
저술내역
1961년 사색의 구름다리 (시집)
1995년 뜨거운 가슴에 좌절이란 없다 (수필집)
1997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수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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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56년 <단종애사>에서 어린 왕비 역을 맡아 영화계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 때가 숙명여대 가정학과 1학년 재학 당시로 덕분에 학사 여배우 1호라는 칭호를 얻었다. 활동 초기, 당시 중견 배우였던 어머니 노재신이 '에이전트' 역할을 하며 연예계 진출과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그러한 활동 덕에 당시 영화계에서 감독 부문에서는 유현목과 함께, 배우 부문에서의 새로운 '호프'로 불리기도 한다(한국일보).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1963년 <청춘교실>의 커다란 성공이 그 발판이 되며, 특히 신성일과의 공연은 이후 배우, 개인의 삶 모두에 있어 커다란 이정표가 된다. 1963년 일본 소설인 <저놈과 나>를 영화화한 <청춘교실>(서울신문)의 커다란 성공은 이후 몇 년간의 청춘 영화의 붐과 청춘 스타로서의 엄앵란, 신성일 콤비의 인기를 예고했으며, 그 인기는 이듬 해 무려 15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맨발의 청춘>(1964)에서 폭발한다. 엄앵란, 신성일 커플은 1963년부터 2년 남짓하는 기간 동안 무려 30여 편의 청춘 영화에서 공연하였고, 이 시기 제작된 청춘 영화는 50여 편에 이른다(신아일보). 청춘 영화와 청춘 스타에 대한 인기의 절정기인 1964년 말, 엄앵란, 신성일 콤비는 실제 결혼하기에 이르며, 이후 한국영화의 중심은 청춘 영화에서 액션 영화로 넘어가게 된다(신아일보). 1968년작 <아네모네 마담> 이후에도 몇 편의 영화 출연작이 있기는 하나, 이 영화는 청춘 스타 이미지를 굳히게 해 준 <청춘교실>을 그 개관작으로 상영했던 아카데미 극장의 폐관작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라 할 것이다. 이후, 남편 신성일의 국회의원 낙선 이후, 대구에서 비빔밥 식당을 하는 등 사업에 몰두했고, 2004년 이후 부터는 결혼정보회사의 대표 컨설턴트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있다. 연예계 활동은 1990년대 초중반 이후, 공중파 TV에서의 패널, 사회자와 라디오 DJ 등으로 복귀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참고문헌
한국일보 1958년 1월 1일 11면
서울신문 1963년 12월 7일, 5면
신아일보 1965년 10월 12일, 5면

[작성: 황미요조]
출처 : 여성영화인사전
엄앵란 嚴鶯蘭

-배우, 기획, 방송인. 1936년 3월 20일 서울 출생. 본명 엄인기(嚴仁基). 숙명여대 가정과 졸업.

깜찍한 햅번 스타일로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결코 바래지 않을 영원한 젊음까지 약속했던 엄앵란은 신성일과 함께 청춘영화의 상징으로 한국영화사에 기록될 것이다. 63년 청춘영화 <가정교사>(김기덕)와 <청춘교실>(김수용)의 히트 이후 이른바 신-엄 콤비 스타가 탄생했다. 그후 <맨발의 청춘>(64, 김기덕) <동백아가씨>(64, 김기) <배신>(64, 정진우) <떠날때는 말없이>(64, 김기덕)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청춘영화들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은 상류층 또는 하층민 역을 서로 바꿔가며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대부분의 시간을 두려움 모르는 유희정신으로 버티었던 두 청춘스타는 좌절하거나 운좋으면 탈주에 성공할 불온한 욕망과 반항으로 60년대를 수놓곤 했다.
비록 “우울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응시하고 있다가도 금방 기분을 전환하여 웃기 시작하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천진난만함을 가진” 청춘스타 엄앵란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긴 했지만 그녀가 늘 청춘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것은 아니다. <동심초>(59, 신상옥)에서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어머니의 앞길을 막지 않는, 지적이며 사려깊은 딸로서 현대의 모럴과 모녀관계, 젊은 여성의 애환을 섬세하게 드러냈다. 이성구 감독의 사회적인 청춘물 <젊은 표정>(60)에서부터 엄앵란의 연기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김화랑 감독의 <딸>(60)에서 그녀는 홀아비 김승호의 딸 역을 정감어리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앵란은 이제 연기폭을 넓혀 좀더 깊이 파고드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충고를 자주 듣게 된다. 귀여운 딸이나 청초한 여대생 역할이 엄앵란의 전매특허로 여겨질 만큼 고정된 연기세계에서 무물러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로맨스 빠빠>(60, 신상옥)와 <박서방>(60, 강대진)에서 그녀의 딸 역할은 똑같이 상투적이었다.
그런 엄앵란에게 새롭게 주어진 역할은 황해, 허장강, 최남현, 장혁 등의 액션스타들 틈에 끼어 말타고 총쏘고 달리는 <지평선>(61, 정창화)에서는 아버지 김승호에게 버려진 후 소매치기가 되고 남자들에게 주먹을 날리는 여자 깡패였다. 당시 관객의 주류를 이루던 아줌마 관객들은 선머슴 같은 모습의 그런 엄앵란에게서 짓눌린 삶의 울증을 풀어주는 일종의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엄앵란은 늘 연기보다는 다른 무엇 때문에 주목받는 스타였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학사 여배우 1호’였다. 한국영화라면 경멸해마지 않던 대학생들도 단지 여대생 엄앵란이 주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를 보러갈 정도로, 엄앵란이 학사 배우라는 사실은 영화관객들에게 있어 하나의 호기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61년 시집 『사색의 구름다리』까지 출간한 지적인 이미지의 엄앵란은 특히 남녀 대학생에게 인기가 많은 스타였다.
엄앵란이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숙명여대 가정과에 진학한 그해 봄, 전창근 감독의 <단종애사>(56)에서였다. <단종애서>의 어린 송비(宋妃) 역을 연기할 마땅한 여배우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전창근 감독은 부인 유계선으로부터 노재신의 딸 엄앵란을 추천받게 된다. 종로 1가부터 동대문까지 당의에 트레머리를 한 엄앵란의 사진이 거리를 뒤덮고 국도극장에 <단종애사>의 간판이 붙자 이 청순하고 애틋한 이미지의 신인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명성의 첫 단추는 그녀의 태생에서 시작되었다, 대중음악가인 엄재근과 배우 노재신 사이에서 태어난 엄앵란은 대중예술이 낯설지 않은 분위기에서 자랄 수 있었다. 양친 외에도 많은 친척들이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아버지의 친동생으로 ‘토미와 그 악단’을 지휘하던 엄토미(예명)가 있었다. 연예인 집안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엄앵란은 학사배우라는 간판과 더불어 누구보다도 저널리즘의 혜택을 많이 받았고 비교적 어렵지 않게 스타의 길에 올라섰다. 일례로 엄앵란은 데뷔작 <단종애사>에서 그 자신으로보다는 여배우 노재신의 딸로서 광고되었고, 영화는 크게 히트하여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러한 출신배경을 고려할 때 엄앵란이 타고난 배우 기질을 보였다는 시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64년 11월 14일의 성대한 결혼식은 이 청춘영화의 아이콘에게 어두운 현실의 시작이었다. 이 공식적인 은퇴 이후, 결코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신혼기를 보내면서 엄앵란의 가는 허리는 갑자기 30인치로 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은퇴 이후 계속되는 흥행실패로 위기에 처한 극동영화사가 신-엄 콤비를 다시 불러내어 재기를 노렸던 <아네모네 마담>(68, 김기덕)에서 불어난 몸매로 등장한 엄앵란은 결국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90년부터 성일시네마트 기획이사를 지내고 지금까지도 TV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뛰어난 입담을 자랑하는 그녀의 실제 모습은 60년대 저널리즘이 만든 유약한 이미지보다는 얼마 전 출간된 『엄앵란, 뜨거운 가슴에 좌절이란 없다』(96)나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98)에서 간취할 수 있는 것처럼 인내로서 얻어낸 억척스러움이나 강인함에 더 가까운 것이다.(여선정)

출연
-56 단종애사, 천추의 한. -57 운명의 여인, 진리의 밤, 청실홍실. -58 승방비곡, 심정, 유혹의 강, 콩쥐팥쥐. -59 구름은 흘러도, 꿈은 사라지고, 꿈이여 다시 한번,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백꽃, 동심초, 별 하나 나 하나, 사랑은 흘러가도, 10대의 반항, 애수, 여사장, 여인숙, 조춘, 춘희, 태양의 거리, 황혼의 애상. -60 그 이름을 잊으리, 그리운 얼굴, 돌아온 사나이, 딸, 로맨스 빠빠, 무지개, 박서방, 반역자의 비애, 사랑이 피고지던 날, 슬픈 목가, 울려고 내가 왔던가, 젊은 설계도, 젊은이의 양지, 젊은 표정, 청춘의 윤리, 사랑이 피고지던 날, 표류도, 피묻은 대결. -61 내 몸에 손을 대지 마라, 노다지, 딸의 비밀, 마부, 부부독본, 사랑이 문을 두드릴 때, 사형수의 딸, 슬픔은 없다, 아버지, 언니는 말괄량이, 오인의 해병, 유부녀, 인생 갑을병, 임꺽정, 지평선, 한국의 비극, 현상붙은 사나이. -62 공포의 여덟 시간, 그리움은 가슴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대도전, 대 장화홍련전, 대지여 말해다오, 동경서 온 사나이, 두만강아 잘 있거라, 부라보 청춘, 불가사리, 사랑과 미움의 세월, 사랑과 죽음의 해협, 사랑의 승부, 새댁, 슬픔은 나에게만, 신입사원 미스터 리, 12인의 야도, 싹트는 양지, 아낌없이 주련다, 악인은 없다, 억세게 재수좋은 사나이, 여판사, 와룡선생 상경기, 왕자 호동, 외나무 다리, 월급쟁이, 임자없는 나룻배, 잊을 수 없는 애정, 칠공주, 특등신부와 삼등신랑, 피리불던 모녀고개, 하늘과 땅 사이에. -63 가슴에 꿈은 가득히, 가정교사, 강짜소동, 검은 장갑, 굴비, 그 땅의 연인들, 기분에 산다, 김약국의 딸들, 대전발 0시 50분, 대지의 지배자, 로맨스 가족, 미쓰 김의 이중생활, 바다는 말이 없다, 밤에 걸려온 전화, 사나이의 눈물, 사랑은 주는 것, 상해의 밤, 새엄마, 성난 코스모스, 아빠 안녕, 안개낀 거리, 오인의 독수리, 유랑극장, 작은댁, 정복자, 청춘교실, 청춘산맥, 팔검객, 혈맥. -64 공작부인, 나를 깊이 묻어주오, 내 마음은 호수, 니가 잘나 일색이냐, 단골손님, 대륙의 밀사, 대석굴암, 동백아가씨, 딸의 훈장, 떠날 때는 말없이, 말띠여대생, 맨발로 뛰어라, 맨발의 청춘, 명동아줌마, 목마른 나무들, 배신, 보고싶은 얼굴, 삼통 팔반 여반장, 시동생, 아랑의 정조, 여자 19세, 연애졸업반, 용서받기 싫다, 우리 엄마 최고, 울지 마라 물새야, 원앙선, 위를 보고 걷자, 이쁜이, 잃어버린 태양, 진고개 신사, 천안 삼거리, 총각김치, 풋내기 애인, 학사주점, 학생부부, 행주치마. -65 남과 북, 노을 진 들녘, 마지막 정열, 불량소녀 장미, 빗속에 지다, 사랑은 무서워, 상속자, 아름다운 눈동자,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열풍, 예기치 못한 사랑, 적자인생, 첫사랑, 출세해서 남주나, 큰댁, 태양의 그림자,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후회하지 않겠다. -66 금지된 입술, 나운규 일생,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 대탈출, 말띠신부, 보경아가씨, 서울머슴아, 영등포의 밤, 유관순, 이혼상담소, 전쟁과 여교사, 집없는 천사, 친정 어머니, 태양은 다시 뜬다. -67 명동왈가닥. -68 아네모네 마담. -70 결혼교실, 내 목숨 당신 품에, 떠나야 할 사람은, 천하일색 말괄량이, 특호실 여자 손님. -71 떡국. -72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73 시거든 떫지나 말지, 증언. -76 짝.
기획
-90 남자시장, 물 위를 걷는 여자. -91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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