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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검열자료 컬렉션

▶ 김기영 감독은 한국영화사, 나아가 세계영화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괴이한 영화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 중 한명입니다. 최근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배우 등이 아카데미 수상식 등을 통해 김기영 감독에 대한 존경을 바침으로써, 그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더욱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에서 미공보원(USIS) 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던 김기영은, 1955년 <죽엄의 상자>로 장편 극영화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그는 현재 가장 유명한 한국고전영화가 된 <하녀>(1960), 그 연작격이라 할 수 있는 <화녀>(1970), <충녀>(1971) 등 1990년까지 총 32편의 장편 극영화를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공개될 “김기영 검열자료 컬렉션”은 32편의 연출작 중 24편의 검열서류들로 구성되었는데, 안타깝게도 1950년대 연출작 전부(7편)와 1974년 작 <파계> 서류가 빠져있습니다다. 24건의 검열서류를 총 쪽수로 환산하면 1,681쪽에 달합니다. 적게는 15쪽부터(<죽어도 좋은 경험>(1995)) 많게는 177쪽(<혈육애>(1976))까지 분포되어 있습니다. 영화 당 평균 70여쪽에 이르는 분량인데, 그 가운데 민원서류에 구비해야 할 다양한 방계 서류들(세금납부증명서 등)이나 수입인지가 상당 분량을 차지합니다. 이 서류들은 검열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낮지만, 이를 통해 다양한 검열의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자료입니다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된 최초의 감독 이만희나, <춘몽>(1965)을 연출하여 음화제조죄로 기소된 유현목과 달리 김기영은 널리 알려진 검열 관련 스캔들이 없다. 김기영의 불온성과 전위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 대한 널리 알려진 검열 일화가 별로 없다는 것은 다소 특이한 일입니다. 가장 큰 원인은 <하녀> <화녀> <고려장>(1963) 등 그의 대표작들에 대한 검열 이슈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검열을 받지 않은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그의 대표작들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후기작, 대략 197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1980년대 초 사이 영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 다수의 영화 창작자들이 엄혹한 유신체제에 순응하여, 오히려 검열과 관련된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김기영의 사례는 흥미롭습니다. 그의 작품세계가 70년대 중반 이후 더욱 괴이하고 불온해져 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75년 4천만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만든 <반금련>의 경우 1976년부터 1981년 사이 5년의 기간 동안 무려 4차에 걸쳐 검열을 신청했으나 모두 불합격되었고, 1981년에 이르러서야 대규모 재편집을 통해 검열을 통과했습니다. 1979년 작 <수녀>는 “부인에 대한 학대행위”, “공서양속을 해할 우려” 등으로 본편 검열에서 불합격된 후 재편집을 통해 재검을 통과했습니다. 1979년 작 <느미> 역시 시나리오 검열에서 개작 판정, 1차 본편 검열에서 불합격되었습니다. 이외에도 1969년 작 <미녀 홍낭자>의 경우 미신 조장 우려, 귀신의 잔혹한 복수 장면 과다 등으로 제작신고가 반려되었고, 제작사가 미신적인 요소 장면 22개, 귀신 장면 40개를 삭제 혹은 변경한 뒤 제작신고가 수리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본편에서 10군데 이상 제한된 영화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혈육애>(화면삭제 1, 대사삭제 11), <이어도>(1977)(화면삭제 12, 화면단축 1, 대사삭제 9, 도합 22개처, 다수는 성적 표현에 집중됨), <흙>(1978)(화면삭제 3, 대사삭제 16개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화면삭제 8, 대사삭제 5개처) 등. 

향후 한국영화의 검열사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 나아가 대중문화의 역사 전반을 재구성함에 있어 이 컬렉션이 필수적인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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