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김학성 - 촬영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1-02조회 10,030
김학성 촬영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학성(金學成) 촬영감독에게는 여배우 최은희의 전남편이라는 과거사가 따라붙었다. 여기에 미8군 무대에 섰던 재미 가수 김계자의 외삼촌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바로 월북 배우 김연실(金蓮實)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전 조선 아마추어 복싱 플라이급 선수권 보유자였다는 전력이 함께 언급됐다.

그는 평소에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연출해보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에 떠밀려 살아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그의 운명론적 인생관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든 특유의 6?25 전쟁 체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당시의 촬영기사들은 전황을 기록하기 위해 종군했다. 김학성도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으로 최전방에 나섰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던 아내(최은희)가 국군의 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난 지 얼마 안 된 뒤였다. 1.4후퇴 때였다. 수원 북방 안성 2백고지 전투는 서울 진격의 성패가 달린 중요한 고비였다. 1사단 15연대는 혼성부대와 함께 혈전을 벌였다. 선두에 선 소대가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 박격 포탄이 작렬했다. 그 순간 그들을 따라가던 그의 몸도 땅 위로 솟구쳤다.

그날 오후 고갯마루로 진격해온 군인들이 시체더미 사이에 떨어진 뉴스 촬영용 아이모 카메라(Eyemo Camera)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니 그때 그가 국방부 정훈국 소속 촬영대원임을 밝히는 완장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됐을 것이다. 

아랫배에 세 군데나 관통상을 입은 그의 오른쪽 가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더욱이 오른발은 반이나 날아간 상태였다. 피로 얼룩진 국방부 발행 신분증을 보게 된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수원의 야전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미군의관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끈질긴 그의 목숨은 대구 제16육군병원으로 후송된 후 한 미군 고문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이번에도 그의 몸을 덮은 담요에 표시된 ‘보도대원’ 덕이었다. 그는 이렇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세 번의 고비와 일곱 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를 포화 속에서 살려낸 것은 메고 있던 스틸용 카메라 코닥 레티나(Kodak Retina)였다. 파편이 카메라를 관통하는 바람에 심장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다 건너온 일본 카메라맨의 우정

내가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던 김학성 선생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1966년 봄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월간지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보물로 여기는 애장품을 소개하기 위해 섭외하면서부터였다. 자택에 와주기를 바라는 대부분의 인사들과는 달리 약속한 충무로의 어느 다방에 나타난 그는 물 한잔을 마시고 나자 메고 있던 낡은 카메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 목숨을 살려준 보물이에요. 나의 가보지요.” 예의 스틸용 카메라 코닥 레티나였다. 이 카메라는 선생의 모습과 함께 ‘나의 가보(家寶)’라는 제목으로 화보에 소개 됐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선생을 통해 서울을 방문한 일본의 촬영기사 오카자키 고우조(岡崎 宏三) 씨를 알게 됐다. 조선호텔에서 였다. 맘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이분은 김 선생이 일본 신코(新興)키네마의 촬영 조수 시절 가깝게 지낸 동료였다. 나이는 1913년생인 김 선생보다 다섯 살 아래였지만, 같은 해인 1939년 <사랑의 기념일>로 등장한 데뷔 동기였다. 그는 이후 <36인의 승객>(1957), <어용금>(御用金, 1957), <무뢰한>(1970) 등 40편이 넘는 촬영 작품을 내놓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카메라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 영화인들의 왕래가 드물었던 시절, 어렵게 바다를 건너온 옛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며 미안해하던 김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그때 명동 퇴계로 방향 지금의 퍼시픽호텔 왼쪽 남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살았다. 나는 이들의 각별한 우정을 <주간 조선>에 소개하고, 두 사람을 MBC의 간판 프로였던 <모닝 쇼>에 출연하도록 주선했다. 오카자키 씨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나에게 선물과 함께 연하장을 보내오기도 했다.

김학성 선생은 광복 전후의 촬영기사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오늘날에는 촬영기사 대신 촬영감독이라는 명칭을 쓰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촬영기사로 불렸다. 촬영감독 이라는 지칭에는 영화감독의 지시를 받는 단순한 화면 구성자가 아니라, 이와 동등한 위상을 가진 수평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인식에 이르는 데는 그를 존경했던 정일성 촬영감독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임권택 감독과 콤비를 이룬 <만다라>(1981), <서편제>(1993), <취화선>(2002) 등이 진가를 발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김학성 선생은 이런 일에 개의치 않고 30여 년에 이르는 카메라 인생의 길을 걸어왔다. 데뷔작 <성황당>(방한준,1939)을 비롯한 <집 없는 천사>(최인규, 1941), <거경전(巨鯨傳)> <풍년가>(이상 방한준, 1944), <새로운 맹서>(신경균, 1947),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생명>(이강천, 1958), <오발탄>(유현목, 1961), <성웅 이순신>(유현목, 1962), <건너지 못하는 강>(조긍하, 1963), <아리랑>(유현목, 1968) 등 19편이 그 자취이다. 이 가운데는 6.25 전쟁 전후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1948)과 <정의의 진격>(1951) 등 2편의 기록영화가 포함돼 있다.

<집 없는 천사>는 ‘부랑아의 구제 문제’를 부각시켜 ‘사회적인 반향’(<영화순보>, 1941년 11월1일, 제30호)을 일으켰고, <새로운 맹서>는 최은희를 배출함으로써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생명>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여는 기술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오발탄>은 한국영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으며 그가 창출한 영상미에도 주목하게 했다.

1982년 11월 20일 선생이 쉰아홉 생애를 거두고 간 지 어느새 3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분과 함께 남산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김연실이 출연한 북한영화를 보고 아쉬워하며 어두운 남산길을 내려오던 일이 손에 잡힐 듯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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