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한형모 - 감독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1-02조회 659

한마디로 한형모(韓瀅模) 감독은 ‘한국 최초’라는 몇 가지 기록을 남긴 유별난 한국영화계의 예인(藝人)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벽을 뚫고>(1949)에서 처음 기계식 자동촬영을 시도했고, <운명의 손>(1954)에서는 국내 최초로 키스신을, <청춘쌍곡선>(1956)에서는 최초로 뮤지컬 코미디를 선보이며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촬영부 조수 한형모, 메가폰을 잡다
<성벽을 뚫고>는 대학 동기 동창이자 처남 매부 사이인 이집길과 권영팔이 각기 육군 소위와 공산주의자로 갈려 서로 총을 겨누게 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린 영화다. 한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의 연출은 당초 <마음의 고향>(1949)을 만든 윤용규 감독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양하는 바람에 안진상(安鎭相)을 거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진상 은 일본의 동보영화사 수업 시절 윤용규, 한형모와 같이 고생한 ‘도호파(東寶派) 삼총사’ 중 한 사람이었다. 유명한 도요타 시로(豊田四郞) 문하의 제2조감독이었는데, 제1조감독이 바로 윤용규였다. 당시 한형모는 촬영부 조수였다. 현해탄을 넘어 동보에 자리 잡은 세 명의 촉망받는 한국인 영화학도들은 앞으로 기회가 오면 조국에서 힘을 모아 좋은 영화를 만들자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진상은 경찰의 밀수 근절을 다룬 최철(崔鐵?배우 최불암의 부친) 제작의 <여명(黎明)>(1948)에서 첫 메가폰을 잡은 뒤 유엔군의 인천 상륙 때 거리에 나왔다가 후퇴하는 인민군 총에 맞아 절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성벽을 뚫고>에 대한 두 친구의 연출 고사는 결과적으로 촬영기사인 한형모를 감독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키스신, 그리고 최초의 뮤지컬 코미디
그뿐만 아니라 기계식 자동촬영으로 완성케 하는 기회마저 얻게되었다. 그가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수동식 촬영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발보카메라가 그 수단이었다. 수동식 촬영은 회전 속도가 고르지 않아 화면이 껌뻑거리거나 연기가 튀는 현상이 나타났다. 노출계 없는 수동식 카메라는 영상효과도 떨어졌다. 화면의 움직임이 실제 사람의 동작과 같게 하기 위해서는 초당 24장의 화상이 돌아가도록 찍어야 하는데, 수동식이다보니 그렇지 못했다. 수동촬영의 성패는 노련함과 호흡에 달려 있었다. 1분 동안 숨을 쉬지 않은 채 단숨에 찍어야 하는 게 수동촬영의 요령이었다. 그래서 촬영기사들은 수동촬영을 가리켜 ‘1분 승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촬영뿐만 아니라 현상, 영사까지 남의 손에 의존해야 했다. 일본은 1940년 이후 자동현상기가 도입됨에 따라 수동으로 현상하는 불편을 덜었으나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에야 실현되었다.

그 첫 결실이 바로 <운명의 손>이었다. 이 영화는 술집을 무대로 활동하는 여간첩(윤인자)과 고학생으로 가장한 방첩대 대위(이향)의 상반된 역할을 통해 전시하의 남북 대결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키스신이라지만 남녀가 입술을 포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울러 여간첩이 처음 등장한 영화라는 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병원의 환자로 왔다가 의사의 권유에 따라 서로 생활환경을 바꾸게 된 고등학교 동창 친구 간의 상황 변화와 에피소드를 담은 <청춘쌍곡선>은 의사 역을 맡은 작곡가 박시춘의 기타 반주에맞춰 간호사(김시스터즈)들이 노래를 부르는 등 악극 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공윤 시절 한형모 감독과의 인연
내가 한형모 감독과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1988년 전후,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영화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분이 영화계를 대표해 들어와 자리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한형모 감독에 앞서 이강천 감독이 영화심의를 맡았었다. 영화심의는 국내외를 포함 일곱 분이 했는데, 일주일에 4회 정도 진행되었다. 그런데 영화등급을 놓고 그분과 의견 충돌이 많았다. 한형모 감독은 선정적인 애정 표현이나 폭력적인 장면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특히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질을 따지며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시만 해도 ‘문제의 장면’을 ‘삭제’하거나 ‘여과’ 시키는 일이 관행처럼 이루어졌다. ‘삭제’를 뜻하는 가위질과 ‘여과’라는 화면 단축 사이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래서 그나마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등급의 ‘상향 조정’이었다. 즉 ‘중학생관람가’ 신청작을 ‘연소자 관람불가’ 로 한 등급 올려 수용한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게 외화 <생도의 분노>(해럴드 베커) 심의 때의 일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명예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퇴역장군 출신 사립 사관학교 교장(조지 C. 스콧 분)이 티모시 허튼, 톰 크루즈 등 학생들과 합세해 정부의 학교 폐쇄 방침에 맞선다는 얘기인데,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어느 여심의위원이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므로 관련 부분을 단축하고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반대했지만, 한 감독이 이 같은 강경론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바람에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 감독에게 영화감독으로서 그럴 수 있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 영화는 개봉 후 국영 TV방송에 방영됨으로써 사실상 아무나 볼 수 있는 ‘연소자 관람가’ 등급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그와는 이런 식으로 의견이 대립될 때가 많았다.

보수적인, 하지만 언제나 혁신을 꾀한 감독
한형모 감독은 이처럼 보수적이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변하는 사회현상,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는 민감했다. 당시 70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를 몰고 다녔다. 그래서 강북에 살았던 나는 그분의 차에 편승할 때가 많았다. 그런 덕에 그분의 영화계 입문 전후의 귀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때 선생은 고속터미널 앞 한신2차아파트에 살았다. 그는 계산에 철저한 일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어느 날 선생에게 그동안 만든 작품의 스틸을 부탁하자 복사해 줄 테니 필름을 사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흑백 코닥필름 2통을 사들인 결과로 <마음의 고향>을 비롯한 <여명> 등 촬영 작품과 <성벽을 뚫고> 등 그의 감독 작품 10여 편, 50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심의위원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자신이 그린 동양화 산수실경(山水實景) 한 폭을 승용차에 싣고 와서 기념으로 간직하라며 주기도 했다. 정통적인 산수화와는 다른 유화풍의 강렬한 터치를 느끼게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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