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석금성(석정희) - 배우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5-11-02조회 2,910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월하의 맹세>(1923)의 이월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죽은 그 일생 자체가 꾸며낸 한 편의 비극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금성(石金星)도 이에 못지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출생 신분이 분명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성인이 된 후 겪은 세상살이는 참으로 모진 것이었다. 일찍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피붙이와 헤어지고, 가까이 있는 자식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월화보다 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되기 40일 전의 얘기 

내가 석금성 여사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고하기 40일 전이었다. MBC가 제작하는 TV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그가 묵던 남영동 한 여관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였다. 많은 얘기 끝에 여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해방 후 생활이 어려워 옷가지 등을 동두천에 나가 쌀과 바꿔다 끼니를 잇곤 했지. 하루는 황철(黃徹, 월북배우)에게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킬 자신이 없으니 남편이 있는 북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4남매 모두 월북하게 된 거야.” 

그런데 1991년부터 북으로 간 자녀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소식이었다. 18세 때 ‘샘물터에서’라는 노랫말로 재능을 인정받은 막내딸 최로사(崔露砂, 당시 65세가 량)는 손꼽히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호섭(57세 가량)은 고모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들고 있던 북한 화보잡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막내딸의 근황을 알리는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한 국가안전기획부의 묵인 아래 일본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던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여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1991년 북으로 간 자녀로부터 연락이 닿기 전까지만 해도 여사에게는 아들 이택균(李澤均)과 며느리 강숙희(姜淑姬)가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부부배우였다. 이택균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1949년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이용사>의 단역인 성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나왔다. 이후 <낙동강>(1952), <최후의 유혹>(1953), <미망인>(1955), <교차로>(1956)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연 및 조연을 했고, <처와 애인>(1957) 때는 아내와 주연을 나눠 맡았다. 여사는 그들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소식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남 얘기하듯이 “1950년대 중반에 할리우드에서 왔다는 배우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윤인자를 만났더니 그애는 택시를 타도 건방지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더군. 하루는 나일구다방(명동)에서 약속하고 이병일 감독하고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어요. 하도 고까와서 ‘선배 앞에서 웬 검은 안경이냐’고 야단을 쳤지. 그때는 택균이와 연애하는 줄도 몰랐거든.” 이렇게 들려주었다. 그의 직선적인 성품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두 번의 혼인과 남북으로 갈린 혈육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석금성의 본명은 정의(丁義)였다. 일찍이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토월회와 인연이 닿으면서 1925년 연극계에 투신했다. 이 무렵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 1926년 장남 이택균(李澤畇)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1929년 김영환 감독의 <약혼>으로 영화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잇따라 김상진 감독의 <종소리>(1929)에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과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2남2녀를 둔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 서다가 잊을 만하면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식으로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심청>(안석영, 1937)의 단역 장승상 부인과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 어용영화 <너와 나>(허영, 1941)에 주인공 나카다 겐지로(永田絃次郞, 한국명 김영길)의 어머니역을 맡는다. 이때 처음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를 사용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보낸 마감한 석금성은 광복 후 <마음의 고향>(1949)을 비롯해 <춘향전>(1955), <장화홍련전>(1956), <그 여자의 일생>(1957), <마도의 향불> <자유결혼>(1958), <청춘극장>(1959), <장희빈>(1961), <성난 코스모스>(1963), <치마바위>(1964) 등 150여 편을 통해 퇴기나 악독한 계모, 독부, 작부, 주모 등 주로 성격이 강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화촉신방>(1966) 이후 스크린과 멀어진 상태에서 거의 16년 만인 76세의 나이에 정진우 감독의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로 컴백, 흑산도의 악덕 주모역할을 맡아 제3회 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을 받는 관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분례기>(1992, SBS),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 SBS) 등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신극의 모태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말년에도 늘 짙은 마스카라,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한 화장을 즐겼던 석금성 여사는 화려했던 한때의 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아흔 살을 눈앞에 둔 1995년 9월 3일 오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남영동 여관과 광명시에서 홀로 어렵게 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교도소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신의 출연 TV드라마 <사평역(沙平驛)>(1981)의 노모처럼 북에 있는 혈육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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