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주목 이 한편의 영화] 김영탁 감독과 김성훈 평론가가 말하는 <슬로우 비디오>

by.김성훈(씨네21 기자) 2015-08-06조회 3,186
슬로우 비디오

이번 <영화천국>이 주목하는 영화는 김영탁 감독의 <슬로우 비디오>다. 이 영화는 2014년 10월 2일 개봉해 누적관객 116만 9546명(영진위, 2015. 6. 2 기준)을 동원했으며, 개성 있는 연출로 그만의 독자적인 영화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김영탁 감독의 스타일이 잘 반영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6월 1일, 영상자료원 인근 카페에서 김영탁 감독과 <씨네21> 김성훈 기자가 만났다. 김성훈 기자 지인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후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늘 만나는 친한 친구처럼 <슬로우 비디오>에 대한 편안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기록 및 정리 _ 민병현 경영기획부 min@koreafilm.or.kr
사진 _ 이준구 포토그래퍼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성훈 기자(이하 ‘훈’) 칸 국제영화제 출장 때문에 어제(5월 31일) 비로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조지 밀러, 2015)를 봤다. 오늘 인터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감독님 생각이 나더라.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큰 범위의 주제가 <헬로우 고스트>(2010)나 <슬로우 비디오>(2014)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지 밀러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치의 희망도 없는 황량한 공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살아갈 곳이 없다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감독님의 두 작품과 맞닿는 점이 있다고 느꼈다.

김영탁 감독(이하 ‘탁’) 너무 부담스럽다.(웃음) 사실 극장에 잘 가지 않는 편인데, <매드맥스>는 개봉하는 날 예매해서 봤다. 비교 자체가 조지 밀러 감독에게 미안하지만 일부 동의하는 점이 있다. <매드맥스>를 보면서 ‘사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느꼈고, 절망적인 시대에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이 절절하게 보였는데, 나 역시 영화를 만들면서 큰 틀에서 이 두 가지를 담고자 노력한다. 나 같았으면 그 과정을 디테일한 스토리로 표현했을 텐데, 매우 단순한 플롯으로 리얼하게 보여줘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70세의 조지 밀러 감독이 오랜 세월 고민한 흔적이 보여 더욱 와 닿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날 술을 많이 마셨다.(웃음)

<슬로우 비디오> 개봉 전 비공개 시사회에서 영화를 봤다. 당시 스릴러 영화가 많이 개봉돼 이런 영화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스릴러는 분명 매력적인 장르이고, 장르 특성상 창작자가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하기에 유리한 점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타 장르에 비해 투자가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최근 스릴러 영화들이 인물들을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야기 전개를 목적으로 작가가 필요한 지점에 인물을 설정한다고 할까. 그런 피로감이 생길 즈음 <슬로우 비디오>를 본 것이다. 영화가 무척 차분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이 영화가 미학적 성취를 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평가받진 않았지만 소소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아낸 영화를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그래서 개봉 당시 <씨네21> 내에서 기획회의를 할 때 이 영화를 지지했다. 먼저, 전작 <헬로우 고스트>가 30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서 투자도 잘되는 상황이었는데, 왜 이 영화를 선택했는지를 묻고 싶다.

<헬로우 고스트>가 흥행에 성공하니 차기작에 대한 투자를 많이 제안받았다. 심지어 영화 편집 과정에서도 투자가 들어왔다.(웃음) 하지만 대부분을 거절했다.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 만드는 작업을 좋아하다보니, 내가 쓴 이야기 외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더라. 그때 다 받았어야 하는데 후회된다.(일동 웃음) 사실 <슬로우 비디오>에 미안한 것은 원래 이 영화를 차기작으로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너무 따뜻한 감독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차기작으로 스릴러 장르의 어두운 성장물을 준비했다. 국내의 메인 투자배급사와 계약도 하고 톱 배우도 캐스팅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렇게 팀을 꾸렸는데 크랭크 인 두 달 전 그 배우가 사정이 생겨 하차했다. 투자배급사와 계약을 했기에 다른 배우를 기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애초에 염두에 둔 배우가 아니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태프들에게 그동안의 급여를 주고 해산하니 손실이 발생해 빨리 다른 작품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급하게 쓴 작품이 <슬로우 비디오>다. 그 후 시나리오 문제로 의견 차이가 있어 다른 투자배급사를 알아보던 중 20세기폭스사가 하겠다고 나섰다. 폭스로 옮기면서 이전 투자배급사와 갈등이 있진 않았다. 이해해줬고, 원만하게 잘 해결할 수 있었다.


<슬로우 비디오>를 보고 20세기폭스사에 연락해 왜 이 영화에 투자했냐고 질문한 적 있다. 시사회 다음 날 시나리오도 구해서 읽어봤지만, 비평가로서 구성이 좋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만약 내가 투자배급사였다면 투자를 안 했을 것 같다. 흥행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탁 대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잘 정리해달라.(일동 웃음)) 하지만 폭스의 대답이 흥미로웠다. 폭스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우선 시나리오가 원작이라는 점이었다. 직배사가 로컬 시장에서 영화를 제작할 경우 원작의 권리관계가 복잡하다거나 이야기 외적인 문제의 소지가 있을 것 같으면 일차적으로 골라낸다. 최근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는 원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슬로우 비디오>는 원작이고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 뚜렷해서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제작 투자를 총괄한 허성일 프로듀서에게 감사하다. 초고를 보고 내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해줬다. 여러 투자배급사와 일해보지 않아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폭스의 경우 사소한 개입을 하지 않아서 원활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영화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개인적으로 <슬로우 비디오>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가 CCTV다. 통상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CCTV는 으레 누군가를 몰래 훔쳐보는 범죄의 도구, 결정적 단서, 음침하고 음흉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CCTV는 우리 주변을 따뜻하게 비춘다. 이 점이 재기발랄해 보였다. 이 부정적인 느낌의 장치를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였고, 그래서인지 일종의 판타지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CCTV를 어떻게 달리 보여주고자 했는지 묻고 싶다.

글을 쓸 때 여러 가지 화두를 가지고 쓴다. <슬로우 비디오>의 시작은 ‘본다’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남자가 여자를 제대로 본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 중에 ‘안구진탕증’이라는 병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눈이 떨리는 병인데,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래서 째려본다고 오해도 받고,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친구들이 싫어했다. 이 친구에게서 모티프를 얻어 그런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똑바로 쳐다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안구진탕증’을 ‘동체시력’으로 바꾸긴 했지만 말이다.(동체시력이라는 용어는 있지만 영화에 나오는 증상은 지어낸 것이다.)

CCTV가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설정은 내가 영화를 만들 때마다 늘 마음에 담고 있는 일종의 영화 철학과 관련이 있다. 영화감독 혹은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러울 때가 많다. 굳이 다른 이타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아도, 너무 이기적인 직업이다. 주변 환경이 어떻든 난 집에선 글만 쓰고, 현장에서는 영화에만 매달린다. 사실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면 잘할 수 없는 직업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작가, 감독이 그렇진 않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더 나이가 들고 또 다른 영화를 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예민한 편이라 평소 CCTV가 무척 거슬린다. 분명 나를 훔쳐보는 것도 맞는데, 잘 생각해보면 저 렌즈 너머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옥죄어오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CCTV 센터 안의 사람들을 캐스팅할 때도 신경을 썼다.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누가 봐도 불편함보다는 친숙함을 줄 수 있는 배우들로 센터가 채워져 있다.

캐스팅 이야기로 넘어왔는데, <슬로우 비디오>에서 차태현 씨를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이전 작품부터 함께하면서 신뢰를 쌓았는데, 배우 입장에서 소속사에서 말리는 배역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던가? 그리고 여장부(차태현)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 궁금하다.

우선, <헬로우 고스트> 이후 작업을 한 번 더 하자는 제안을 했다. 차태현 씨는 늘 고맙게 생각하는 배우이자 동료다. 동갑이라 말도 잘 통하고, 배우이자 예능인이다보니 늘 타인에게 자신을 잘 맞추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지만 실제 성격은 나와 비슷하게 어두운 면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나의 유머 코드를 좋아한다. 시나리오를 보고 여장부를 “그냥 감독님 같다. 딱 김영탁이다.”라고 하더라.(웃음) 말했듯이 평소에 CCTV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 시나리오는 훔쳐본다와 지켜본다의 균형감이 있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태현 씨가 캐스팅되면서 지켜본다 쪽으로 기울어진, 판타지가 가미된 휴먼 스토리가 되었다. 그 방향이 태현 씨에게 맞는 옷이라 생각했다.

차태현이라는 배우는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보여주는 밝고 쾌활한 이미지가 있고, 이전에 출연했던 영화나 드라마 역시 그런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인지 차태현 씨가 어쩌면 작가적인, 개성 있는 영화에 갈증이 있지 않았나 싶다. <슬로우 비디오>를 선택한 것도 배우 차태현의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헬로우 고스트> 촬영 때 차태현 씨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여러 번 있다. 한번은 자신의 연기를 바꿔준 세 명의 감독이 있다고 하더라. 1999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해피투게더>의 오종록 감독, <엽기적인 그녀>(2001)의 곽재용 감독, 그리고 세 번째가 김영탁이라고 했다. 그때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오늘 술을 많이 마셨구나, 그리고 지금 기분이 좋구나.(일동 웃음)

아마도 태현 씨가 그전에 만난 감독들과 나는 조금 다르긴 했던 거 같다. 내가 현장에서 차태현 씨에게 한 디렉션은 그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 감독들은 차태현 씨에게 “조금 더 웃기게” “조금 더 밝게”를 요구했단다. 하지만 난 그런 요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헬로우 고스트>에서 차태현 씨는 애드리브 연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철저히 짜인 구성대로 연기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연기적인 측면에서 인정받은 부분이 있어 만족하지 않았나 싶다. <슬로우 비디오> 때는 차태현 씨가 시나리오를 아내에게 보여줬는데, 아내가 “글은 좋은데 이건 관객 50만 명도 안 든다.”라고 하고, “그래도 할 거잖아.” 했단다. 그리고 영화 개봉 후, 아내가 좋아하더라는 말을 태현 씨에게 들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 대부분의 장면에서 눈을 가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 내지는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소속사 역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현 씨는 영화의 80% 분량에서 선글라스를 써줬다. 차태현 씨가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여장부라는 캐릭터는 현실적이지 않다. ‘동체시력’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스러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여장부는 누가 봐도 차태현이 적격이다. 국민 대부분이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캐릭터가 되었다고 본다. 감독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 같다. 등장인물의 설정이 비현실적이면 초반부에 이 캐릭터에 대해 관객을 설득해야만 한다. 여컨대 왜 여장부가 동체시력을 갖게 되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차태현 씨가 여장부를 연기하면서 그 과정을 생략했다고 관객들에게 불친절한 느낌을 주진 않았을 것이다.

동의한다. 차태현 씨는 워낙 사적으로도 가까워 현장에서도 잘 맞는다. 그리고 다른 배우분들의 힘도 컸다. 오달수 선배님은 베테랑 배우이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배지만 현장에서 5~6번 재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연기를 잘하시지만 호흡이나 연기톤 등 그간 보여줬던 연기와는 조금 다른 방식의 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잘 따라주셨다. 그리고 그 이상을 보여주셨다. 고창석 선배님 역시 고맙다. 영화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사실 단 하루만 촬영하셨다. 원래 카메오 형식으로 출연하려고 했는데, 대사도 철저히 준비해주셨고, 짧은 시간에 완벽한 연기를 해주셔서 감탄했다. 사실, 출현해주신 모든 배우 분한테 고맙다. 게다가 이번엔 편집도 많아서 미안한 마음도 있다.

<헬로우 고스트> 개봉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부정적으로 보는 기자들 대부분은 이 영화가 호흡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호흡이 느리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지루하지 않더라.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을 쏟는 작업이라고 봤다. 하지만 최근에 <헬로우 고스트>를 다시 봤는데 약간 촌스럽다고 느꼈다.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가다보니 상대적으로 배경이 드러나지 않아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슬로우 비디오>는 배경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인물이 더욱 풍성해 보였고, 인물의 성격도 유추할 수 있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 작업할 때, 그리고 촬영할 때 여장부를 둘러싼 여러 인물을 설정하면서 전작과 차별되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헬로우 고스트>를 돌이켜보면 세 가지 패착이 있었다. (훈 패착이라는 표현은 가혹하다.(웃음)) 그럼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일동 웃음) 우선 무지했다. 난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지 않았고, 연출부 경력도 없다. <헬로우 고스트>가 데뷔작이다보니 카메라 앵글 등 기술적인 부분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두 번째는 오만했다. 난 내가 데뷔하면 역사에 남는 영화를 찍을 것이라 생각했다.(웃음) 내가 평소 즐겨보고 좋아하던 영화, 그 감독만큼 영화를 잘 찍을 줄 알았다. 그래서 <헬로우 고스트>의 구성을 기존의 ‘기-승-전-결’이 아닌 ‘기-승-승-결’로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오만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집스러웠다. <헬로우 고스트> 시니라오를 쓸 때 서른세 살이었다. 당시 인생을 산다는 것이 매일 즐겁진 않더라. 우리는 특정 순간의 좋은 기억으로 남은 세월을 사는 것 같았다. <헬로우 고스트>로 우리 일상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보는 관객에 따라 이 영화를 지루하게, 그리고 호흡이 느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밖에 못 찍는 것이 아니고 원래 이렇게 찍은 영화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반면 <슬로우 비디오>는 좀 더 관객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다. 실제로 전작에 비해 “영화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씀도 많이 해주시더라. 하지만 난 여전히 <슬로우 비디오>의 호흡이 급했다고 생각한다.(웃음)

영화 호흡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영화에는 천천히 걷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원래 느린 호흡을 선호하는 감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들이 후반부에 그림 지도를 완성해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작 과정에서 호흡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슬로우 비디오>는 편집이 한 번 크게 바뀌었다. 원래는 내레이션과 여장부의 속말이 많지 않았다. 1차 편집 후 제작진은 너무 만족해서 신속하게 블라인드 시사를 열었는데, 난리가 났다. 재미없다고 말이다.(웃음) 내 성격상 단순히 재미만 없다면 편집을 바꾸지 않았을 텐데, 많은 경우 재미라는 건 주관적인 판단이니까. 한데 반응을 체크해보니 주인공의 심리 파악이 힘들다는 의견이 많았다. 감독으로서 주인공이 이해되지 않는 영화를 만들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내레이션과 속말을 넣었다. 이후 다시 블라인드 시사를 했는데 점수가 많이 좋아졌다. 폭스 인터내셔널 대표도 좋아하더라.

<슬로우 비디오>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상업영화에서 한 공간, 작은 범위의 공간을 애정 있게 다룬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등장인물들과 밀접하게 관련 있기도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을 통해 최대한 일상을 지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다시 말해,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함께 동네를 산책하는 느낌이 들게 하고 싶었다. <슬로우 비디오>에 나오는 공간 대부분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곳들이다.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장소 헌팅 때 이런 콘셉트를 요구하면 대부분 보기 좋은, 예쁜 공간을 조사해 와서 애를 많이 먹었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동네, 공간은 여러 곳이 내가 살았던 곳이다. 또한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곳들이기도 하다. 훗날 나이를 더 먹고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했던 공간들을 추억하고 싶다는 약간의 사심도 담겨 있다.(웃음)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헬로우 고스트> <슬로우 비디오>와 다른가?

외적으로는 좀 더 대중적인 개연성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영화의 대중성에 대해 요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차기작은 사극인데, 고집스럽게 혼자 작업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처음으로 공동각본을 진행 중이다. 전작 두 편 모두 내 자식이라 좋아하지만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서둘지 않고 한 편 한 편 성장하다보면 관객들이 좋아하는, 또한 나 스스로 보다 만족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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