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독은기 - 배우

by.이화진(한국영화사 연구자) 2012-06-19조회 3,128

독은기(獨銀麒, 1910 ~ ? )는 출연작의 수에 비하여 전기적인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다. 일제의 영화인 등록 당시 본명은 ‘김영식(金永植)’으로 1941년 현재 31세라고 밝힌 일이 있으나, 중학 시절 한 방에서 뒹굴던 친구 김성칠(1913~1951)은 그의 본명이 ‘김춘득(金春得)’이라고 적고 있다.(?역사 앞에서?, 창작과비평사, 1993) 대구 출신인 독은기는 1930년대 전반기 대구를 거점으로 했던 이규환의 영화 제작을 돕다가 <그 후의 이도령>(1936)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규환은 <바다야 말하라>(1935)를 기획할 때 사재를 털어 제작비를 댔던 ‘김영식 소년’에게 토지 문서를 다시 찾아주고자 <그 후의 이도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김영식 소년’이 독은기든 아니든, 독은기의 영화 인생에서 이규환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독은기의 출세작 역시 이규환이 연출한 <나그네>다. 이규환의 대표작이자 1930년대 후반 조선영화의 가작인 이 영화에서 그는 ‘복룡’(왕평 분) 가족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삼수’로 출연했다. 선 굵은 외모와 신인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성격적인 역에 꼭 맞는 타입”(남궁옥, ?조선영화의 최고봉 <나그네>를 보고?, ?매일신보?, 1937. 4. 25.)이라는 평을 들으며 토키 시대 주목할 만한 배우가 된 그는 성봉영화원의 두 번째 작품인 <군용열차>(1938)에도 출연한다. 독은기는 군용열차 기관사 ‘점용’(왕평 분)의 친구 ‘원진’을 맡았다. 기생인 애인의 몸값을 구하기 위해 스파이에게 군용열차의 정보를 누설하고, 그 죄책감 때문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원진’의 서사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중요한 축이었다. 이후 성봉영화원을 흡수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제작한 <새 출발>(1939)과 협동예술영화사가 제작한 <창공(‘돌쇠’)>(1941)까지, 이규환과 독은기의 인연은 이어졌다. 

그러나 1942년 민간영화사들을 통폐합한 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출범하면서 그들의 영화적 교유는 일단 중단된다. 법인 조영에 가입하지 않았던 이규환은 만주영화협회에 조선영화부를 설립하려다 좌절하고 귀국 후 연극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했다. 반면, 법인 조영(朝映)의 연기부에 입사했던 독은기는 <젊은 모습>(1943), <조선해협>(1943), <병정님>(1944), <사랑과 맹세>(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가 맡았던 <젊은 모습>의 ‘금의환향한 지원병’, <사랑과 맹세>의 ‘전사한 지원병’은 늠름한 자태로 식민지 조선의 ‘아우’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부추기는 역할이었다. 또 평범한 농촌 출신 지원병 야스모토 에이치(康本瑛一)로 분한 <병정님>에서는 가장 계몽적인 발화자로서 ‘병영은 군인의 가정’이니, 걱정 말고 입대하라고 권유했다. 법인 조영 시대 독은기는 배우로서 가장 활력적인 시기를 보냈지만, 그가 맡았던 배역들은 식민지 청년들이 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지 추호의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평면적인 인물들이었다. 

법인 조영에서의 활동은 해방 후 독은기의 삶에 족쇄가 되었다. <자유만세>(1946)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 경찰의 사찰주임이 된 ‘남부’로 출연했던 것처럼, 일제의 선전영화 속 긍정적인 인물은 한 순간에 ‘매국노’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의 ‘아우’들이 우러르는 ‘형’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의 격동 속에서 그는 좌익 계열 영화인들의 조선영화동맹에 참여했다가 전향했지만, 남한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한국전쟁 중 월북하기까지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 것은 물론, 식민지 말기의 ‘친일’과 해방 직후 ‘좌익’ 경력으로 남한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한편, 그를 영화로 이끌었던 이규환은 해방 후 조선영화동맹에 대항해 조선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했고, <민족의 새벽>(1947), <갈매기>(1948) 등을 연출하면서 다음 세대 감독들을 길러냈다. 독은기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재기를 꿈꾸었던 <하얀 쪽배>가 전쟁으로 중단되고, 국군의 서울 수복을 앞두고 있었던 1950년 9월 26일 늦은 오후, 독은기는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역사학자 김성칠의 집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친일’에서 ‘좌익’으로, ‘전향자’에서 ‘월북자’로, 불운한 시대 전향을 거듭해야 했던 배우 독은기의 뒷모습을 옛친구는 몇 줄의 일기로 남겼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 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 정책이 너무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 글: 이화진(한국영화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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