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윤양하 - 배우 - 열정과 야망을 내재한 유도 8단의 투사

by.김화(영화평론가) 2008-11-11조회 3,465

유도 8단이 단단한 체격에 굵고 검은색이 짙은 눈썹, 정감이 넘치는 호남형 마스크의 윤양하는 멜로물 데뷔로 영화배우를 출발했으나 곧 검객물의 히어로로 탈바꿈했다.
윤양하는 1967년 김수용 감독의 멜로물 <빙점(氷點)>에 데뷔했다. 일본 여류작가 三浦綾子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양녀로 입적시킨 소녀를 친딸을 죽인 살인범으로 오해한 양부모가 그녀를 구박해오다 20년이 지난 다음 사실이 밝혀져 양부모가 양녀에게 사죄한다는 내용이다. 부모 역으로 김진규, 김지미 양녀 역에 당시의 톱스타 남정임이 출연했고 윤양하는 남정임의 상대 역이었다. 이 영화는 야녀와 양부모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었음으로 젊은 남배우의 영화 속 배역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윤양하는 퍽 인상적인 데뷔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영화계 제작 상황이 윤양하를 멜로물에 머물게 하지 않게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동남아 영화시장은 단연 일본과 홍콩의 검객물이 풍미했다. 일본은 가스 신따로를 내세운 <맹협 시리즈>를 , 홍콩은 왕우를 간판으로 한 <외팔이 시리즈>로 동남아 영화 흥행을 휩쓸었다. 이들 두 사람을 주연으로 한 검객물의 위세가 어떻게나 설쳤는디 마침내 가스 신따로와 왕우 두 검객 스타를 한 영화에 출연시킨 <맹협과 외팔이>란 영화를 만들어 동남아 극장가를 석권했고 한국에도 1969년 상영되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의 영화제작계도 검객물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검객물 붐이 일었다. 당시는 한국영화 전성기로 일년에 200편 이상의 영화를 쏟아냈다. 그래서 당시의 톱스타 남배우들은 멜로물의 겹치기 출연에도 숨이 벅차 검객물 출연은 외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격이 단단하고 검객물 주연 마스크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은 윤양하가 검객물의 히어로로 발탁된 것이다. 이런 영화계 사연으로 머리을 올려 상투로 묶고, 턱에 수염을 붙이고, 들짐승 가죽으로 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손에 든 한국의 검객 스타 윤양하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월하의 검>, <필살의 검>, <내장성 대복수> 등 20여 편의 검객물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검객물 붐이 쇠퇴하자 윤양하는 중후한 조연 배우로 토속물과 역사물, 액션물에서 새로운 연기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검객물에서 주연배우로 활약했지만 윤양하는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조연배우로서 다시 신인이 된 자세로 연기에 임했다. 토속물로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물레방아>, <씨받이> 역사물로 <악인의 계곡>, <30인의 여도적>, <오사까의 대부>, <카페리호 불청객> 멜로물로 <속눈썹이 긴 여자>, <복부인>, <겨울부인>, <설마가 사람잡네>, <흑녀> 문예물로 <갈매기떼>, <아제아제 바로아제>, 전쟁물로 <안케작전>, <아벤고 공수군단>, <일송정 푸른 솔은> 등을 들 수 있겠다. 1967년 데뷔 이래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지금도 현역 배우이다.



200여 편의 출연을 통한 연기 흐름을 볼 때 단연 토속물엣 윤양하의 연기는 빛났다. 특히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산 사내 역과 <씨받이>에서의 문중 종손 대를 잇게 하려는 시골 양반 배역은 분명 윤양하 연기의 대전환기를 보여 주었으나 이를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작품을 이어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윤양하는 본명이 윤병규(尹炳奎)로 1940년 5월 1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로이 장대한 대장부였고 어머니는 둥근 얼굴에 하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대가집 마님 스타일이었다. 체격은 아버지를 얼굴은 어머니를 이어받은 윤양하는 소년 시절부터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체격이 크고 힘이 셌다. 동네에선 대장이었다. 윤양하와 악수를 해본 사람은 느꼈겠지만 그의 손은 솥뚜껑처럼 두껍고 단단해 장력이 대단함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이 컸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은 전북 내륙지역 순창은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집에서 순창읍 버스 정류장을 운영했으니 집안 형편은 여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힘이 세며 특히 장력이 뛰어난 윤양하는 그 당시 시골에서 가장 인기있는 운동이 씨름을 했다. 중학교 때는 학교 안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씨름꾼이 되었고 순창농고 재학시절에는 군 단위 씨름대회에 출전, 어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순창에서는 고교시절부터 잘 생긴 씨름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장래 희망도 대한민국 제일의 장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꿈이 바뀌고 인생행로를 영화배우로 세웠다. 그때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에 이도령 역으로 주연했던 고향 선배 신귀식이 귀향했는데 순창읍이 떠들썩할 정도로 환영을 받았고 읍내는 신귀식을 보려는 사람들로 난리를 피웠다. 이 황홀난 광경을 목격한 윤양하는 씨름장사보다 더 인기있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 고향에서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선배 영화배우를 보고 윤양하는 자신도 배우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은 유도대학(현 용인대학교)으로 진학했다. 당시 유도대학은 서울 소공동에 있었는데 씨름선수였던 그였기에 유도 실력도 일취월장으로 늘었다. 스타에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유도에만 매달려 피나는 연습을 했다. 마침내 윤양하는 국가대표 선수로 뽑혔다. 중량급 선수로서 올림픽 출전 후보 선수로 선발되어 대망의 올림픽 출전을 눈앞에 두었으나 최종 선발에서 재일교포 선수 김의태에게 패배, 아깝게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 순간에 세계 제패의 꿈이 사라지자, 윤양하는 깊은 허탈감에 빠져 좌절했다. 그러나 좌절의 기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두 번째로 희망했던 배우에의 길을 두드렸다. 실의를 딛고 당시 충무로에 있었던 한국배우 전문학원에 입학했다. 4년제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개설되기 전에는 국내 유일의 배우 양성기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학원으로 신성일, 최지희, 김창세 등도 이 학원에서 수학했다. 원장은 김인걸(金仁杰)로 작고했지만 일본대학 연극과 출신이었다. 그 당시 이 학원에는 유현목, 김수용, 박상호 같은 당대의 유명감독들이 출강하고 있어서 윤양하는 이들 감독들의 이름을 보고 학원에 들어갔다. 
이 배우학원에서 김수용 감독을 만났고,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김 감독이 연출한 <빙점>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예술적인 열정과 사회적인 야망을 품고 살아가는 윤양하의 행동 반경은 배우라는 단순한 범주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더우기 술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고 사귀는 것을 천성적으로 즐긴 그는 사람 교제 범위가 다양하고 넓다. 영화계 뿐만 아니라 체육계, 기업, 법조계 등에 친교가 넓다. 그와 술을 한번이라도 마셔본 사람이라면 우선 그의 주량에 놀라고 압도당한다. 맥주, 소주, 양주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대량으로 마시면서도 분위기는 언제나 화기애애하게 이끄나. 어쩔 땐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만큼 친화력이 화려하다. 
윤양하는 1986년부터 88년까지 3년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그는 16개 영화사에게만 영화 제작권을 독점케 하는 영화법을 개정해서 제작자유화로 이끄는 영화운동을 온 몸으로 펼쳤다. 1986년 영화법 개정의 숨은 일꾼은 영화배우협회 회장 윤양하였다. 그는 두더쥐작전으로 영화법 개정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신문광고를 전격적으로 게재했다. 이 광고문이 영화법 개정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지금도 윤양하는 영화인협회 총회에서 논리적인 어법과 달변으로 영화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서 많은 영화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열정과 야망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로 이어진다. 그는 1996년 고향인 전북 순창.임실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첫 출마였다. 7명의 후보 중에서 2등했다. 그러나 한 명만 뽑는 선거에서 2등도 패배자였다. 차점으로 낙선했다. 
지금은 정계 진출의 꿈을 접고 체육계 활동에 열성을 쏟고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 유도협회 수석 부회장으로 있다. 유도 8단으로 1월 25일 유도인의 날 기념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유도협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명사회자로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고향인 순창에 청소년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전주대 교수로 있는 이장호 감독과 손을 잡고 수련원 부지에 영화촬영 세트장 건립을 추진중에 있다. 전주영화제 집행위원회 위원장은 이장호이고 부회장은 윤양하다.
가족으로는 이화여대 체육과 출신의 부인 서성미와 두 아들이 있다. 장남 윤세웅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영화배우가 되어서 이혁수 감독의 <클릭>과 김영한 감독의 <천사의 시> 두 편에 출연했다. 차남 윤태웅은 동원증권 아이스하키 팀의 주전 선수이고 국가대표이기도 하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윤병규

출 생 : 1940. 5. 1 전북 순창

학 력 : 용인대 유도학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데 뷔 : 1968년 김수용 감독 <빙 점>


주요 경력 :

한국영화배우협회 23,24대 회장 역임/ 현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 바르셀로나, 아틀란타 올림픽 한국유도대표팀 단장/ 현 대한유도회 수석 부회장 


수상경력 : 전남일보(1972) 신인상 / 호남일보(1973)남우조연상 등 다수

주요작품 : <빙점>, <시발점>, <필살의 검>, <임진란과 계월향>,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 23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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