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대근 - 배우 - 익살의 우람한 남성상...한국판 앤터니 퀸

by.김량삼(영화평론가) 2008-11-11조회 2,038

영화배우 이대근(李大根)이라면 흔히 <변강쇠>를 연상하기 일수이다. 그만큼 그의 우람한 몸과 익살스런 연기가 어필,35년째 연기를 하면서 대명사처럼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통 연극배우로서 60년대 초 <노틀담의 곱추>로 인기를 모았던 인물이라는 것은 전문가들 아니면 잘 모르는 역사. 연극이나 영화 모두 연기자라면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지만, 영화는 배우가 흥행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관에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막을 올리면 유난히 노심 초사한다. 사실 연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가 연극을 할 때는 흔히 말하는 학사 엘리트들이 풍미할 때 였다. 해가 지면 서울 사직동에 있던 대포집 '대머리집'에 들르는게 당시 문화 예술인들의 낭만이었다. 여기서 연극에 대한 품평 등이 나오곤 했는데 그가 주연한 <노틀담의 꼽추>의 미국영화 주역을 맡았던 앤터니 퀸 못지 않았다는 연기평과 함께 그의 걸죽한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앤터니 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나 할까.

연극을 걸쳐 TV탤런트를 경험하다가 영화에서 자리를 굳힌 이대근은 서울 태생이다. 능안리 라고도 불리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철저한 반공투사로 당시 반공청년단 단장. 그가 175센티의 82킬로가 되는 거구를 자랑하는 것도 타고난 것 일게다. 연극에 미쳤던 젊은이답게 그는 서라벌예대 출신이다. 연기자가 된 것은 63년. 졸업하자마자 이듬해에 KBS7기와 동시에 MBC개국으로 옮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영화에 데뷔한 것은 68년 최무룡 감독의 <제3지대>. 이후 지금까지 약 2백70 여 편에 출연해왔다. 그러니까 데뷔 35년째인 셈이다. 그의 출연작을 보면 대략 3∼4캐릭터로 분류할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이 어려웠던 시절에 제작에 만족해야 했던 '김두한'시리즈 5편의 액션물 주연및 74년부터 81년까지 무려 주연한 액션물 1백여 편이 첫째. 그런가하면 그에게 상복을 안겨준 토속물에서의 연기도 주류를 이룬다. 80년 대종상주연상을 안겨준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87년 역시 대종상 조연상을 받은 <감자> 한국일보 백상대상의 주연상을 수상한 <심봤다> 영화평론가상을 따낸 <> 등이 이들 작품.

여기에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장마>(1979) <거지왕 김춘삼>(1975,이혁수) <화려한 외출>(1977, 김수용) <연산군>(1987,이혁수) 등이 내노라할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대근을 일약 스타로 만든 작품은 <변강쇠>라고 단언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등장했을 당시인 86년. 제작자였던 고려영화사 사장 박태환씨는 우리의 고전 중 기막힌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바로 이 작품이 판소리로 유명한 「변강쇠뎐」.이를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었으나 오랜 현장 경험으로 인정받고 있던 엄종선 감독에 맡겨져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당초 엄감독은 이 영화를 작품이 지닌 특유의 해학과 섹슈얼 무브먼트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에 무척 고민했다. 이는 작품에 잘 나타난다.

주인공인 변강쇠 역의 이대근의 몸매가 거구임을 표현하기 위해 의상인 한복 속에 솜을 잔뜩 집어넣어 과장한 것이라든가 상대역이었던 옹녀 역의 원미경의 캐릭터를 요염의 극치로 표현한 것 등이 탈영화적이면서 풍자 짙게 만들어 관객의 호응을 얻어내는 계기가 됐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변강쇠의 섹스가 엄청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높은 절벽에서 그가 소변보는 장면을 풀커트로 표현하면서 소방차를 동원,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는 오줌 줄기로 표현한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한 것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가 대히트 하면서 이대근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바뀌었다. 당연히 속편 제작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대근이 아연 실색,주인공이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생각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 관리에 커다란 장애를 각져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다행히도 이후 방영하기 시작한 MBC TV 드라마 <설중매>의 홍윤성 역을 맡아 이미지를 다소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배역 역시 술을 독채 마시고 힘이 장사였던 것 이어서 거한의 인상을 지우기에는 쉽지 않았다. 정상급을 구가하는 엄청난 톱스타가 아니면서도 원미경 이미숙 강수연등 숱한 미녀스타들과 공연한 그도 이제 60세.(43.7.1)

그는 젊었을 당시의 이미지와 달리 지금은 서울에서 혼자 사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 82년 부인과 3딸이 미국에 이민, 고생 끝에 안정을 찾은 교포이기도 하다. 부인이 억척스럽게 워싱턴 시내의 공공기관의 구내매점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그곳 정문에 커다랗고 멋진 스토어를 경영하고 있다. 3딸 역시 효녀 중 효녀. 두 딸은 이미 박사가 되어 정부의 중책을 맡고 있고 막내딸은 대학 졸업반. 3딸 모두 중·고교는 물론 대학도 장학생이었다. 이대근 역시 워싱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부지런쟁이. 교포들의 희노애락은 물론 각종 문화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그의 집은 워싱턴에서 조금 떨어진 버지니아 주택가. 숲 속에 가려진 3층집으로 얼마 전 타계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을 왕래한 것도 몇 번만 합치면 5백 번이 된다고 한다.

뉴욕 케네디 공항을 경유해서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그에게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하도 자주 드나드니까 툭 하면 꼬치꼬치 캐묻는 게 당연한 일. 궁여지책 끝에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가 시비를 거는 공항 관리들에게 선사하며 자신이 한국의 톱스타라고 으시대곤 했는데 이게 먹혀들어 이제는 무사 통과라고 껄껄 웃어 제키기도 한다. 지난 1월말인가. 그를 만나러 간 세종문화회관 커피숍에서 있었던 일. 베이지색 반코트에 아무 치장 없이 나타난 그를 보자마자 여기저기 앉았던 여인들이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지를 않는가. 아직도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더니 역시 껄껄 웃고 만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85년부터 배우협회이사. 영화인 협회 부회장을 맡아 뒷바라지도 해온 이대근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하다. 얼마 전 히트한 송강호 주연의 <반칙왕>이 충무로에서 입에 오르내릴 때 그를 잘 아는 영화인들은 10여년전이라면 송강호 역할은 이대근이 적역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근은 본격적으로 레슬링을 한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우리배우들 중 레슬링을 한 인물을 꼽는다면 국회의원이기도한 신영균과 이대근일 것 같다. 우락부락한 이미지답지 않게 그는 성경을 주제로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고 슬며시 말하곤 한다.

이대근은 세상에서 연기만큼 좋은게 없단다. 일단 작품이 이뤄지면 돈도 가난도 미움도 아픔도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 최근 작품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 비록 주연작은 아니지만 아직도 영화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자체가 만족스럽다고. 이제까지 출연한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는 <김두한> 5편 모두와 <연산군>. TV에서 시작했으나 신상옥감독에 의해서 영화에 매력을 느껴 이제까지 사명감을 갖고 임해왔다는 그는 군생활에서 국립묘지 초대나팔수로 지냈던 만큼 자신을 헌신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지금까지는 훈련과정에 불과하다는 것. 앞으로는 <벤허> <나사렛 예수>와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연기자가 ,그것도 35년씩이나 연극 TV ,영화를 넘나들며 수백편씩 출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보통 인생들도 외길로 인생을 초지일관한다는 것은 산을 깍는것보다 어렵다는게 통례. 이대근의 면모를 보면 아직도 젊음이 펄펄 살아 넘치는 30-40 대의 느낌이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수 없는것인지 그의 자태에서도 언뜻언뜻 연륜을 읽을 수 있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그의 이 같은 느낌은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세태속에서 자기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아닐까. 요즈음 젊은이들이 너무도 쉽게 스타가 되거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을 보면 오랜 연륜과 인고의 자기 연마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 인가를 알 수 있겠다. 
김량삼(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43년 7월 1일 서울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졸업 
1968년 최무룡 감독 <제3지대>로 데뷔

<주요 경력>

연극 : <성웅 이순신>, <노틀담의 꼽추>, <고려인 떡쇠> 등 약20편
방송 : <갈대>, <거상 임상옥>, <조선총독부>, <수사반장> 등 500여 편
영화 : <김두한>, <거지왕 김춘삼>, <장마>, <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변강쇠>, <만날 때까지 > 등 300여 편

<수상 경력>

TV연기상, 인기상, 한국일보상, 영화평론가상, 대종상주연,조연상, 영화인협회표창장, 국제영화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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