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링컨 Young Mr. Lincoln 에서 출발하다 존 포드, 1939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4-02-28조회 10899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 Lincoln (1939)에서 출발하다

여행의 출발지는 1939년이다. 1917년에 시작되어 1966년까지 이어진 존 포드의 영화 이력의 중간쯤에 해당된다. 물론 첫 작품에서 출발해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무난하고 합리적인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망설여졌다. 향후의 모든 코스가 정해져 있는 여행은 뭔가 지루하지 않을까. 더 중요하게는 그 길은 우리가 경계하려 하는 진화론적 관점, 체계에의 유혹을 피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음 기착지를 알 수 없는 무작위의 여행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1939년이라는 연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 1939년인가. 단순한 이유 하나는 이 해에 세 편의 존 포드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중 두 편이 존 포드의 10 베스트 목록을 작성한다면 도저히 뺄 수 없는 걸작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중 한편은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며, 다른 한편은 비교(秘敎)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표현주의적’ 영화다. 한 해에 한 감독이 이 두 영화를 연이어 만들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 영화는 <역마차>와 <젊은 날의 링컨>이다. (또 다른 한편은 <모호크족의 북소리>다) 이 두 편만으로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될 자격이 있다. 1939년은 존 포드의 이력에서도 특별한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 1939년의 세 영화들

태그 갤러거는 약간 다른 의미로 1939년~1941년을 ‘영예의 시기’(prestige period)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7편의 영화는 모두 10개의 오스카상을 받았고(주로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덕이긴 하지만) 34번 후보에 올랐다. 뉴욕 비평가협회는 3년 연속 그를 최고의 감독으로 꼽았다. 존 포드는 명실상부한 할리우드 최고 감독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이 시기가 특별하다면 그것은 <역마차>와 <젊은 날의 링컨>이 이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존 포드를 만날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어떤 야유나 비하의 뜻도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라도, ‘나’라는 단독자와의 만남에는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본 건 20대 후반이었지만, 그를 ‘만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3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다른 이유 하나는, 최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변호인>이 75년 전에 만들어진 <젊은 날의 링컨>을 바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만든 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것과 유사한 선택을 한 과거의 영화들과의 대화 자리에 초대된다. 영화사의 정전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영화들과 대화하고 긴장하고 불화하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비밀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물론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위대한 예술이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아마도 그것의 영원한 동시대성에 있을 것이다.

오늘 말하려는 영화는 <젊은 날의 링컨>이다. 이 영화는 2013년의 한국영화 <변호인>과 마찬가지로 한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의 취사선택과 극적 디테일의 가미를 거쳐 하나의 영화적 허구를 구성했다. 나는 평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동시대인으로서 <변호인>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다른 지면에 썼다. (「씨네21」 942호 참조). 여기선 <변호인>의 표준적 선택에 비추어 <젊은 날의 링컨>의 특별한 선택의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두 영화는 외견상 공통점이 꽤 있다. 이는 주로 두 영화가 다루는 실제 인물의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링컨과 노무현은 모두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내세울 만한 학력을 얻지 못했으며, 개인적 재능과 노력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변호사를 거쳐 유명 정치인 및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자신의 국민들에게 단순한 존경 이상의 특별한 감정적 애호(혹은 격렬한 거부)의 대상이었으며,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젊은 날의 링컨>과 <변호인>은 많은 공통점을 지닌 두 인물의 변호사 시절, 그것도 그들이 변호를 담당한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기획의 유사성도 있다.

하지만 유사성은 여기까지다. <변호인>은 영웅설화의 오래된 표준 양식을 따른다. 여기서 영웅은 도덕적 진리의 예시자다. 갈등은 오직 그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놓여있을 뿐, 진리 자체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다. 해당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은 이 진리를 기준으로 취사선택된다. 존 포드가 말년에 만든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하라.”는 이 양식의 적절한 요약이다. 전설에 부합되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 이것이 <변호인>의 선택이다.

네 아들 (1928)

<젊은 날의 링컨>은 불가사의한 영화다. 앞에서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 영화엔 F. W. 무르나우에게 영감을 얻은 <네 아들>(1928)이나 <사형집행인의 집>(1928)과는 달리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이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전영화의 규칙과도 거의 무관하다. 어떤 범주화도 난감해지는 괴이한 영화가 뜻하지 않은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영웅설화를 구성하는 극적 사건과 결단의 행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사건과 행위에 포섭되지 않는 일화와 농담들, 표정과 몸짓들, 기운과 예감들, 그리고 빛과 음영과 풍경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잉여들이다. 반복해서 보면, 이 영화는 선형적으로 전개되기를 끝없이 망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달리 말하면, 잉여들이 살아 움직이며 극적 사건들의 전개를 끝없이 교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고전영화와 모던영화가 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은밀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링컨의 주의회 선거 연설

교전의 한 가운데 젊은 날의 링컨, 정확히 말하면 헨리 폰다라는 배우의 육체가 있다. 그는 긴 다리와 팔을 허공에 느리게 휘저으며 망설이듯 움직인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1832년 일리노이 주 샐럼 지역에서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보이는 동료에 의해 주의회 선거 후보로 소개된다. 동료가 네거티브 연설을 열심히 하는 동안 프레임 안에선 보이지 않던 링컨이 다음 장면에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걸어나와 소박한 연단에 선다. 기댈 곳을 잠시 잃은 것처럼 보이던 오른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연다.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에 실린 느리고 아주 짧은 연설. “...저는 전국은행(national bank)과 내부 증진 시스템과 테러 방지를 지지합니다. 이것이 저의 가치관이자 정치이론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정치적 신념의 소유자인지 잘 알 수 없을뿐더러, 그가 정말 정치가의 야심이 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이후로도 그가 망설이듯 움직일 때, 그가 가려는 곳에 가기를 정말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잘 알 수 없다. 그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언가가 그를 이끄는데 그것이 무언지 그도 모르고 그를 보는 우리도 알 수 없다. 한때 사랑한 여인 앤의 묘비 앞에서 그는 나뭇가지를 세워놓고 혼자 중얼거린다. “내 쪽으로 넘어지면 마을에 남고, 네 쪽으로 넘어지면 법 쪽으로 갈게” 나뭇가지는 묘비 쪽으로 넘어진다. 다시 혼잣말.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그리고 자문한다. “내가 네 쪽으로 살짝 민 걸까?”

수수께끼와도 같은 마지막 말을 기억해두면 좋겠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그의 의지가 정말 작용한 걸까. 이 질문은 대답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의문문으로만 남겨져야 한다. 이 인물에게 운명과 의지는 식별 불가능하다.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망설임과 움직임은 식별 불가능하다. 우리는 편리하게 운명의 편에 풍경과 시간을 두고, 의지의 편에 각성과 결단의 행위를 둠으로써 일련의 대립항 다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이 영화의 영원한 내적 교전을 도해(圖解)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의 도해야말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식별 불가능한 것은 식별 불가능한 것이다. 이 동어반복이 차라리 그 아름다움에 가까울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그것은 오프닝 크레딧 직후에 등장하는 시다. 젊은 링컨의 표현을 빌리면 “적게 말하고 많이 일하는” 어머니의 사무치는 물음들.

낸시 행크스가 귀신이 되어
사랑하던 아들을 찾으면서
내 아들 어디 있소?
그가 무슨 일을 했소?
내 아들에 대해 아시오?
키는 많이 컸나요?
재미있게 살았나요?
읽는 법은 배웠나요?
그가 마을로 갔나요?
그의 이름을 아나요?
성공했나요? 라고 물을 것이다

- 로즈마리 베넷
(낸시 행크스는 링컨의 어머니이며 그가 9살 때 죽었다)

혹은 이 시가 쓰인 화면 뒤에 어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이다. 혹은 그가 앤과 거닐던 강물이다. 어쩌면 강물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것은 귀신이 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말이며(극 중의 링컨은 이 시를 보지 못했고 보았다 해도 이것은 시인의 상상된 말이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옛 연인의 육체다. 극 중 등장인물의 말을 빌리면 젊은 링컨은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듯 강물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초반에 등장한다. 봄빛 가득한 강둑에서 빨강머리 처녀 앤은 링컨에게 법 공부를 권하며, 링컨은 그녀에게 구애의 말을 전하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떠난다. 미묘한 엇갈림. 강물이 그들 뒤로 고요히 흐른다. 그녀가 떠나자 링컨은 조약돌을 강물에 던지고, 강물에는 작은 동심원이 인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장면은 적막하고 충격적이다. 강물에는 험상궂은 얼음이 떠다니며 들판에는 눈이 덮여있다. 털모자를 뒤집어쓴 링컨은 꽃을 들고 앤의 묘비를 찾는다. 그 사이에 5년이 지났고 그녀는 죽은 것이다.

존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몽타주다. 링컨이 돌을 던진 행위와 얼음투성이로 변한 강물 그리고 앤의 죽음 사이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돌을 던진다는 우발적이고 사소한 행위 ‘바로 다음에’ 그 행위에 대답하듯 가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영화에서 무언가가 ‘바로 다음에’ 그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엄중하며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그것은 벌어졌으며 되돌릴 수 없다. 의지와 행위가 개입할 수 없는 장대하고 고요한 흐름, 우리가 보통 운명 혹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압도적 표정이 그 순간 섬광처럼 스쳐 간다. 어쩔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역량 앞에서 젊은 링컨은 지금 나뭇가지로 운명과 의지의 식별 불가능성을 유희하고 있다.

헨리 폰다의 육체는 망설이듯 움직이고 <젊은 날의 링컨>은 주춤거리듯 진행한다. 그 망설임과 주춤거림의 시간 사이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음성, 앤의 그림자, 강물의 침묵과 변덕의 아름다운 흐름, 그리고 경박한 유머, 덧없지만 생동하는 행위들과 몸짓들이 활동하고, 영웅설화적 사건과 진리의 발화들과 행위들, 숭고한 소명과 고결한 의지가 그들과 몸을 섞고 수시로 서로 자리를 바꾸며 소란스럽고 더럽고 아름답고 고요한 음악이 된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젊은 링컨의 용기와 지혜만큼이나 그의 반칙(줄다리기 시합에서의)과 야비한 유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의 링컨>은 소명과 의지의 송가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훼손하거나 따돌리는 오점과 얼룩들의 난장이며, 그들 모두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음성과 죽음과 풍경의 노래다. 그들의 소란스런 화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와 전설은 진리의 언명에 순종하는 정태(靜態)의 구조이지만, <젊은 날의 링컨>은 흐르고 번잡하고 활동하는 삶의 시학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젊은 날의 링컨>을 보고 뭔가 써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런 영화는 권위 있는 최종적 견해라는 걸 도무지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전문가도 보지 못한 걸 당신이 볼 수 있으며 어떤 전문가도 쓰지 못한 것을 쓸 수 있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The Man and His Movies」(1986)을 2006년에 고쳐 쓰면서 “<젊은 날의 링컨>을 지금까지 50번 넘게 봤지만, 아직도 새롭게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미학적 시대적 범주화도 초라하게 만드는 <젊은 날의 링컨>을 말하면서 산만한 도취가 아니라 뭔가 정리된 언어들로 끝맺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번잡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몇 마디 말을 덧붙여보자. 지난 회에 서부극에는 인물의 사적 시간, 역사적 시간, 풍경의 시간이 교차하며, 그것은 존 포드의 영화에서 잘 구현된다고 썼다. 그리고 존 포드의 비서부극조차 서부극적이라고도 썼다. 나는 비서부극인 <젊은 날의 링컨>에 대한 위에서의 어수선한 찬미만으로 이 말들이 약간은 설명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앞으로 다른 존 포드의 영화를 말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할 생각이다.

물론 여기서 역사적 시간은 여전히 애매한 말이며, 나는 어느 정도 수사학적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을 포기하긴 힘들다. 역사적 시간은 우리에게 이미 구현되고 알려진 시간이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는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그 시간은 거의 운명과 유사한 무게의 그림자가 된다. 우리는 알지만 그는 아직 모르고 있는 어떤 종말을 향해 그는 걸어간다. 알고 있는 우리 앞에 모르는 그가 걸어간다. 전기 영화에서 그리고 서부극처럼 역사적 소재를 극화한 허구의 서사에서 역사적 시간은 우리의 지식과 영웅의 무지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것은 불안한 공기처럼 인물을 감싼 채 떠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젊은 날의 링컨>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를 아름답게 시각화한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는 사건을 훌륭하게 영웅적으로 해결했는데도 웃지 않는다. 젊은 링컨이 구름 낀 언덕을 천천히 걸어가 프레임에서 빠져나가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표정, 먹구름과 비가 미래의 비극에 대한 암시라는 수사학적 해석은 명쾌하지만, 이 장면의 물질성을 말하진 못한다. 그것은 미래의 암시 이전에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의 곁에서 흐르는 이미지다. 역사가 기입된 허구 안에서 역사적 시간은 텍스트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활동하는 이미지다. <젊은 날의 링컨>은 역사적 시간의 이미지에 관한 한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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