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2-11-05조회 23,443

이렇게 서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1986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에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나는 이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 날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차가웠다. 막 겨울이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인터뷰로만 이루어진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해 여름 <티켓>을 완성하였고, 남산에 자리한 영화진흥공사의 지하 이층에 세워놓은 세트장에서 <씨받이>를 촬영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도 기억할 수 있다. 영화진흥공사 바로 옆에는 난다랑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남산에서 약속을 하면 대부분 거기서 만났다. 아침 열시에 처음 뵈었다. 내가 시간에 늦지는 않았지만 감독님이 먼저 나와 계셨다. 하지만 첫 인상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창가 옆자리에 앉아계셨다. 당신께서는 아직 내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나는 남산 길을 올라가면서 거의 암송하듯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외웠지만 정작 그 분 앞에 앉았을 때 횡설수설하듯이 말해버리고 말았다. 임권택 감독님은 말씀이 적지만 그때는 더 그러했다. 그냥 나를 쳐다보았다. 막 시작된 아침 겨울 햇살이 커피 잔에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빛이 언제나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들은 다음, 어쩌면 그저 내가 그렇게 느꼈을 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설명을 하고 난 다음, 임권택 감독님은 내게 그냥 던지듯이 물었다. “내게 무어 들을 이야기가 있소?” 나는 이 말 뜻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찍은 한국 영화감독. 여기서 모든 것이 방점이다. 83편이라는 그 두께. 한국이라는 영화산업 안에서 1962년에 데뷔한 다음 그는 그 영화들을 찍으면서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시작한 대부분의 감독들이 이미 현장을 떠난 지 한참인 다음에도 그는 영화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리고 만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제작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학교로 갔으며, 누군가는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연출하였다. 이십여 년에 걸친 한국영화산업의 역사. 황금시대와 1972년 이후의 몰락. 흥행의 시대가 끝나자 시작된 검열의 역사. 텔레비전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대중오락.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어린 나를 바라보면서 당신이 이 영화들을, 이 영화들에 담긴 세월을, 이 세월 속의 삶을, 이 삶으로부터 나온 매 쇼트의 결단을, 정말 귀 기울여 들어볼 수 있겠냐, 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약간 망설인 다음 대답했다. “배우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것만이 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내 마음 속에 염두에 둔 책은 프랑소와 트뤼포가 1962년 6월 2일 첫 편지를 쓴 다음 그 해 8월 13일 월요일부터 6일간 유니버셜 스튜디오 146호 방갈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계속된 알프레드 힛치콕과의 인터뷰를 담은 <알프레드 힛치콕(Le Salon Alfred Hitchcock)>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영화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배움. 하나는 영화라는 비밀을 알기 위해서 동원된 인터뷰라는 방법이 사실상 최상의 비평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화를 본다는 문제란 결국 질문을 던진다, 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능력(들) 사이의 (말 그대로의)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설명하는 표현, 함축하는 표현. 그 둘 사이의 활동으로서의 영화. 우리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트뤼포는 힛치콕에게 단지 미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질문에서 멈추지 않았다. 종종 질문은 대답보다 흥미로웠고, 때로는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혹은 질문이 때로 예상치 않은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많은 질문과 대답들은 차라리 행간을 읽어야만 했다. 그 둘 사이의 질문과 대답은 존경과 사랑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질문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힛치콕에게 자기가 그의 영화에서 ‘발견’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읽혔고, 어떤 질문은 마치 수줍은 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마치 영화를 손끝으로 건드리듯이 만져보는 듯, 정확하게 그렇게 설명할 때, 영화를 애무하듯이 느껴볼 때, 그 마음이 질문 속에 담겨서 전달될 때, 그건 내게 마치 마법처럼 보였다.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정면으로만 응시하지 않았다. 가끔은 프레임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다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을 쳐다보느라 놓쳤을만한 흔적들을 끌어냈다. 혹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클로즈업을 문득 끌어내기도 하였다. 명백하게 그는 수십 번을 맹목적으로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관찰.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는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 화면들. 트뤼포는 정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배움의 기호를 찾고 있었다. 영화라는 고유한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법칙들. 어떻게 저 기호들은 다른 영화에서는 작동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힛치콕의 영화에서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일까. 몇 번이고 다시 본 다음 매번 수수께끼 앞에서 난처하게 질문을 던지고 다시 던진 다음 마침내 그 마술을 만들어낸 사람 앞에 도착하여 참지 못하고 제발 그 비밀을 풀어주세요, 라는 간절한 하소연. (그의 스승이었던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누가 이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어줄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랑에 빠져본 사람만이 느껴볼 수 있는 그 영화적 신호들에 대한 놀랄 만큼 예민한 반응.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보고 또 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다. 영화를 두 번 볼 때 우리는 첫 번째 볼 때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건 단지 음미의 차원이 아니다. 트뤼포의 질문이 내게 가장 큰 쇼크를 준 순간은 영화에 단 하나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을 주는 질문을 던질 때였다. 한 사람이 이것을 볼 때 다른 사람은 저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 여기서 멈출 때 다른 누군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음 쇼트를 그 안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트뤼포는 처음에는 내가 그 영화를 본다, 라고 시작한 다음 그 영화가 나를 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영화가 내가 보는 것을 안다고 느껴볼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비평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트뤼포는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트뤼포는 자기를 보는 영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사랑의 시선. 시선의 교환. 트뤼포의 질문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배우고 싶었다. 이 책을 둘러싼 나의 아주 사적인 배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게다가 이 책의 일본판을 번역한 사람은 아아, ‘일본 제일의 영화광’이라고 불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두 사람, 하스미 시게히코와 야마다 고우이치였다. (이 책은 <힛치콕, 映畵術> 이라는 제목으로 ‘키네마 준보’에 일부 번역된 다음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 책의 초판본이다) 야마다 고우이치는 번역을 끝낸 다음 후기에서 “이 책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입법전서이다. 매번의 질문은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불러도 좋다. 매번의 대답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영화와 만나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뵙고, 그 분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을 때. 대답을 듣고자 했을 때, 그건 나에게 배움의 실천이었다. 나는 이 배움 속에서 내 방식으로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수백 번, 수천 번 던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수백 번, 수천 번,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대답. 여기에는 약간의 이야기를 더해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준비할 때에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영화 평을 거의 볼 수 없었으며, 그에 관한 작가론을 단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세상의 무관심.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로부터의 일정한 거리. 여전히 그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개봉관에서 볼 수 없었다. 혹은 아주 짧은 시간만 영화관에 간판이 걸려있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종종 시내 중심가로부터 외곽에 자리한 한적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재개봉관에서 개봉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신궁>을 보기 위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리고 그런 다음 그 ‘이후’ 다시는 가보지 못한) 극장을 찾아 내가 살던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뚝섬까지 가야만 했다. 물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울 지리의 감각을 익힌 것은 그때 영화를 찾아 처음 타보는 노선의 버스에 몸을 싣고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을 헤매면서 두리번거리던 경험의 결과이다. 어떤 네비게이션도 없었다. 그저 동네를 기웃거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수없이 물어보면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때 제작사들은 야비하게도 외화 수입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한국영화를 만들었으며, 그런 다음 그 영화를 버릴 때 그런 방식을 취했다. 비평의 차가운 외면. 그때 그 영화들을 아무도 방어하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들은 외롭게 만들어졌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충무로에서는 그를 직업감독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미 <만다라>를 만들었고, 그런 다음 <길소뜸>과 <티켓>을 만들었지만 비평은 그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한국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있었다.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하지만 1986년의 일이다.


나는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열심히 보았다. 프랑스문화원에서 매달 프로그램으로 상영되는 영화들을 단 한 편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일본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물론 나는 아직 많은 영화를 보아야 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었다. 아직 시네마테크도 없었다. 어쩌면 영화보다도 영화에 관한 책을 더 많이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를 가로 막고 나선 것은 한국영화였다. 내가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문제에 대해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가서였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나 혼자 읽는 글이었다. 매일 본 영화를 쓰고 또 보고 또 썼다. 그러기위해서 나는 참고문헌을 가져야 했다. 문학 비평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논쟁이 중심에 있었다.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내게 한국영화란 무엇인가, 로 번역되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김기영의 <이어도>, 유현목의 <>, 하길종의 <한네의 승천>, 이장호의 <어제내린 비>,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 나는 두서없이 때로는 막 개봉했을 때, 혹은 재개봉으로 상영되었을 때, 종종 동시상영으로 이 영화들을 대부분 프린트에 (스크래치로 인하여) ‘비가 내리는’ 상태에서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늦봄 이른 아침 학교 앞 극장에서 <족보>와 마주쳤다. 누구에게나 어떤 영화를 보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순간과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각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쇼크 상태. 아마도 그 목록은 모든 시네필들에게 각자 개인의 ‘은밀한’ 명단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화를 언제 어떻게 만났느냐에 따라 완전하게 다르게 당신을 일깨워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영화들의 명단이 있다. <족보>는 내게 그런 영화(중의 하나)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林權澤’(그때에는 포스터에도, 영화 자막에도 모두들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였다) 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이전 영화들을 이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쇼브라더즈 무협영화를 보면서 감독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족보>는 줄거리가 특별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와 비슷한 줄거리의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시대를 다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자란 세대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어떤 순간부터 이 영화의 진행은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들과 완전히 다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씬들은 이제까지 내가 읽은 책의 일부분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 그 쇼트들의 리듬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우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 구석구석 자리 잡은 통일성과 이상할 정도로 균형을 잡은 감각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을 나는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의 수수께끼. 트뤼포를 경유하여 바쟁의 말에 기댄다면 상형문자. 무엇이 나를 이렇게 민감하게 만들었을까. 대답을 해야 한다. 나는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면서 다음 영화를 기다렸다. 그때부터 나는 ‘林權澤’이라는 이름을 찾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 영화들을 모두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라고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어떤 영화는 훌륭했고(<짝코>), 어떤 영화는 나빴다(<내일 또 내일>). 유감스럽게 나는 <만다라>를 개봉했을 때 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고. 대신 전쟁영화인 <아벤고 공수군단>을 보았다. 이 영화는 지루했다. 제대한 다음 다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순서대로 쫓아갈 수 있었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길소뜸>은 굉장하다, 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영화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만일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안에 담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건 한국영화라는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앎에 대한) 은밀한 열망이 있었다. 

물론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에서 기대한 것은 영화의 개념(들)이 아니었다. 그건 이미 책으로 충분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개념들이 실제로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이것이 저것과 접속하고, 그 안에서 반대로 개념들에 영화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며,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개념이 만나는 불안의 조건이 무엇이며, 이 모든 각각의 요소들을 정의내리는 대신 그 용어 바깥에서 명령하는 날씨와, 세트와, 배우라는 몸과, 그 몸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와, 그 몸의 제스처와, 활동과, 종종 순환을 중단시키는 카메라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결정 사이의 블랙홀, 말하자면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불연속성으로 귀결 지어지는 비평과 현장 사이의 절망적인 중단을 다시 매듭짓고 싶었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임의적으로 모인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나는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라바이를 만들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기꺼이 개념(들)과 영화 사이의 비대칭의 대결 속에서 이념들로 이루어진 개념을 버리고 활동 중인 영화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영화에 관한 진정한 감각이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 놓여진 것이다, 라는 롯셀리니의 말. 그냥 단 한 마디로 이 개념들의 피와 살을 알고 싶었다. 

트뤼포는 인터뷰를 위해서 벨기에 시네마테크에서 힛치콕의 영국시절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나는 트뤼포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그 당시 한국영화들을 보관한 곳은 한국필름보관소였고, (1991년 9월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한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이 된 2002년에서야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기억 속에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고백하자면 심지어 이 영화들 중의 일부는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 중에 아, 내가 그때 본 그 영화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였구나, 라고 알게 된 제목들도 있었다. 인터넷은 아직 인류 문명에 도착하지 않았고, 모든 자료는 하나씩 국회도서관에 가서 찾아야 했으며, 일일이 필름으로 보관된 신문기사들을 뒤져야만 했다. 게다가 그때 나는 아직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대부분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전적으로 내 나이의 한계 때문이다. 내가 무슨 재주로 (아직)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에 만들어진 그 영화들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혹은 보았다 하더라도 그걸 인터뷰로 질문을 해낼 만큼 기억해낼 수 있을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발견의 방법론을 경유하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질문이 내 안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다. 질문이 다시 영화 안에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인터뷰가 그렇게 전면적인 상황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질문은 저 아래까지, 일제 식민지 강점하를 거쳐서 조선시대 말기 그 어딘가에 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전라남도 장성이라는 지리적 장소가 가져온 한국 근대사 안의 역사적 맥락. 한국전쟁은 그 장소를 찾아온 다음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는 오로지 자기 육신 안에서 이 모든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런 다음 그 시간이 끝나지 않고 그의 영화 속에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의 영화 속의 시간은 경험의 시간이자 역사의 시간이었다. 시간의 다발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은 세상 속을 어슬렁거린다. 그는 종종 인터뷰 중에 탄식을 하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낭비했어요. 그저 어떤 삶의 목표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나 영화는 그 시간들을 차례로 쌓아나갔다. 그런 다음 우리를 되찾은 시간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이 시간들 사이의 복잡한 기호들에 관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 자신이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그 시간 안에 있는 진실. 내가 비로소 알게 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종종 어느 순간부터 한국근대사에 대해서 말하거나, 혹은 지난 50년간에 걸친 한국영화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는 과정은 번번이 잃어버린 시간 안으로 들어와 길을 잃어버린 다음 이러 저리 그 선을 따라 나가면 그 시간을 되찾는 장소에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물론 첫 번째 인터뷰는 <씨받이>에서 끝났지만 그 ‘이후’ 임권택 감독님은 계속 영화를 만들었고 나도 계속 그 영화들을 쫓아갔다. 발걸음은 늦어졌지만 그 보폭은 점점 멀어지고 깊어졌다. 이를테면 <아다다>를 만들고 난 다음 갑자기 <개벽>으로 점핑했을 때의 아득함. 혹은 <창, 노는계집>을 찍고 난 다음 갑자기 <춘향뎐>으로 넘어왔을 때의 망연자실함. 종종 선이 끊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조차 있었다. 혹은 내가 붙잡은 선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보게 되었다. 매번 영화 앞에서 이쪽인가, 저쪽인가를 망설여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대답을 하는 대신 다음 영화를 만들었다. 항상 영화가 끝났을 때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다. 한 편의 영화 안에 놓여진 하나의 세계. 가능한 세계. 그 세계 안의 무한한 가능성. 그때 나는 무엇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2002년에 진행된 두 번째 인터뷰는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영상자료원은 기꺼이 내가 놓친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많은 영화들이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비디오로 출시되었고, 이제 막 DVD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영화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영화들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저 차라리 잘 없어졌다, 는 말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도 세 편의 영화가 더 만들어졌다. <하류인생>과 <천년학>, 그리고 <달빛 길어 올리기>. 나는 이미 이 세 편의 영화에 대한 인터뷰를 모두 마친 상태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계속해서 이 인터뷰의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핑계는 금방 임권택 감독님이 102번째 영화 촬영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오랜 시간 망설여왔던 결정을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에는 내 질문을 잘 알지 못했다. 내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리스 블랑쇼로부터의 배움 덕분이다. 나는 이제까지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대답을 얻고 싶어 했다. 블랑쇼는 질문을 바꾸었다.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그 말을 영화에로 끌어당겼다. 영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때 영화적 경험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남겨둔 채 그것이 하나의 텍스트라는 윤곽만을 망각해버린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거기에 온전히 남아있는 영화적인 경험의 순간들. 비평은 시선의 결단을 내려야한다. 어떤? 그것을 간신히 유지시키고 있는 윤곽을 지워버리기. 나는 완성에 대한 근심을 잊어버릴 생각이다. 그 대신 오로지 내가 경험한 영화적 공간 안에서 어떤 매개도 없이 찢겨져 나간 영화와 인터뷰 사이의 두 세계를 점핑할 것이다. 나의 기투(Entwurft)라는 모험. 나는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비평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출현하였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그 영화의 가능한 세계를 체험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일 이때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면 우리는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만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우리들은 매번 새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이제까지 대답을 찾았다. 지금부터는 다시 질문을 생각할 차례이다. 좋은 질문.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패를 겁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마치 만난 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하나씩 다시 볼 것이다. 그런 다음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이것은 전체의 긍정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 모두를 긍정하기. 이때 나는 영화가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질문하는 장소에서 시작할 것이다. 

자,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모든 영화를 다시 본 다음 다시 쓴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한국영상자료원의 도움 덕분이다. 어쩌면 이 글은 그들과 함께 쓰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을 생각이다. 매번 마치 그 영화를 어제 본 것처럼 다시 본 다음 다시 쓸 것이다. 이미 이전에 그 영화에 대해서 쓴 글을 (가끔 참고는 하겠지만)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종종 과거의 영화들에 대해서 어떤 비평은 기억에 의존할 때가 있다. 나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런 경우 영화와 기억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쓴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번 그 영화를 내 앞에 다시 불러 세운 다음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대로 미래의 비평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본 다음 그 영화를 생각할 때 그 사유는 미래의 종합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로 개방하기. 이때 세 개의 시간을 나는 하나의 자리에서 모으게 될 것이다. 이미 본 영화. 다시 보는 영화. 이미 경험한 영화, 다시 경험하는 시청각 기호들. 그 안에 담겨있을 매번의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 영화와 비평 사이의 선험적 경험주의. 나는 영화가 창조의 장소이며, 매번 새로운 가능성이 활동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되돌아왔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장소가 매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예술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쉽게도 나는 101편의 영화를 모두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영화는 모두 76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4편의 영화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영화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쟁과 노인>(1962), <남자는 안 팔려>(1963년), <신문고>(1963년), <단장록>, <욕망의 결산>, <십자매 선생>, <단골지각생>, <영화마마>, (모두 1964년) <빗속에 지다>, <왕과 상노> (1965년), <닐니리>(1966년), <청사초롱>, <망향천리>(모두 1967년), <돌아온 왼손잡이>(1968년), <상해탈출>, <비 나리는 고모령>(모두 1969년), <이슬 맞은 백일홍>, <비 나리는 선창가>, <밤차로 온 사나이>, <비검> (모두 1970년),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요검> (모두 1971년), <대추격>, <잡초> (모두 1972년). 그 중에서도 가장 분한 것은 (임권택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 경력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라고 말한) <잡초>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줄거리를 읽은 다음 이 영화를 처음부터 왠지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기억이 분명치 않다.

 
 
두 번째, 나는 이 영화들을 연대기 순으로 써나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쪽에서의 이유이다. 나는 이 비평을 통해서 전기를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트뤼포에게서 배운 것은 각 영화들을 그 자체로 존재케 하라, 는 것이었다. 차라리 전략이라고나 할까.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를 과도하게 과장할 생각이 없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영화들조차 서로 다른 영화사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서로 다른 배우들로 만들어졌을 때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종 비평 담론들은 이들 영화 사이를 마치 친족관계처럼 설명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이건 비평의 관습일지도 모른다. 종종 하나의 이름 아래 규칙을 통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69년은 1971년이 아니다. 혹은 1978년은 1980년이 아니다. 이 연도를 잘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는 그런 손쉬운 방법을 피하고 싶었다. 나는 연재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방식으로 묶여있는 관계를 차례로 풀어낸 다음 나는 이들을 다시 배치시킬 모델을 찾아낼 생각이다. 서로 상이한 영역. 서로 다른 과정의 형성들. 나는 한 편의 영화가 매번 매우 복잡하고 상이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단조로운 등질관계 아래 놓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균형 잡힌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영화는 각자의 창문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창문으로 각자의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건 집합이 아니라 분산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내게 어떤 영화가 임권택 영화 중의 최고냐고 물어보지 말길 바란다. 여기서는 어떤 영화가 어떤 영화보다 우월하거나 반대로 열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각각의 영화들의 존재방식을 물어볼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자신이 예술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일 때 거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무조건적이자 절대적인 차이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그 존재에 대해 우리가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각자의 힘. 각자의 아름다움. 다만 여기에 두 가지 원칙은 세웠다. 하나는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맨 먼저 쓴 다음 두 번째 영화는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쓴다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고정점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자신의 101번째 영화를 가리켜 “나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불렀다. 나는 맨 먼저 두 편의 데뷔작을 다룰 생각이다. 다만 뒤의 것을 먼저 다룰 생각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이라는 별자리 안에서 어떻게 각각의 영화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지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아직 순서를 정하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순서를 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 연재를 진행하는 도중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면 (아마도) 그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그러나 이 모든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약간의 우회를 할 생각이다. 혹은 비평의 변주라고나 할까.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그 영화에 대해서 누군가를 초대하여 토크를 하거나 혹은 라운드 테이블의 형식을 취할 생각이다. 나는 더 많은 친구들이 이 영화들을 환대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나의 배움은 여러 가지 전술들을 동원하여 진행될 것이다. 어떻게 그 영화와 마주칠 것인가. 어떻게 그 영화를 껴안을 것인가. 어떻게 거기서 배움을 끌어낼 것인가.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노력 속에서 내가 끌어내고 싶은 것은 말 그대로 배움의 기쁨이다. 

다소 길지만 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중국 옛말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화북지방에 북산우공(北山愚公)이라 불리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이 남쪽으로 나 있었는데 태행산과 왕옥산이라는 두 큰 산이 그 출로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의 아들들을 불러 괭이를 들리고 이 큰 산에 가 산을 파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지수(智?, 지혜로운 늙은이)라 불리는 다른 노인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당신들은 참으로 멍청하구려, 당신 부자 몇 사람이 큰 산 두 개를 옮기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공이 대답하길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고, 자자손손은 끝이 없습니다, 이 두 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다시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닐진대 조금씩, 조금씩 파헤치면 어찌 평평해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옥황상제가 이에 감동하여 두 신선을 내려 보내 두 산을 지고 가게 했습니다” 나는 하나씩 써나갈 것이다. 내 결심. 하여튼 누군가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례로 써나갈 것이다. 대장정. 물론 신선을 기다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그러면 누군가는 또 다른 평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씩 모이면 모든 한국영화들은 각자 자기 자신에 관한 각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한국영화 편수와 동일한 숫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둘 사이의 우정을 생각한다. 어떤 영화도 외로우면 안 된다. 어떤 영화는 운 좋게 두 편, 혹은 세 편, 어쩌면 열 편, 아니면 훨씬 그 이상의 친구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어떤 영화들은 단 한 명의 친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그날처럼 11월 둘째 주 화요일이다.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나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두 번의 시작. 그리고 두 번째 시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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