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 봉준호, 임권택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①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4-09-23조회 48,316
 
“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봉준호, 임권택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이렇게 말을 꺼내들고 싶다. 봉준호는 CJ가 아니다.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봉준호는 홍상수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읽었다면 당신은 내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점점 CJ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대중적 흥행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엉성하게?) 작성된 매뉴얼을 검토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일은 이야기를 만든 다음 그게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물러나서 남은 인상만을 가지고 엉성하게 (정교하게?) 그려낸 재빠른 스케치를 약간 아슬아슬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봉준호가 영화 제작에 돌입할 때 장르를 다루는 것인지,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인지 약간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종종 영화 앞에서 그가 만들어놓은 콘티가 영화를 보는 내게는 매뉴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일사불란한 영화적인 기계 기호들의 운동. (<살인의 추억>) 일단 시작되면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쇼트들의 접합과 그 안의 변화. (<설국열차>) 그러나 그 도표는 대중적 흥행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마더>) 이때 그의 매뉴얼은 그 자신의 매우 사적인 영화(歷)사의 (그 자신에게만) 명장면에 관한 다소 기형적인, 어쩌면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변태적으로 구부러트린 집합처럼 보인다. (<괴물>) 그게 일정한 순열로 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것처럼 보이는 리듬 사이에서 삑사리의 순간들이 섬광처럼 나타날 때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집합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고 싶게 만든다.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의 영화는 매번 그 안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는 (그래서 여전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분리된 또 하나의 집합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둘 사이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지만 그렇게 연쇄망을 이루는 그 고리를 따라 가다보면 어떤 집합들은 중심과 완전히 공집합을 이룬 채 영화 안에서 마치 독립변수처럼 활동하는 쇼트를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잉여의 공집합은 잘 눈에 띄지 않은 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마더>에서의 나무. 아마도 21세기 한국영화에서 가장 불길하고 아름다운 나무.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른 ‘마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홀로 서서 마치 우주의 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나무. 그 나무를 하나의 점으로 하여 이미지가 회전을 시작할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건을 기다리는 사건이라는 간접화법의 (미처 닫히지 않은) 원을 그려내는 운동이다.
 


<마더>
 
그 다음. 홍상수와의 대차대조표. 먼저 순열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종종 홍상수를 말하기 위해서 시간을 말하지만 그건 차라리 등식으로 이루어진 순열과 집합의 게임이다. 숫자가 매겨진 영화들. <오! 수정>, <생활의 발견>. 그리고 <옥희의 영화>. 만일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른다면 오로지 그것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의 머릿속에서 순열의 조립 과정을 따라 벌어진 거짓 운동일 것이다. 그 안에서 이제 어떻게 접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가.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정렬될 수 없는 변수들은 어떻게 셈할 것인가. 이번에는 더할 수 없이 마치 조각조각 찢어버리듯이 변수를 나누(고 나서 뒤섞)었다. <자유의 언덕>. 13개로 이루어진 편지. 나는 여기서 뒤섞는다기보다는 무언가 매번 고통스럽게 씬 사이를, 그 사이 안의 쇼트를, 찢어버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다음 아마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하나, 혹은 둘을 더하거나 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그런 다음 거기서 잃어버린 편지 한 장을 셈해야 한다. 무엇이 무엇에 귀속되는가. 거기서 무엇이 무엇 앞에 있는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홍상수가 (그 스스로의 예술적 스승이라고 부른) 세잔에게서 배운 것은 그 순간의 균형 감각이다. 순열 사이의 균형. 집합의 균형. 그 안의 정지 감각(의 균형). 그 어느 그림보다도 나는 세잔이 1890년에 시작해서 이 년간 매달린 두 점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 그 배움을 본다. (이상할 정도로 홍상수가 사람을 세워놓을 때 이와 비슷해지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그때 그것이 하나의 집합이 된다는 것 말고는 그 안의 대상들 사이의 운동을 분별하기 힘들어진다. 심지어 점점 그렇다. 그래서 희미해져가는 것을 누군가는 셈해보고 싶어 하지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그때 꿈은 유리한 알리바이이다. 반대로 봉준호는 일단 시작하면 되돌아가는 법이 없다. 도미노처럼 처음 하나만 쓰러지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차례로 쓰러져간다. 마치 사연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시작하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간다. 하지만 이 운동이 괴상해지는 것은 그게 사방팔방으로 쓰러져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걸 붙잡으러 뛰어가는 인물의 동선조차 자기가 쫓아가는 게 누구인지 몰라 여기저기를 뒤지기만 할 뿐이다. 잃어버린 동선. (<살인의 추억>)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산만하게 보인다. 영화가 시작한 지 55분 만에 풍비박산 나듯이 흩어지는 가족들이라는 점들. 그 점이 만들어내는 동선. (<괴물>) 혹은 찾아갈수록 점점 자기가 붙잡으려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진다. (<마더>) 심지어 모두가 한 열차에 타서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갈 때조차 그렇다. (<설국열차>) 이때 그는 직선을 온갖 방법을 써서 곡선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진행되는 운동에 대한 가장 명징한 이미지는 직선으로 달려가는 열차가 철로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할 때 거의 절반처럼 거의 접히다시피 하면서 맞은 편 열차 칸에서 형 프랑코가 절반의 이쪽 칸의 남궁민수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다. 직선 속의 곡선. 선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유기체와도 같은 하나. 수많은 형태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직선이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하나로 수렴하는 점. 개. 시체가 발견되었던 구멍, 괴물, ‘마더’. 엔진. 잠깐!
 



나는 빨리 임권택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원래의 자리. 처음 이 자리에 봉준호를 초대했을 때 나는 둘 사이의 도표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릴 것이다. 모든 영화감독(들)은 동시에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영화(歷)사의 감독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개의 역사 사이의 교차로를 찾을 것이며, 그러는 동안 나를 따돌리고 그 사거리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매번 또 다른 교통의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옮겨 탈 것이며 또 누군가는 거기서 내릴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서로에게 이어질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임권택 감독님이 봉준호(의 서로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사적인 자리에서 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므로 그걸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번에는 반대로 듣고 싶었다. 물론 내가 여기서 청해 들으려는 것은 (그 뻔한) 의례적인 존경과 찬사가 아니다. 그 둘은 어디서 서로를 지나쳐 간 것일까. 우발적인 만남. 아마도 그 사이에 얽혀들게 될 한국영화사. 물론 봉준호의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이름은 김기영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자주) 말을 했고 구태여 그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는 <마더>를 보는 내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자주 떠올린 것은 <붉은 살의>의 이마무라 쇼헤이였다) 나는 여기서 무리를 해가면서 임권택과 봉준호를 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이따금 임권택의 영화중의 무언가가 봉준호의 영화에서의 어떤 순간을 만져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반대로 어디에선가 봉준호의 쇼트가 임권택의 어떤 영화의 장면에 대한 연인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이런 설명이 비평의 자리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길 사이 바깥으로 빠져나간 이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몹시 위험한 자리에 들어섰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가고 싶다. 그런 다음 그 가운데서 무언가가 서로를 밀쳐낼 때 그 둘 사이에는 그것을, 말 그대로 그것을, 잠재운다는 인상이 남는다. 저기서 깨어있는 것이 여기서는 잠들고 있다. (내게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준다면) 나는 그걸 공존의 경제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쪽에서 초과해버린 부분이 저쪽에서 부족하면서 겨우 균형을 맞춘 기묘한 교환. 마치 저쪽에서 그래버렸기 때문에 내 쪽에서는 이래도 괜찮아, 라고 그냥 긍(정해버렸다고 가)정된 거래. 하지만 이 비유적인 느낌을 내게 탓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거리는 딱 그 정도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이 아직 서툴긴 하지만) 용기를 내어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영화 안에서 선물의 경제학이라는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모델을 제시해보고 싶다. 우리가 희망의 원리를 비평 담론에서 망설여야 할 어떤 이유가 있단 말인가.
 
약간의 잡담. 봉준호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내게 누군가 말하기를 봉준호의 영화에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어떤 장면에서 영화사의 한 순간에 대한 향수를 느껴보게 만들 때가 있어요, 라고 건드렸을 때 잠시 돌아본 적이 있었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에 대한 기억. 그것이 이야기 안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영화를 기묘하게 앞뒤로 오가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를 설명하면서 왜 어떤 비평가도, 어떤 시네필들도 그런 희한한 운동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받는 감동은 마치 암호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의 예. 박두만 형사가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논두렁 위아래를 오르내릴 때, 그 뒤를 따라 카메라가 뒤따라가는 긴 롱 테이크의 운동에서, 논둑길을 뛰어 올라와 발자국을 밟지 말라고 저 멀리 오는 경운기를 향해 사선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살인의 추억>), 문득, 말 그대로 문득, 마크와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온 수잔을 따라 카메라가 뉴멕시코의 작은 마을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함께 만나고 헤어지면서 또 하나의 동선을 만들어내는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캐딜락 오픈카를 어처구니없게도 떠올리면서(<악의 손길>), 롱 테이크에 감탄하는 대신 그 ‘럭셔리한’ 캐딜락이 ‘촌스럽기 짝이 없는’ 경운기로 바뀐 모습에서 깔깔 대고 웃는 극장 안의 그 누군가에게, 나도 지금 함께 극장에서 당신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공감을 가져보고 싶어진다. 우리들 사이의 웃음이라는 인사.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봉준호는 2012년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에서 앙케이트 한 ‘영화사상 탑 10 영화’에 응답했다. 이 잡지는 1952년부터 10년 단위로 앙케이트를 했고, 2002년부터는 비평가(와 학자, 문화이론가,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영화감독을 분리하였다. 그런 다음 2012년 9월호에 결과를 발표했다. 사이트 앤 사운드 편집진에 따르면 지구상에 활동하는 358명의 감독이 앙케이트에 응했으며, 그 중 100명을 잡지에 게재했고 전체 명단은 온 라인으로 발표했다. 봉준호의 명단은 알파벳 순서에 따라 63페이지에 실렸다. 별다른 설명은 없고 그저 짧게 “Ten films that the biggest impact on my own personal view of cinema”라고 명단 앞에 덧붙였다. 그런 다음 10편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비정성시>(후 샤오시엔), <큐어>(구로사와 기요시), <하녀>(김기영), <파고>(코엔 형제), <싸이코>(알프레드 힛치콕), <성난 황소>(마틴 스콜세지), <악의 손길>(오손 웰즈), <복수는 우리가 한다>(이마무라 쇼헤이), <공포의 보수>(앙리-조르주 클로조), <조디악>(데이빗 핀처). (물론 알파벳 순서이다)
 
 
이 명단에 기대어 봉준호는 홀수의 영화가 있고 짝수의 영화가 있다고 다소 익살스럽게 말하고 싶어진다. 먼저 홀수의 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괴물>. 두 영화는 외양으로 볼 때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냥 간단하게 규모가 다르다. 누군가는 둘 사이의 차이를 먼저 지적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영화는 당신의 상상보다 훨씬 가깝게 있다. 무엇보다 개와 괴물. 그 둘은 어떻게 대상에 주인공들이 애절하게 가닿으려고 애를 쓰는지를 보여준 다음 거의, 아마도 거의, 그 근처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그것이 실패한 목표라는 것을 깨닫는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들 사이의 기기묘묘한 교환. 종종 봉준호의 슬로 모션에서 운동의 쾌감을 맛보는 대신 허우적거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운동의 고통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영화들이 증후에 시달리는 동안 봉준호는 충동의 계략을 꾸미는 중이다. 나는 <설국열차>를 보았을 때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열차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는 중이 아니다. 모두들 열차 맨 앞 칸에서 벌어진 일에 매달렸다. 그런 다음 뫼비우스의 순환에로 빠져들었다. 그때 봉준호는 아니오, 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목표는 열차의 맨 앞 칸이 아니라 열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충동의 순환궤도를 멈추지 않고 빙빙 도는 것이 핵심이다. 빙빙 돈다는 것. 앞은 끝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끝은 앞의 힘으로 달아나는 중이다. 그러므로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환상을 붕괴시키는 순간 현실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세계. 여기서 봉준호는 마침내 영화와 만화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맛보았을까. 물론 그걸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설국열차>보다 <괴물>이, <괴물>보다 <플란다스의 개>가 훨씬 만화에 가깝게 보인다. 만화라는 캐리커처의 예술. 여러 자리에서 봉준호는 자기가 얼마나 만화를 사랑하는지 공공연하게 선언하다시피 했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 말은 봉준호의 예술적 야심이 때로 영화가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지점을 목표로 한 표현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영화의 블랙홀은 어디일까. 그때 만화는 어디에 있을까. 봉준호는 종종 영화만이 가능한 순간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로는 불가능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탐색한다. 이 암흑지점의 이미지를 만날 때 영화 안에서 비-영화를 엿보는 괴상한 순간과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영화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때로 어떤 구조가 붕괴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여기서 봉준호는 현실을 고립시킨 다음 그 속에 불가능한 존재를 집어던졌을 때 사실들이 어떻게 견디고 부서져나가는지, 라는 사건을 만들고 싶어 한다. 아마도, 역시 아마도, (잠시 머뭇거린 다음 소리 내어 읽어주기 바란다) 그래서 봉준호의 웃음은 불길하다.

오고 가며 봉준호를 여러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앉아서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마더>를 찍고 난 다음, 혹은 <설국열차>를 준비하고 있을 때 였다. (“봉준호는 지금 다시 시작 한다” _씨네21_800호_20110419/0426) 그때 (함께 씨네 산책을 진행하던) 허문영에게 봉준호에게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질문해서 얻어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그 자리가 시작되기 전에 묻자 슬그머니 웃으면서, 물론 (영화 속에서 날뛰는) 리비도의 비밀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때 우리의 이야기는 <설국열차>에 모아졌고 영화는 그의 두뇌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소 이상하게 진행됐다.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서 하듯이 질문했고 봉준호는 마치 이미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서 설명하듯이 대답했다. 이 신기한 불균형. 나는 이 대답 속에 가려져있는 정념의 신호들을 읽는다. 물론 만들어진 영화는 말하여진 영화와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만으로도 뇌의 영화와 퍼포먼스로서의 영화 사이에 놓인 간극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둘을 하나로 합치는 대신 그 둘을 각자 존재하는 두 편의 영화라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좀 더 느슨하게 말해도 괜찮다면 두 대의 기차가 한 궤도 위에서 달리고 있다. 물론 지금 한 대는 눈 밭 위에 쓰러져있고 다른 한 대는 아직도 달리는 중이다. 그런 다음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봉준호는 제작의 자리로 물러 난 다음 (<살인의 추억>에서 연출부를 한) 심성보를 연출자로 내세운 <해무>를 제작했다. 물론 지금 많은 감독들이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박찬욱이 제작한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봉준호의 공백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적절치 않은 회색의 베일이 그 앞에 드리워져 있다. 어떤 터치라는 문제. 봉준호의 터치. 나는 봉준호의 연출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때마다 이상하게 (어디선가, 텔레비전에서 했던) 이 대답이 떠오른다. 그 자신이 막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다음 한동안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지리멸렬’하게 지낼 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죠, 제가 찍은 결혼식 테이프를 갖고 계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근데 아마 모르실 거예요, 제가 찍고 편집한 지는, 잘 찍었어요, 게다가, 신부 엄마 울 때는 딱, 클로즈 업 들어가고, 절대 안 놓치죠, 그런 순간은,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되고, 또 우는 하객들 찍고, 신랑의 과거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 또 괜히 막 가까이 찍고(...)” 처음에는 그냥 시작했다. 그러면서 눈을 돌려 신부의 엄마가 흘리는 ‘눈물’을 “절대 안 놓칠”뿐만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서 바라본다. 물론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된다. “우는 하객들” 그런데 여기는 장례식장이 아니다. 하객들이 왜 우는 것일까. 너무 기뻐서? 이건 두 사람의 몰락이니까? 슬퍼서? 무엇이 슬퍼서? 신부의 남자 친구도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신랑의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을 그냥 찍는 게 아니라 “괜히 막 가까이 찍”을 때 봉준호는 이미 이 결혼식장에 관한 또 다른 시각적인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보이는 풍경. 풍경 속의 이면의 풍경. 이 결혼식장은 봉준호의 친구 혹은 선배의 결혼식장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 이건 이 비디오테이프를 봉준호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아르바이트였다(고 한다). 그날 온 하객들은 봉준호가 그날 처음 본 사람들이다. 아니, 그날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때 봉준호는 두 가지를 따라간다. 하나는 결혼식 장면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법칙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음란한 외설적 이면의 얼룩이다. 그때 여기에는 봉준호의 원근법이 잘 설명되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이 비디오테이프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의 필모그래피에 포함시키고 싶다.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해무>를 나는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베일을 열어보는 것은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영화를 셈에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나는 미스터리를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여기서는 방점을 옮겼다. 오늘 만나서 진행한 이 대화는 지난 대화의 속편이 아니다. 우리 둘 사이에서 나누고 싶었던 것은 임권택이라는 영화를 어떻게 통과해갈 것인가, 라는 질문의 세션이다. 여기서는 질문을 서정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 안에서 영화가 던진 체험을 어떻게 견디는지, 어떻게 즐기는지, 그 안에서의 참을성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었다. 참을성? 진정한 참을성. 그것은 매혹에 사로잡힌 우리들이 그 안에서 몸부림친 대가로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는 결국 매혹당한 시선이 바라보게 되는 진실이 될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니체는 예술에서 진실에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므로 나는 의도적으로 산만하게 질문했다. 매번 봉준호는 질문 안에서 자신이 놓인 부재의 조건을 차례로 열거했다. 우리들의 임권택이라는 체험 속의 움직임. 그것이 움직이는 장소. 이때 봉준호는 대답을 하면서 몇 차례이고 영화 속의 인물을 향해서 가엽다, 라는 말을 썼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썼고 자기 자신의 영화를 향해서도 그 말을 썼다. 나는 자꾸만 이 말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 말의 원래 뜻 안에 머물면서도 그 말을 다르게 쓰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만 더 내게 비교를 허락해준다면, 이를테면 그건 마치 (잘 알려진 대로) 홍상수가 예쁘다, 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은 어법처럼 들렸다. 물론 홍상수는 언제나 자기의 주인공들을 예쁘게 바라본다. 그러나 가끔 그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무시무시할 정도로 잔인해진다. 똑같은 의미로 봉준호가 가여운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변태스러울 정도로 기괴해진다.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거리 조절의 시네아스트들이다. 여기서 나는 봉준호에 대해서만 생각할 참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성일_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자리는 한국영화에서 지금 활동 중인 감독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2014년이라는 시간에, 자기의 자리에서 어떻게 임권택 감독님을 바라보는지, 언제 (영화적으로) 만났는지, 거기서 어떻게 헤어지는지, 말하자면 지도를 그려보고 싶은 바람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마련한 자리입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을 차례로 써나가면서 수직선을 그어나가면서 다른 한 편으로 차례로 이야기를 청해 들으면서 수평선을 그어보면 한국영화의 씨줄과 날줄에 관한 하나의 기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 회고전을 하면서 한국영화 감독들에게 백지수표를 나눠주었습니다. 봉준호 감독께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자리의 관객석에 앉아 첫 사랑과 이 영화를 본 사연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웃음) 오늘은 임권택 감독님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생각뿐만 아니라 동시에 21세기 평행으로 진행된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질문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영화가 공존할 때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의 영화가 함께 한국영화라는 구도의 집을 세우는지 보고 싶습니다.

봉준호_ 지금 임권택 감독님 102편 중 몇 편을 볼 수 있는 상황인가요?

정성일_ (현재 다시 보고 쓸 수 있는 편수는) 75편입니다.

봉준호_ 생각보다 많네요. 반 정도인 줄 알았는데 꽤 많네요.
 
정성일_ 제 소망은 이런 것입니다. 임권택 전작을 놓고 진행한 이 연재가 끝나면 누군가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쓰겠다고 그러겠죠.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뒤늦게 (전주영화제 삼인삼색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 중편 <인플루엔자>를 봤어요. 그 영화가 정말 좋았어요. 그냥 이건 걸작이었어요. 그런데 왜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이었어요. 말하자면 모든 영화는 친구를 가지고 있어야만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모든 영화에 대해서 하나 이상의 글이 쓰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영화는 친구가 많지만 어떤 영화는 그저 외롭게 영화 혼자서만 시간을 기다리는 영화들도 있으니까요. 오늘 드릴 질문에는 약간 불편한 이야기도 있고,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질문도 있습니다. 재미없는 질문도 있고, 미루어둔 질문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일단 봉준호 감독과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웃음) 그렇게 되면 봉준호 감독이 자기 페이스로 진행하게 되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런 결심, 왜냐하면 제가 이미 3년 전에 (허문영 씨와 함께) 긴 인터뷰를 해본 실전 경험이 있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몹시 정신 사납고 산만하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봉준호_ 제가 정서가 산만해서(웃음)

정성일_ 무조건 산만하게 얘기를 진행해야겠다, 는 결심 (웃음)

봉준호_ 국정원에 끌려온 느낌입니다. (일동 웃음)
 

 
정성일_ 우리들의 지난 번 이야기는 <설국열차>로 끝났으니까 이번에는 <설국열차>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모든 면에서 작년 여름 <설국열차>의 소용돌이로부터 정확히 일 년이 지났고 지금은 그 사이 제작을 한 <해무>가 있습니다. 제가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할 때에도 그 영화를 막 마쳤을 때와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니게 된 다음 일 년이 지나고 나면 같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혹은 적어도 방점이 달라진다고 할까요. 게다가 그 영화가 큰 영화일수록 감독들은 마케팅의 전략 안에 놓여진 전술이 되어 수 없는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면 인터뷰 자체를 반복하는 학습의 과정을 겪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정말 지겨운 상태에 놓인 달까요.

봉준호_ 저도 개봉시기가 항상 제일 싫습니다. 이상한 이슈에 끌려 다녀야 하고, 참,

정성일_ <설국열차> 프로젝트를 처음 들은 것은 <괴물>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괴물> 직후에 <설국열차>를 만들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마더>가 끼어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봉준호_ 저는 <살인의 추억> 직후에 김혜자 선생님과 약속을 해놨던 상태였어요.

정성일_ 영화의 규모나 이야기의 태도, 게다가 열차라는 폐쇄공간으로 시종일관 진행하는 사실상 450억 원 실험영화 <설국열차>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봉준호 감독의 숙원의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봉하고 이제 1년이 지났는데 돌아보니 <설국열차>는 자신에게 어떤 영화였나요?

봉준호_ 아직 완전히 과거형은 아닙니다. 미국과 핀란드에서 개봉중이고, 그래서 지금 극장에 걸려있고, 또 개봉 준비 중입니다. 지금 8월인데, (잠시 생각) 지난 6월 말에서 7월 초에 북미 프로모션을 하다 온 거여서, 미국 프로모션 할 때 정말 지겨웠죠. 거의 인터뷰가 500개, 무대인사 100개, 관객과의 Q&A 50개를 넘어가니까 사람의 멘탈이 이제 너덜너덜해졌어요. 그렇게 하고 온 직후라서 아직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얼마 전 작년에 영상자료원에서 <살인의 추억> 10주년 행사를 해주셔서 옛날 배우들이 모여 큰 프린트로 봤는데, 그건 정말 그 영화를 지나왔구나, 라는 기분이 있는데, <설국열차>는 그 정도의 느낌은 당연히 아니구요, 지금은 <설국열차>는 철도 레일에서 이제 막 벗어나서 뛰어내리려는 그런 상황이고, 요즘 <해무>도 개봉했고, 다음 작품 시나리오도 열심히 쓰고 있지만. (잠시 생각) 아직도 완전히 마무리된 느낌은 안 들어요. 미국판 DVD가 나와서 진열장에 꽂으면 그때 딱 마무리가 되는. (웃음) 제가 소유욕이 강해서, 손에 만져지는 물건화 돼서 나와 책장에 꽂으면 끝날 거 같아요. 아마 다음 그 다음 달에 미국 DVD가 나오면 (마음속에서) 종료될 거 같아요. 미국이 제게 별 의미가 있는 거 아니지만 가장 늦게 개봉한 나라고, 어쨌든 영어 영화였으니까요. 질문은 <설국열차>가 제게 어떤 의미인가였는데 일단 영화 외적으로 너무 과열된 상태로 개봉이 돼서... (망설이다가) 그렇게 흥분할 영화가 아닌데 그게 좀 부담스러웠고, 그리고 제게는 SF 장르를 본격적으로 했다는. 물론 그 전에 <괴물>이 있었지만 사실 그 영화는 괴생물체 존재만 제외하면 소시민적인 세팅이었고 여기서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창조하는 거잖아요. 여기서는 기차라는 세계였는데, 그런 것이 SF의 매력인 거잖아요. 골수 SF 팬은 아니지만 정면으로 SF 장르를 다뤄봤다는 것이 제게는 보람이었다. (<설국열차>는) 다섯 번째 영화인데 지금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영화를 함께 준비하고 있지만 그 영화가 저에게 어떤 전환점이 되거나 분기점이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건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거 같고, 지금 여섯 번째 영화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설국열차> 전에 2010년에 구상했어요. 그러니까 영화들이 서로 계속 디졸브 되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SF 장르를 도전해서 해봤고, 그런데 거기서는 한국적인 좌표에서 벗어나 보았죠. (그 전에는) 한국적인 로컬리티가 있거나 시공간적인 좌표를 갖고 항상 영화를 해왔는데, 한강에 괴물이 나오고, 80년대 화성이 등장하고, 이것은(<설국열차>) 거기서 완전 벗어난 영화입니다. 다국적 사람들이 기차라는 공간에 있고, 그야말로 ‘사이-파이(Sci-Fi)’ 영화죠. 맥락들은 다른 것 같은데 미국에서 ‘사이-파이’영화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게 제일 보람 있는 부분이에요. 거의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게, IP_TV에서 연말까지 수금을 하면, 그런데 러시아 배급사 애들이 아직 돈을 안준다는데(웃음) 그렇게 <설국열차>는 전 세계 배급의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거 같아요. 프랑스나 일본처럼 점잖게 제때 돈을 주는 나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남미 및 러시아 배급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직원 분들께 응원의 한마디를 보내고 싶습니다. (웃음)

정성일_ 나라마다 영화 문화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인터뷰하고 또 관객들과 만나보면서 감각적으로 느껴보기에 <설국열차>를 봉준호 감독이 원래 시도하려했던 연출의 뜻에 가장 가깝게 잘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는 어디였습니까? 그저 극장에서 느껴보기에는 한국에서 이 영화는 흥행의 결과와 또 달리, 뭐랄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할 정도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봉준호_ (잠시 생각) 만든 입장에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구요. 각 나라마다 다른 정체성이 있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여름철 개봉하는 제일 대작 블록버스터야, 그렇게 먼저 전제를 하니까, 봉준호의 울트라 초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어야 하고,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십자가가 지워져 있잖아요. 근데 막상 보니 마이클 베이 영화 같지 않고, 변태적이고 잔인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초등학생을 데려갔더니 애가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고(웃음). 기대한 것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미국에서는 <트랜스포머 4>와 같은 날 개봉을 하면서 오히려 훨씬 더 이상하고 유니크한 영화로 받아들여졌어요. 이 영화를 보면 왠지 젊은 애들 틈에서 좀 더 쿨한 사람인 것처럼 잡지에서 나오기도 하고, 그쪽에서 평가는 훨씬 더 유니크하고 이상할수록 더 점수가 높아지는 상황이었어요. 트랜스포머와 반대말일수록 더 좋아하는 거죠. 로튼 토마토 점수가 상상이상으로 95점, 97점 높이 치솟은 것도 한국에서와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를 정리하고 있는 2014년 9월 6일자 rottentomatoes.com 의 신선도는 95퍼센트이다)

정성일_ 한국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읽으면서 왜 아무도 이 질문을 하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최고의 열차 영화가 무엇입니까? <설국열차>를 찍는다고 했을 때 사실 저에게 즉각적으로 든 생각은 그 열차에 어디에선가 영화사 속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와 만날 것이라는 제 멋대로의 상상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영화가 거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열차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봉준호_ 미국 프로모션 때는 미국 평론가나 기자는 그런 질문을 많이 하셨었어요. 한국에서는 영화 역사를 짚어가며 질문하는 분이 많이 없거나 없어지는 추세라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연히 (<설국열차>를 준비하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각본의 (<눈(雪)>을 영화로 옮긴 할리우드 영화) <런어웨이 트레인> 같은 거는 다시 꺼내서 봤죠.
 

<폭주 기관차 Runaway Train>
 
정성일_ (<런어웨이 트레인>을 연출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봉준호_ 그 분의 영화는 <탱고와 캐쉬>도 못 봤습니다. 별로 본 게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와 같은 감독이다, 라고 누가 얘기 하시더라구요. 막상 본 거는 별로 없어요. <런어웨이 트레인>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리아스 러버>가 그 분 영화였나?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온, 그런데 그거는 청소년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영화라, 시네필적인 관점하고 상관없이 흰 속옷 같은 걸 입고 나스타샤 킨스키가 잡지 광고에 아주 야하게 나왔던 게 기억이 나네요. 진짜 예뻤죠. (웃음) 원래 얘기로 돌아오면 <런어웨이 트레인>이라든가, (로버트 알드리치의) <북극의 제왕> 이라고, 어네스트 보그나인하고 리 마빈. 되게 남성적인 중년 마초들이 무식한 무기들을 들고 싸우죠. 제일 좋아하는 열차 영화를 꼭 하나만 꼽으라면 존 프랑켄하이머의 흑백영화 <트레인>이었던 거 같아요. 나치들이 프랑스 미술품을 빼돌리려고 하려는 데, (두 손을 치켜들고) 기차를 계속 끌고 가려는 나치들과 휴전 협정 전에 기차를 멈추려는 버트 랭커스타의 싸움이 되게 긴박하게 펼쳐지는데 손에 땀이 나게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영화에서 보여지는 카메라 워크와 인물들의 우아한 동선에 매혹되었습니다. 거기서 1페니 짜리 동전으로 기차를 못 가게 하는 디테일도 나오는데, 그 영화는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설국열차>의 텍스트로 삼으려는 영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기차 자체에 사람들이 계급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 온 사회를 압축해서 쑤셔 넣은 것은 이 그래픽 노블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디즈니_픽사의) <월-E>같은 애니메이션 후반부, 또는 거기서 우주선에서의 생활상이 <설국열차>와 비슷한 거 같아요. 우연히 아들 때문에 봤는데 거기 사람들이 비만상태가 되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2001 오딧세이>를 응용한 패러디 장면이 나와서. 아마 그런데서 더 영감 받았던 거 같아요. 기차로만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에서 딱 한 시퀀스지만 기차 시퀀스가 나와요. 구로사와 아키라는 기차를 잘 다루는 감독인거 같아요.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살의>를 보면 이 여자의 집이 기찻길 옆에 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남자가 가는데, 별로 힘주어 찍지 않아도 기차의 가장 강렬한 장면이 나와요. 보면서 제일 싫었던 기차 영화는 <폴라 익스프레스>(웃음) 거의 달디 단 제과점 음식을 삼시 세끼 계속 먹어야하는 기분. 눈이 오고 기차 나오니까 한번 보게 되는데 반면교사로 삼았달까요. 아, 저러면 안 되겠다. 싫다. (일동 웃음)

정성일_ <설국열차>에 관해서 영화계 사람들에게 파다하게 퍼져나간 이야기의 공약수는 봉준호 감독의 악전고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이끌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만든 가장 매혹적인 힘이랄까, <설국열차>에서 가장 매혹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봉준호_ (단호하게) 기차였죠. 여기 말하는 기차는 하위 장르로써의 기차가 아니라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달리는 기차에서 펼쳐지고, 그 안에 사회와 모든 것이 압축되고, 인간군상이 고농도로 압축된 상태에서 그것을 물리적으로 봤을 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두 시간 내내 모든 희로애락을 내가 연출한다, 내가 언제 이것을 또 할 수 있겠냐, 아마 다른 감독들도 안할 것이다, 어찌 보면 끔찍한 조건이니까, 잠수함 영화 이상으로, <설국열차>를 만든다는 건 그런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해외 나가면 사실 고생하는 건 다 마찬가진데 그게 (거기서) 한국에 들어오는 소문은 과장된 게 많습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찍었습니다. 정해진 일정 안에서 다 찍었고, 촬영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준비를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촬영기간은 굉장히 짧았어요. 다 찍는데 석 달도 안 되었어요. <괴물>의 절반도 안되는(셈을 하더니) 2개월과 4주, <플란다스의 개> 다음으로 제 영화 중 가장 짧게 찍었죠. 90퍼센트 이상이 스튜디오 촬영이니까 날씨도 상관없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다 스토리보드대로 찍은 거고 여기에 관여했던 미국 라인 프로듀서들은 역사상 제일 쉽게 찍은 영화라고 기억할 거예요. 저는 그런 것들을 지켜내면서 괴로움도 있었고, 통으로 다시 찍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일반화시키면 원래 늘 그러니까요. 준비기간이 무척 길었지만 촬영 프로덕션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잘 끝났습니다. 외국 배우들과 계약 조건도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제가 제임스 카메론도 아니니까(웃음) 미국적 관점에서 보면 독특한 저예산 사이-파이 영화고, 크리스 에반스도 그렇게 얘기하고 다녔어요. 그는 마블 영화를 주로 하는 배우인데 <어벤져스>는 2억불이 넘는 영화잖아요. 그의 관점에서는 < Snowpiercer >라는 작지만 괜찮은 영화를 찍는다, 고 토크쇼에 나가서 얘기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역대 최대 제작비니까 두 가지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었죠.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이건 정말 독특한 영화다. 기차 안에서 이렇게 모든 공간과 인물과 운동이 담긴, 저는 (영화에서) 운동이나 움직임을 몹시 좋아합니다. 기차도 움직이지만 그 안에 사람도 달린다. 그런 흥분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무>
 
정성일_ 저는 지난 겨울에서 봄까지 임권택 감독님의 <화장>현장에서 다큐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영화에 <해무>에서 넘어온 스태프들이 꽤 있었고, 게다가 영화 현장은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식구 아닙니까. 그때 <해무>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웃음) 좋은 이야기도 있고 과장된 이야기도 있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해무>가 신인감독의 악전고투 신고식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21세기 한국영화의 새로운 현상 중의 하나는, 홍상수 감독에서 박찬욱 감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독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설국열차>도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것인데, 봉준호 감독이 제작사를 차린다는 것의 가장 큰 긍정적인 의미에서 목표, 욕심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봉준호_ 강제규 감독님이나 강우석 감독님과 같은 분들은 비즈니스 모델, 사업을 하실 수 있는 성격과 스케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스 기질도 있고. 하지만 저는 제일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제가 제작사를 운영하면서 다른 감독의 작품을 제작할거라는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일회성으로 그칠 거라고 예상도 했고, <해무> 작업하면서 실제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요. <해무>가 제 마지막 제작 작품이 될 거 같다고 인터뷰 때도 이미 한번 얘기했습니다. 제작은 저와 안 맞고 남은 인생은 연출에만 집중하겠다고 이미 명확히 했어요. 과정이 좀 복잡하긴 한데, (잠시 허공을 쳐다보더니) <해무>를 기획했던 이유는 저를 제외한 공동 제작을 한 다른 두 명이 <괴물>때 같이 일했던 프로듀서들인데 <설국열차>를 같이 하기로 했다가 못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설국열차>는 준비기간이 굉장히 길어졌죠. <설국열차> 다음 작품, 여섯 번째 영화를 같이 하기로 한 친구들인데 (그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참 기다리고 있는 게 미안했습니다. 그런 미안함과, 그리고 <해무>라는 훌륭한 연극 원작을 2008년에 보고, <마더> 캐스팅 과정에서 (그 연극을 보고) 송새벽 씨를 발견했는데, 좋은 스토리라 저걸 누가 영화화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구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프로듀서 후배들과 내가 기획자로 이 좋은 작품을 맺어주면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겠구나. 이왕이면 <살인의 추억>때 연출부였고 시나리오를 서포트했던 심성보 감독이라면 또 좋은 신인 감독이 입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기획의 이유입니다.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준비할 때 화상회의로 투자사 분들과 <해무>를 얘기했습니다. <해무>라는 원작을 한국에서 재공연할 때 가서 보시게끔 제가 원격조정으로 어레인지한 거고 그래서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거고, 음,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다 찍고) 돌아왔을 때는 심성보 감독이 시나리오를 많이 썼고, 저는 <설국열차> 후반작업을 하면서 <해무>의 시나리오 마지막에 도움을 줬습니다. 제가 오야붕이고(웃음) 제작자인데 촬영 현장에 가면 얼마나 싫겠어요, 그래서 거의 한 달간 제가 촬영 현장에 안 갔는데 그때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어쨌든 무사히 개봉하게 돼서 기쁘고 저도 거기에 책임을 져야할 입장이고 그것에 일조한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해무>가 마지막 제작 작품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정성일_ <해무>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어디입니까?

봉준호_ 오프닝 씬을 제일 좋아합니다. 모든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선원들의 일상이 나오는데 거기 모든 배우들의 느낌이 제일 좋고. 그리고 영화 뒷부분에 이희준 씨가 거의 발정난 수캐가 되어 사상초유의 전자발찌 캐릭터죠. (웃음) 우리끼리는 전자발찌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막 뛰어다닐 때 이희준 씨 장면 좋아하고, 그리고 김윤석 씨가 밀항을 제의받는 장면이 있어요. 사료에서 시계 꺼내고 그때 뱀장어가 왔다 갔다 하고, 그 씬에서 김윤석 선배님의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존경할 만한 배우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순간들이 좋았습니다.
 

<마더> (흑백버전)
 
정성일_ 지난 겨울 서울 시네마테크에서 <마더>의 흑백버전을 상영했는데, 그 말은 <마더>의 감독 버전이 흑백버전이라는 뜻입니까? 저는 두 개가 별개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준호_ 2008년도에 그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 저나 홍경표 촬영감독이 <마더>는 흑백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때 인더스트리적 조건으로 그게 좌절되면서 컬러로 바꿨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컬러로 만들었는데 <마더>를 개봉하고 어떤 시점에서 둘이 좋아하는 서로의 흑백영화 로망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도 컬러 네거티브로 찍은 거를 개봉은 흑백으로 했고 컬러, 흑백 버전 두 가지로 DVD가 나왔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 둘이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흑백에 대한 로망을 얘기하다가 나중에 흑백버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디지털 상태에서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걸 쇼트 단위로 다 조절한 거예요. 저희도 궁금한 거죠. 같은 사운드, 같은 편집, 같은 퍼포먼스인데 흑백으로 바꿀 때 뭐가 바뀔까, 저희도 흥미로워하면서 저랑 홍경표 촬영감독과 강성표 컬러리스트가 작업을 한 거죠. 재개봉은 안했지만 DVD도 나왔고 해외에서도 틀고 있고 올 가을에 부산에서도 틀 거 같은데. 김혜자 선생님도 모시고 봤죠. 다들 나름의 감상이 있어요.

정성일_ 흑백 버전을 봤었을 때 저는 이쪽이 감독 버전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처음 <마더>를 보았을 때 몇몇 장면들에서 표현주의 영화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그림자로 이어지는 골목 장면들이나, 혹은 의도적으로 벽을 찍은 정면으로 찍은 쇼트들 경우 의도적으로 화면을 만든 것 같은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프릿츠 랑 영화의 자장권 아래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을 컬러가 약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장면을 흑백으로 봤을 때 굉장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흑백버전을 영화를 처음 보면서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진행하다가 해가 저물가면서 햇살이 쏟아지는 고속버스 장면만을 칼라로 하면 어떨까, 라는 상상, 그런데 그 기대감이 충족되었을 때의 만족감이랄까, <마더>가 CJ에서 제작될 때, 그때 저는 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에서 일하면서 가끔 CJ 사람들과 회의를 해야 했는데 휴식 시간에 제작중인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모두들 <마더>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대부분 산업적인 것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우리가 <괴물> 천만 기록을 깰 겁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CJ는 천만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마더>를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의 칼라를 위해서 결국 모든 장면을 칼라로 보아야하는 거야,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흑백 버전을 보게 되었으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가상적인 상상의 가정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실현되는 가는 것을 본 달까,
 



 
봉준호_ CJ에서 제작할 때 <마더>에 대한 간섭은 전혀 없었습니다. 100퍼센트 다 제가 할 수 있도록 하게 해주셨습니다. 흑백으로 한 건 개봉 후에 떠오른 아이디어였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만약 이상한 법이 생겨, 두 작품 중 하나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저는 흑백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마지막에만 햇볕이 퍼질 때 컬러가 폭발하는 그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영화란 것이 의도를 향해서만 돌진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 심지어 배우의 연기조차도 흑백으로 봤을 때 더 오롯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역으로 돌아봤을 때 우리가 흑백 고전에서 느끼는 매혹들 있잖아요. 크라이테리온에서 다시 출시된 펠리니의 흑백 영화나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같은 것을 봤을 때 느껴지는. 처음 그 영화가 흑백으로 개봉했을 때 아직 프린트가 손상 안 되었을 때 극장에서 보는 느낌. 반대로 그 영화들에 컬러를 넣어서 생각해본다면 뭔가 흐트러트리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만약 영상자료원에서 한 작품만 남겨달라고 한다면 흑백만 남겨 주십사, 말할 거 같고 (그렇게) 선택하겠습니다. 같은 영화인데 다른 영화인 거 같아요. 김혜자 선생님 얼굴이나 눈빛도 흑백에서 더 좋았고.

정성일_ 저는 봉준호 감독 인터뷰 중에서 21세기 첫 10년을 회고한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호(Cahiers du Cinema_652호_201001)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와 대담한 것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영화광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서 미국영화를 예찬한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후반부에 <아바타>를 앞에 두고 제임스 카메론 영화를 보는 게 두려워 그런 말도 있었지만(웃음) 구로사와에게는 영화청년시절을, 그리고 당신에게는 영화소년시절을 통과하면서 70년대 3명의 할리우드 감독이 인상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스필버그. 드 팔마. 존 카펜터. 봉준호 감독께 그런 의미에서 미국 영화란 어떤 겁니까? 이를테면 박찬욱 감독의 미국영화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유보적이죠. 계속 유럽영화와 밸런스를 갖고 싶어 한다고 할까요. 구태여 호명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떤 감독은 명단을 보고 있노라면 시네필이라고 믿기 난처한 허풍도 있고(웃음), 봉준호 감독의 미국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듣고 있으면 특별한 애정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봉준호 감독 이전 세대의 감독 중에도 영화에 대한 시네필의 애정을 갖는 감독들이 있죠. 하지만 그런 감독들은 이상할 정도로 밸런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측면이 있어요.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에서 미국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세대라고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저는 영화는 결국 미국 영화라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의 문법은 여기서 나왔고, 우리들이 질문하는 영화의 투명성이라는 것도 이 영화들을 보면서 배운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피스, 그 중에서도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라는 이름, 얼마든지 불러 볼 수 있습니다. 킹 비더, 라울 월쉬, 니콜라스 레이, 더글라스 서크, 안소니 만,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다른 나라들은 미국 영화를 받아들이는 과정만으로 그 나라의 영화사를 다시 쓸 수도 있습니다. 이건 긍정의 의미입니다. 그게 프랑스 영화이건, 일본 영화이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하스미 시게히코와 아오야마 신지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하스미가 지나치듯이 말하면서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 사람의 영화는 한국 영화 감독으로는 드물게 미국영화의 순혈(純血)을 받고 있다,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멈춰 선 적이 있습니다.

봉준호_ 저도 제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거는 늘 민망한데(웃음) 나는 오늘날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나, 나는 뭘 봤나, 어릴 때 자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아마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저는 TV를 시네마테크로 삼았기 때문에 선배님들 세대처럼 프랑스, 독일 문화원을 출입한 세대는 아니었으니까, TV에서 한 영화는 70퍼센트는 미국 영화가 많았고, 저는 특히 AFKN 보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주한미군영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거기서 B급영화도 많이 방영했었구요.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일본 영화를 얘기할 때 오즈를 말한다거나 프랑스 영화를 얘기할 때 르누아르를 얘기한다거나, 그런 맥락은 제게 없는 거 같아요. 미국 영화 중에서도 약간 반 발짝 사이드로 빠지거나 B급 영화를 더 좋아했던 거 같아요. 존 카펜터나, 그 사람이 윌리엄 와일러같은 대접을 받지 않잖아요. (웃음) 유럽의 이상한 애들이 더 좋아하고, 스필버그가 <죠스>로 블록버스터의 이름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가 이상한 영화를 많이 만들기도 했고, 느끼해지기 전, 여유가 생기기 전의 스필버그를 좋아하는 거고, 드 팔마도 사실, 프랑스에서도 저에게 좋아하는 감독은 클로드 샤브롤의 범죄 영화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유럽 감독을 좋아하는 구나 생각했어요. 셀프 진단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웃음). 클로드 샤브롤이 히치콕에 대해 쓴 책이나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도 재미있게 읽었고.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일본 감독이고, 그래서 카이에와의 대담도 그렇게 성립될 수 있는 거 같고, (잠시 생각) 미국 영화란 제게 깔려있었던 거 같이요. 대학교 다닐 때, 거기서 학교 영화 동아리를 할 때 대만 뉴웨이브에 동조된 시기가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길게 가지 않더라구요. 다음 달 10월에 마침내 크라이테리온에서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이 블루레이로 나온다고 해서 프리 오더로 예약해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웃음) 너무나 그 영화를 좋은 화질로 다시 보고 싶고.. 대만 영화의 아름다움, 한국 영화가 저러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삶과 역사가 다 있고.. 그런 생각했다. 나는 영화 동아리니까, 시네필이니까 저런 영화 다 봐야해. 그런 생각을 했어요. 허우샤오시엔 영화를 다 볼 거야. <비정성시> 보면서 양조위가 참 안됐다, 왜 저렇게 어깨가 좁을까, (웃음) 그런 생각도 들고. 그 마음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게 제 본령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저의 뼈와 살을 이룬 건 미국 영화라고 저 스스로도 생각이 들구요. 덧붙여 시네필이 된 후에 완전히 매혹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스스로 제 멘토라고 믿고 싶어지는 감독님들은 미국이나 대만 뉴웨이브 사이 어디에 자리매김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에 대한 광적인 마음은 굉장히 오래 지속되는 거 같아요. 대만 뉴웨이브에 대한 매혹이나 그 당시 처음 KINO 창간될 시 베스트 10을 꼽으면 그런 영화들이 들어가곤 했는데 그건 일시적이었던 어느 한 시기였던 거 같아요.

정성일_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앙케이트에서 부탁한 10편의 영화를 뽑아서 보내면서, 전제는 나의 창조적인 생각에 가장 임팩트를 준 10편의 영화라고 단서를 달았고, 기억을 환기시켜 드리자면 알파벳 순서대로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구로자와 기요시의 <큐어>, 김기영의 <하녀>, 코엔형제의 <파고>, 히치콕의 <사이코>,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 오손 웰즈의 <악의 손길>,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우리가 한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 데이비드 핀치의 <조디악>. 이렇게 열 편이었습니다.

봉준호_ 저는 항상 연쇄 살인 특별 우대합니다. (웃음) 항상 서너 편이 들어가 있어요.

정성일_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는 그 사람의 취향이고 태도이기 때문에 저는 명단에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른바 이야기하는 모더니즘 영화에 전혀 관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명단에서 얘기하는 로베르 브레송이나 고다르, 브뉘엘, 이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만 말하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후기 펠리니 영화가 있었을 거 같은데, 이를테면 <카사노바>나 <사티리콘>같은 영화가 있었을 것만 같은데, 아니면 베르히만의 과도한 바로크적인 영화, 이 영화가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마더>의 흑백버전을 보고 나면 왠지 <침묵>이나 <마술사>, <처녀의 샘> 같은 영화들, 그런 모더니즘 영화들. 열편 안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이 영화들은 20위권 바깥에 있어, 라고 한다면 그건 그런 영화들과 멀어, 라는 선언처럼 읽힙니다.

봉준호_ 네, 먼 것 같습니다. 특별히 그런 질문을 해본 적 없지만, 고다르 영화를 본 건 영화 동아리 때가 전부였습니다. <비브르 사 비>는 라스트 씬이 굉장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생생히 있지만 DVD를 사서 모은 이후에 고다르 영화의 DVD를 산 적이 없습니다. <미치광이 피에로> 블루레이를 산적은 있지만 사놓고 안 봤습니다. (웃음) 2년 됐는데, 패키지가 너무 예뻐서 샀는데 손이 안가요. 이미 본 <피아니스트를 쏴라> 이런 걸 한 번 더 본다거나 아니에스 바르다를 본다거나 그러기는 하지만 고다르 영화는 손이 안 가는 것 같습니다. 취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드는 입장에서 그런 영화를 잘 할 수 있는 분들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구요. 제 친구 중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만 영화계를 떠났어요. 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 중에 허재영이라는 친구가 그런 영화를 굉장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청어람에서 데뷔를 할 뻔 하다가 못했어요. 그 친구의 <모자>라는 졸업 작품이 있는데 제가 촬영을 했어요. 그 친구가 한국의 고다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영화계를 떠났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많이 다르다, 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취향이나 식성까지도(웃음). 고다르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끌로드 샤브롤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쪽으로 항상 손이 더 가는 거 같습니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정성일_ 좀 더 산만하게 진행해보겠습니다. (웃음) 임권택 감독님 영화로까지 다가가는데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첫 번째 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기 전에 이른바 영화 커뮤니티 안에서는 이미 봉준호라는 이름은 기대의 명단에 들어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지리멸렬>때문일 텐데 흥미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는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를 처음 보았을 때 봉준호 감독에 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화잡지 키노를 만들고 있었고, 창간 일 년 후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첫 번째 영화를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류들이 쏟아져 나오거나 아니면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의 영화에 머물러 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플란다스의 개>를 보게 되었을 때 살짝 쇼크에 빠졌습니다. 뭐랄까, 이 영화는 갑자기 나타난 UFO 같았습니다. 우리가 만나기 전, 그러니까 며칠 전 이 영화가 막 나왔을 때 키노를 다시 펼쳐서 인터뷰를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감독들은 첫 번째 영화를 찍고 나서의 인터뷰가 가장 솔직합니다. (웃음) 무언가 이해받고 싶어 한달까요. 봉준호 감독은 여기서 여러 차례 만화적 프레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모델의 위기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이 위기가 영화 안에서 한번 작동을 시작하자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는 그 느낌이 신나는 영화입니다. 비탈을 달리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플란다스의 개>는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인의 추억>은 무언가 후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아하긴 하지만 고전적인 모델로 되돌아가버렸을 때 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웃음) 뭐랄까,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사이에는 어떤 블랙홀이 있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그 둘 사이에 놓인 블랙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게 아닐까요?
 

 
봉준호_ 네, 강을 건넜습니다. <플란다스의 개>가 좀 모던해보일 수 있는 건, (잠시 생각) 그것을 만들었을 당시 제가 가졌던 불안한 상태가 있고 편집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편집기사였던) 이은수 씨와 계속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음악으로 보면 텐션노트 상태로 편집에 반영되는 것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구요. <플란다스의 개>를 제가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만 제가 그 당시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제작자였던) 차승재 대표가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어요. 완성한 편집본을 들고 차승재 대표 집에 갔던 게 생각납니다. 같이 편집본을 보자고 해서 마음속에 준비를 하면서 갔어요. 이 씬을 빼자고 하면 이렇게 반박해야지, 저 씬을 빼자고 하면 저렇게 반박을 해야지 하고, 온갖 경우의 수를 준비해서 갔는데 딱 보고 아, 고생했다 이제 술 먹자, 해서 아무 관심 없구나, 결국 역시 이건 버리는 영화군, 하고 상처를 받았죠. (웃음) 한편으로는 행복했죠. 그대로 개봉할 수 있겠다. 한번 엎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죠. 우노 필름이라는 (예전) 싸이더스의 한구석에서 적은 예산으로 아무 간섭 받지 않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그 영화를 찍고 흥행뿐 아니라 비평에도 미지근하게 별 반응이 없었고, 개봉하고 일 년 반이 지나면서 홍콩이나 뮌헨 영화제에서 상을 수집하면서 씨네21에서 다시 새롭게 쓰는 리뷰가 나오고 그랬지만 개봉하고 1년은 굉장히 쓸쓸했습니다. 나에게 질문을 했죠. 이 영화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플란다스의 개>의 이성재 심리와 굉장히 비슷해져 버렸어요. 거기서 성인들의 세계, 룸살롱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많이 마신 술로 구토를 하는 그런 세계로 들어갈락 말락 하고 있잖아요. 이성재가 어떤 경계선에 서서. 내가 충무로 감독인가? 그때는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디 장편을 찍어야하나? 아니면 단편을 계속 할까? 당시 말하는 충무로 35미리 상업영화 감독이 될 수 있을까, 또 되는 게 옳을 것일까 질문을 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그런 것이 주인공 이성재가 케이크에 돈다발을 넣어갖고 교수에게 먹이러 가잖아요. 그것도 지하철을 타고. 그 심리와 비슷한 상태였어요. 거기서 막 요동을 치면서. 또 싸이더스라는 굉장히 큰 회사에 일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진 않았지만, 내 나름의 순결주의가 있었습니다. 이게 4번째 영화여야 한다는 강박. 단편 3개를 찍었는데 비록 길이가 1시간 30분이 되었지만 내 독립적으로 단편을 찍던 때와 똑같아야만 해. 누가 충무로 영화와 같지 않다. 단편을 늘린 거 같다는 건 내게 찬사야. 현장 스태프들은 되게 이상하게 생각했죠. 그 영화를 보면 행인이 없어요. 왜 저 감독 영화에는 엑스트라가 없나, 협회 엑스트라가 싫었어요. 다 빼! 주인공만 걸아가! 길에 행인이 없을 수도 있잖아! 이건 나의 네 번째 영화여야하고 첫 충무로 상업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시나리오 써서 주변 선배들에게 보여주면, 너 정말 이 영화로 데뷔하려고 하냐, 차승재 제정신이냐, 이야기가 왜 이렇게 조잡 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더 오기가 생겨서 무말랭이 하나로도 드라마에 반전을 끌고 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마. 더 세세하고 작고 쪼잔한 것에 더 집착하게 된 게 <플란다스의 개>였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그 결과에 대한 나 스스로의 반작용이 있었습니다. 역시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번에는 굉장히 큰 사건으로 정면대결하고 싶어졌습니다. 사건의 바다로 내가 다이빙 하고 싶다. 그게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었죠.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국회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했었어요. 국회도서관의 거대한 자료들. 거기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취향은 접어놓고 그 당시 중앙일보, 경향신문, 다 보면서. 나는 아주 조그맣고 이 사건은 이렇게 거대한데, 그 사건에 80년대라는 더 거대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고, 아주 작은 내가 거기에 다이빙한다, 사건 자체를 존중한다, 사건에 대한 내 입장을 정하고 그것을 영화로 표현하자. 나는 어차피 충무로 감독이 됐다. 쫄딱 망했지만 그런 경계선의 갈등도 없어졌고. 이게 세 번째 네 번째 상관없이 나는 직업감독이 됐다. 안도감 플러스 실망감이 믹스된 거죠. 그렇게 되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 사건에 되게 심하게 몰입을 했어요. 나중에는 진짜 제가 범인을 잡을 줄 알았다니까요. 관련 주민들을 만나고 심성보 감독이랑 하도 많이 돌아다녔죠. 나중에는 범인의 생각을 알 거 같은 거예요. 그 사람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그렇게 접근한 결과물이 <살인의 추억> 이었던 거 같아요. 처음 얘기하지만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잠시 생각) 이런 심정도 있었죠. <플란다스의 개>를 만들었을 때 다들 나를 무시했었지 이런 이상한 앙심도 있었습니다. 촬영 김형구, 조명 이강산 감독님처럼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 약간 중년남자가 찍는 압도적인 완성도의 영화? 왠지 대종상에서도 환영받을 것 같은 향취의 영화를 찍어서 너희 모두를 압도해주마 이런 앙심도 있었습니다. (웃음) <플란다스의 개>는 재기발랄하고 영화 동아리를 갓 졸업한 애의 영화라면, 이번에는 이런 복수심도 있었어요. 내가 이런 영화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마. 좌 형구, 우 강산으로 모시고 송강호란 배우가 정면에 있는 상태에서 그런 삐뚤어진 마음도 있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_ 봉준호 감독에게 프로페셔널이라는 게 특별한 의미였던 거 같아요.

봉준호_ 충무로 직업감독이 된다, 직업감독이 된다는 데 동경도 있었지만 공포도 있었어요. 내 성격에 될 수 있을까. 그걸 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병신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잘났고 기가 세고, 무시무시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차승재 대표님도 그렇고, 소위 영화를 하신다는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이 있었어요. 내가 과연 저걸 할 수 있을까. 연기영화과를 지원했다가 포기할 때도 그런 생각했습니다. 참가번호를 달고 와서 면접관 앞에서 오열도 할 수 있고 탭댄스도 할 수 있는 애가 오십 몇 대 일로 올 텐데, 나는 변태 샌님인데 교수님 앞에서 춤추고 그럴 수 있을까. 그런 공포감이 항상 있었고, 그래서 연영과를 포기하고 영화 동아리를 했는데 그런 어정쩡함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영화판에 적응할 수 있을까. 조감독을 할 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십 년 베테랑인 사람에게 나는 매일 깨질 거야. 조감독인 저 사람이 보면 나는 되게 병신 쪼다일거야. 임권택 감독님이 소품 일부터 시작하셨나요? 현장에서의 모든 걸 짊어지고 출발해서 감독의 자리에 오르시거나. 예를 들면 임권택 감독님의 조감독 출신인 김영빈 감독님처럼 남성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감독은 그래야만 할 거 같고, 근데 관심 있는 건 영화밖에 없고, 또 만화를 좋아하니까 장면을 그려서 찍고 싶고 충무로 직업 감독으로서 형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많이 다르고 그게 계속 지속되었어요. 근데 <살인의 추억>을 하면서 좌 형구 우 강산을 모셔놓고 그런 것을 극복했었던 거 같아요. 강호 형님과 새벽 4시까지 나도 술 마실 수 있다. 그러면서 많이 편해졌던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_ 영화 아카데미를 입학할 때 롤 모델이었던 한국영화 감독은 그 당시 누구였나요? 이제 이 학교를 들어온 건 고민은 끝났고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되느냐, 마느냐만 남는다는 자기 선언 같은 것이니까요. 그때 내가 열심히 하면 저기까진 할 수 있어, 라는 꿈같은 것이라고 할까.

봉준호_ 나는 유영길 촬영감독님과 일하는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유영길 촬영감독
 
정성일_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어떤 영화가 마음을 끌었나요?

봉준호_ 많습니다. 극장에서 본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 장선우 감독님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게 94년도인데, (박광수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훨씬 뒤였고. (정지영의) <남부군>. 김유진 감독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유영길 감독님이죠. 유영길 감독님이 나를 감독으로 인정해주고, 같이 쇼트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나도 충무로 감독인 게 아닌가. 유영길 감독님은 성품도 점잖으시고, 게다가 젊은 감독들이나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감독에게 잘해주신다, 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곤조도 안 심하시고. (웃음) 당시 아카데미 동기였던 조형기 촬영감독이 유영길 감독님의 조수생활도 잠시 했었고. 유영길 촬영감독님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그런데 제가 입봉하기 3-4년 전에 98년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90년대 장선우 감독님 영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참 아름다운 영화고 <그들도 우리처럼>도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적으로 더 끌렸던 건 장선우 감독님 영화였어요.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경마장 가는 길>은 정말 좋아했었고. <우묵배미의 사랑>은 거의 대사를 외우다시피 했었죠. 집에 비디오를 아직도 갖고 있는데, 아, 그 영화는 블루레이가 나와야되는데. 그때 삐삐 시절에 인사말에 <우묵배미의 사랑>의 대사를 입력하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음성을 흉내 내면서) “혹시 백일도 선생 아니십니까?” 이대근 씨와 박중훈 씨가 논에서 만났을 때 그 대사. (웃음) 박중훈 선배님과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작년 부산에서 만나서 새벽까지 술 마시면서 <우묵배미의 사랑> 시절을 직접 들었어요. 거의 포장마차의 Q&A같은. <그들도 우리처럼>도 하셨잖아요. 박중훈 선배님께 직접 듣는 두 영화에 관한, 그 두 작품은 똑같이 90년도에 나왔지만 전혀 다른 영화잖아요. 장선우 감독님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신 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인 거 같아요. 더 많이 작품을 하시면 좋았을 텐데.
정성일_ 약간 우회를 하고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따라가면서 영화 안에서 차례차례 한국을 지워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는 동시대 한국을 찍었고, 그런데 두 번째 영화에서 동시대 한국을 버려두고 뒤로 물러나서 86년에서 91년 화성으로 옮겨갔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화성은 시간의 지표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아니라면 잘 잡히지도 않습니다. 다시 한강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면서 한국의 풍경 자체를, 말하자면 불길하게 만드는 거죠. 거기 있을 수 없는 어떤 잉여가 나타나면서. 그리고 나서 이상한 <마더>가 있습니다. 아주 이상한 영화. 이 영화는 한국의 불가능한 지리학에 관한 영화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그 동네 사는 사람도 저 골목이 우리 동네가 아닌데. 우리 동네는 저렇게 이어지지 않는데, 라면서 가상의 동네가 성립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설국열차>까지 오면 자기 영화 안에서 한국 자체를 블랙홀 안으로 계속 밀어 넣어버린다고 할까, 여기서 구체적인 한국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종종 구멍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부분이 미학적이거나 정치적 구멍이라는 블랙홀이라는 느낌에 멈추지 않고 무언가 다른 표현을 쓰고 싶어집니다. 저는 아직 그것을 표현할 개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기 영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는 지 궁금합니다. 약간 과도하게 단순하고 과격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

봉준호_ (잠시 생각) <플란다스의 개>는 심지어 제가 살던 아파트에서 찍었습니다. 신혼 생활을 했던 아파트와 제가 결혼 전에 살던 아파트 지하에서 찍고. 그 영화는 세트가 없었어요. <살인의 추억>은 아주 명확한 시공간 좌표가 있어요. 86년 화성에서 시작하는. <괴물>은 한강이 나오고. 글쎄, 어렸을 때 한국이나 한국 로컬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사진에 관한 아주 단순한 책에서, 바르트의 「밝은 방」 이런 책이 아니고, 사진 잘 찍는 법 이런 책이었는데 어린 제게 마음에 남은 것은 사진 잘 찍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찍을 때 그 사람에게 점점 다가간다. 그 사람의 눈과 얼굴을 향해서. 점점 하나씩 빼면서. 못 찍는 애는 점점 뒤로 물러난다. 나무도 넣어야지, 저런 것도 넣어야지, 이렇게. 어린 마음에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괴물>을 만든 후에 제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그 문구가 떠올랐어요. <괴물>은 한강에 괴물이 나오지만 한 발 물러서면 못난 가족이 있고, 더 한 발 물러서면 한국 사회가 있고, 더 빠져 나오면 미국이 있다. 그런 식으로 물러났던 게 아닌가. 물론, 더 버라이어티하고 풍자의 전시장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왠지 그런 작업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점 사람을 향해 다가간다. 그게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이었던 거 같아요. 다 지우고 싶은 거예요, 다른 것들은. 그때 <마더>를 준비할 때 그런 충동이 있었어요. 김혜자의 눈을 찍는 영화다. 다가가자, 더 다가가자. 영화에 핸드폰이 나오긴 하지만 시대가 뭔지 애매하게. 핸드폰이 나오지만 로케이션은 80년대인 거 같기도 하고, 도시인거 같기도 하고, 시골 같기도 하고, 또 그 언저리인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씩 지울수록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 <마더>의 흑백 버전에서는 컬러마저 지워버린 거죠.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애초의 의도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버전만 남겨야 한다면 흑백을 남기겠다고 말한 겁니다. 어쨌든 <괴물> 이후 <마더> 때 한국을 블랙홀에 밀어 넣는다, 이전에 그런 단순한 충동이 있었던 거 같아요. 사진을 찍을 때 점점 그 사람의 눈을 향해 다가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요. 그렇게 <마더>를 찍었다고 자평했었거든요. 그래서 <설국열차>에 맘 편하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온갖 나라 사람을 모아놓고 기차라는 용광로에 쑤셔 넣어서. 무대 자체가 이동하는 거잖아요. 단순 추상화된 기차라는 섹션, 이 섹션에 좌표가 없는 거죠. 송강호, 고아성 한국 캐릭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실 지금 개봉하는 핀란드 관객들은 그 사람이 한국어를 안 하면 그들이 한국 사람인지도 모를 거예요. 우리가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를 구별 못하는 것처럼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별 못하는 북유럽 사람들이 보면 송강호, 고아성이 한국말을 하는지 한국배우인지 모를 거란 말이에요. 그런 느낌을 원했거든요. 일부러 송강호 씨가 김치 얘기를 한다거나 태권도 얘기를 하지 않게 했어요. 한국이 아니라 동양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봤습니다. <살인의 추억>이나 제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찍었던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정말 멀리 돌아온 거죠.

임권택
 
정성일_ 산만하게 질문한다고 했으니 다시 산만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웃음) 봉준호 감독에게 한국영화는 김기영입니다. 여러 차례 김기영 감독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감독들로부터 자주 호명되는 유현목, 이만희, 하길종, 이장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임권택은 무엇입니까?

봉준호_ 김기영 감독님을 한국 영화다, 한국 영화는 김기영이다 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신도 가네토나 (아르튀르) 립스타인 같은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적이다, 한국 영화. (잠시 생각) 이를테면 일본 영화는 오즈다, 라는 식의 접근으로 김기영 감독님을 선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를 미치게 하는 요소가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들,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이나 <과부춤> 이런 것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 팬으로서, 팬심 이런 거는 압도적으로 큰 거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관해서 많이 수집했고 책이건 비디오이건. 하지만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 영화고 충무로다. 일본 영화의 오즈다, 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했어요. 임권택 감독님은 뭐랄까, 동경하는 부분, 존경과 또 다르죠. 물론 존경하지만 내가 정말 할 수 없는 것들만 다 하실 수 있는 분. (잠시 생각) 그 분이 갖고 계신 스타일이나 경지 같은 거는 제가 이해하거나 손에 안 잡히는 부분들이 많아요.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은 몇 편 안되지만 제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까 이런 게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궁금하죠. 저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서 훔쳐다 쓴다, 존경의 의미에서의, 그런 게 저에게는 불가능 한 거 같아요. 스타일이나 스케일이나 하시는 방식이 아름답고 동경의 대상이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새끼발가락 하나라도 걸치거나 오마주하거나 응용하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가장 최근에 본 건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오늘 아침에 <짝코>를 봤어요, 영상자료원의 DVD로. 그게 되게 좋아했던 임 감독님 영화인데 아주 옛날에 방송에서 해줬던 거라 제대로 된 프레임으로 본 건 오늘 처음 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모르겠어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항상 느끼는 감정은, (한참 생각)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새까만 후배로서 영화를 찍는 거리라고 해야 하나, 사건이나 인물이나 어떤 감정이나 되게 시니컬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감정을 강요하는 관객을 특정 위치로 몰아넣는 것도 아니고 특유의 선선한 느낌? 선선한 바람을 쐬는, 분명 아무것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거나 관객을 푸시(push)하지 않는데 감독님이 세팅한 대로 두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감정에 푹 젖게 되는, 그런 게 재밌잖아요.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거리 또는 주관적이고 감정을 저킹(jerking, 갑자기 낚아채버리기도)하는, 그 양쪽 다 아닌 거 같아요. 그 느낌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상상을 해도. 예를 들어 관객을 되게 몰입되게 몰고 가다가 쇼트를 바꿔서 어떤 의도된 디스탠스(distance)를 주면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삑사리의 장난을 저는 칠 수 있지만 임권택 감독님께서 축적되고 쌓는 느낌을 저는 모르겠어요.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작품마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죠. <길소뜸>의 언덕배기에서 마지막 걸어가는 장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서늘한 장면이 있겠고, <서편제>에서 오정해가 울면서 김수철 씨의 음악이 확 덮어버릴 때처럼 상대적으로 덜 들어가는 것 같은 것도 있겠지만. 임 감독님의 선선한 거리가 있는 거 같아요. 요즘 저녁의 선선한 날씨처럼. 선선하면서도 그 친구가 참 안됐어. 그 사건이 참 슬퍼. 그러면서도 전혀 울고 짜고 하는 건 아닌데, 묘한 거리가 분명히 있는 거 같구요. 두 번째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오늘 <짝코>를 보면서 다시 느꼈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보면서 또 느꼈지만 세월의 두께. 두 시간의 러닝타임 안에서 늘 영화라는 게 시간이 비약하거나 점핑하기도 하고 시간이 확장되기도 하고. 그걸 다루는 게 감독의 일이지만 영화 전체의 스케일에서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다, 개인이 세월을 감당한다는 느낌을 임권택 감독님처럼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유일무이한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시네마천국>에서 영화 초반 보여주다 말았던 키스 씬들을 라스트에서 다 보여주고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이 엄청 높은 볼륨으로 막 커지면서 관객들 다 울고, 물론 좋죠. 그것도 세월의 거리가 있고 알프레도는 지금 없고 그 사람이 모아둔 키스 씬 자투리만 남았지만 거기서 표현되는 영화의 시대, 광장에서 영화를 보던 시대, 알프레도의 시대는 갔고 극장은 허물어지고 온갖 것을 열나게 박아놨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세월의 거리와는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훨씬 작은 단위의 시퀀스에서도 임 감독님은 놀랍게 그것을 표현하시던데 그 비밀이 뭔지 모르겠어요. 미국식 에픽, 소위 서사. 오늘 <짝코>를 보니까 베르톨루치의 <1900>도 생각이 나더라구요. (로버트) 드니로와 (제랄) 드파르디유가 애기 때부터 십년에 걸친 얘기잖아요, 지주와 소작농의. 최근 디스크 두 개짜리의 확장버전도 봤지만, 거기서도 드니로가 머리 허옇게 바르고 나오지만, 임권택 감독님만큼 세월의 두께를 표현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나이든 분장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닌 거 같아요. 영화 전체 리듬을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컨트롤하시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취화선>에서 최민식 아저씨랑 안성기 선배님이 재회하는 장면, 눈발이 날리면서 갯벌에서 멀리서 찍잖아요. 그때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은 최민식 분장했네. 안성기 선배 머리 분칠했네. 롱 쇼트에서 서로 껴안네, 이런 게 아니라 저는 거기서 되게 실제 세월의 감정이 느껴져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강수연 선배가 먼 길을 돌아서 원래 멘토인 스님 앞에서 돌아왔을 때의 느낌들. 그 모든 일들을 섬에서부터 탄광에서 부터해서 그런 두께의 느낌이 전해오거든요. 유인촌, 한지일, 그리고 안병경 님을 거쳐 거쳐 오거든요. 그 모든 세월을 겪고 돌아오는 느낌. 그 느낌의 비밀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서편제>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플래시백. 오늘 다시 본 <짝코>에서도 김희라 선배와 최윤석 씨가 다 늙어서 갱생원 옷을 입은 채 서울시내로 나오잖아요. 학생 때는 못 느꼈는데 되게 이상한 카메라 워크가 있더라구요. 요즘 젊은 사람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두 인물 노인네가 얽혀서 싸우는데, 이 말도 웃긴데, 이 사람은 망실공비요!!, 그러면서 소리쳐도 경찰들은 “후 캐어즈(who cares)?” 라며 무심하게 지나가잖아요.(웃음) 노인네 둘이 엉켜 싸우는데 두 주인공이 카메라 밖으로 나가버려요. 도시를 지나가는 차를 잡고 있다가 카메라가 가만히 있으면 이 두 사람이 알아서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와요. 두 노인이 엉키고 있는 모습이 묘한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거든요. 금가락지를 발에서 빼고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산에서 김희라가 뛰어내리고 그 시간들과 단순히 노인분장이 아니라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다른 평론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부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었어요. 유난히 세월의 긴 폭을 다룬 영화도 많이 하셨잖아요. <씨받이>처럼 집중된 스팟(spot)의 영화도 했지만 저는 세월의 폭이 되게 넓은 임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취화선>도 그랬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도 그랬고, <짝코>도 그랬고. <서편제>도 포함이 되나요? 데이빗 보드웰의 개론서를 보면 스크린 듀레이션(duration), 플롯 듀레이션, 스토리 듀레이션으로 이렇게 기계적으로 3가지 듀레이션을 나눠놓고 서양 애들 식의 분석의 세계를 임 감독님은 이미 넘어서 있으신 거 같고, <짝코>나 <서편제>처럼 시간대가 막 왔다 갔다 하고 <짝코>는 플래시백에 또 플래시백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걸 벽돌을 쌓듯 축조하는 듯한. 세월의 몇 십 년, 두 사람이 걸어온 것. 베르톨루치의 <1900>보다 훨씬 더 세월의 두께가 깊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그 마술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데 싫어하실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은 봉준호 감독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영화를 찍어 오신 분이니까 당연히 영화를 보면서,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께서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왔으니까, 계속해서 무심하게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라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영화는 언제부터입니까?


<씨받이>
 
봉준호_ <씨받이>. 87년 개봉작인 <씨받이>입니다. 그 영화를 비디오로 출시했을 때 대여해서 봤습니다. 극장에서 못 봤어요. (그 영화가 개봉한) 87년은 고3 때였습니다. 제가 88학번이니까요. 하지만 임 감독님의 명성은 이미 신문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만다라>를 하셨으니까요. 사실 강수연 누나 때문에 보게 된 거죠. 동경해 마지않던. 중고등학교 발정기 때 보게 되었습니다. (웃음) 제 꿈과 로망이었던 강수연 선배를 이제는 실제 몇 번 뵙고 얘기도 나눠봐서 지금 이렇게 얘기하려니 되게 쑥스럽네요. 강수연 선배덕분에 임 감독님 영화를 보게 된 거죠. <씨받이>에는 분명 야한 장면이 있을 거야, 씨를 받으려면 분명 야할 거야. 야한 장면 없이 씨를 받지 않겠지, 라는 아주 고등학생인 마인드로.(웃음)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빌려봤는데 별로 야하지 않았고,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아직 박광수, 장선우 감독님이 등장하기 이전이었고, 제가 김기영 감독님에 빠지기도 훨씬 전이었고.

정성일_ 저는 그 영화를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한 직후, 그때는 남산에 있던 영진공(영화진흥공사) 지하 시사실에서 박광수 감독과 함께 보았습니다. 남산에서 보고 나서, 그때 박광수 감독이 이장호 감독님의 조감독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사무실이 종로 3가에 있어서 남산에서 보고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말이 없이 그냥 걷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박광수 감독이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딴 감독들은 다 자신이 있는데, 아직도 이 감독하고는 아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사람 앞에서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는 기분이 드는구나.

봉준호_ 박광수 감독님은 영화를 격투기처럼 생각하시나 봐요. 대결 같은. (웃음)

정성일_ 진짜 말없이 걸어가다가 갑자기 그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진심이었고 아마 평생을 담아두신 것 같아요. 결혼하면서 임 감독님을 주례로 모시고 지금도 매년 새해가 되면 세배를 하러 오시니까요.

봉준호_ 저도 강수연의 뭔가를 영접하는 마음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틀었다가 어, 하고 되게 놀랐어요. 첫째, 메시지가 그렇게 강렬할지 몰랐었어요. 조선시대 양반사회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직접적이지 않나요, 시작부터. 마당에서 강수연 언니가 뭘 하는데 안에서 사대부 양반들이 모두 모여 제사나 그런 걸 길게 논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이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형상화되어서 보여질 때, 이 집의 기와집의 기하학적 패턴들, 생각나는 게, 그 장면에서 기와지붕들이 구중모 기사님의 렌즈로 포착되었을 때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잖아요. 아마 렌즈 밑에서 버너 같은 걸로 뭘 피우셨던 거 같아요. 그런 비주얼도 처음 보는 거 였구요. 완전 다른 영화구나! <씨받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강수연 님이 별로 야하게 안 나왔다는 실망감을 압도하는. (웃음) 그때부터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봐야한다. 그래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도 서울극장에서 개봉할 때 가서 봤던 거고, <씨받이>와 <아제아제 바라아제> 사이에 있던 <아다다>는 극장에서 놓쳤는데 대부분 극장에 가서 봤어요. <개벽>, <서편제>, <태백산맥>, <장군의 아들> 전부 다. 그리고 대학 때 제일 큰 취미가 황학동 가서 비디오 사는 거였는데, 동대문운동장 지나서 4호선 역에서 내려가서 개봉하는 영화들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죠. <길소뜸>, <티켓> 이런 작품들 비디오로 봤습니다. 거기 사인도 받았는데 플라스틱이 아니라 비닐 케이스 밑으로 커버를 빼는. <천년학> 행사 뒷풀이 때 거기 종이 케이스에 사인도 받았습니다. <티켓> 마지막 장면에서 김지미 여사가 품에서 달걀을 꺼내듯이 (임 감독님의 비디오 자켓을 꺼내들면서) 슬그머니 다가가서 저기 너무 실례지만, (하고 인사를 드리니 임 감독님이) 자네 <괴물> 신기해, (라고 하셨을 때 개의치 않고) 아, 저기 (여기에 사인을 좀) 이러니까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구요. (웃음) <길소뜸>, <티켓>, <만다라>는 테이프로 구했었죠. 영상자료원이나 회고전할 때 본 것도 있고, <씨받이>가 어쨌든 출발점이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_ <씨받이>로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시작했다면 전혀 다르지만 뒤이어 만나게 된 <장군의 아들>을 보았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봉준호_ 이분이 어렴풋하게만 듣던(건데) 옛날에 장르 마스터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액션 그런 걸 한 번도 못 봤었거든요. <만다라>, <씨받이>만 머릿속에 있고. 근데 이 분이 한때 일 년에 4편씩 다찌마와리를 찍었다니! 그러다가 <장군의 아들>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특히 박상민이 싸울 때 직부감(vertical_high_angle)으로 찍은 쇼트들. 벽을 밟(고 뛰어올라 걷어차)는 장면. 미국 영화나 홍공 무술영화와 너무 다르고, 너무 재밌고 흥분되는데 동시에 6, 70년대 이분 액션영화는 어땠을까 추측해봤죠. 그때 그 가닥을 보여주시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재밌었어요. 장르 마스터였을 때 어떠했을까 추측해보게 되더라구요. 류승완이랑 얘기도 많이 해봤습니다. 자기도 벽 밟는 거 흉내내봤다고 하더라구요. (웃음) 인상적이었어요. 그 분이 <길소뜸>이나 <짝코>나 <아제아제 바라아제>나 그분 특유의 롱 테이크라든가 아주 유연하고도 마술 같은 리프레이밍(reframing)이라 해야 하나, 관객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프레임을 새로 잡는데 조잡한 트래킹이나 줌에 의지하지 않고. 표준렌즈나 단렌즈(wide-lens)를 끼운 상태에서 굉장히 절묘하게 리프레임 되면서 모든 미장센이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굉장히 마술적인 순간이 많았거든요. 근데 액션을 찍을 때는 이 분이 그런 걸 어떻게 하시려나. 빠른 편집으로 그걸 또 하시더라구요. 반대로 막 싸우는데 겹쳐진 상태에서 (인물들 사이의 동선이) 하나도 엉키지 않고, 액션을 저렇게 찍으실 수도 있는 거구나. 심지어 아주 옛날부터 저렇게 찍으셨나보다. 아직도 임 감독님이 6, 70년대 찍으신 액션 영화를 못 봤어요. 하나만 추천해주시면 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하셨고 뭐가 같고 다른지.

정성일_ 그렇다면 역시 저라면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를 먼저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게 부탁의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봉준호 감독의 사극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액션영화뿐만 아니라 임 감독님의 60년대 사극영화를 보신다면 몹시 흥미롭게 보실 수 있으실 거 같아요.

봉준호_ 저는 임 감독님의 사극은 유인촌, 김진아의 <연산일기>만 보았을 뿐입니다. 60년대 사극영화도 보고 싶네요.

<망부석>
<망부석>
 
정성일_ 추천한다면 저는 세 번째로 찍은 <망부석>이라는 영화를 먼저 고르겠습니다. 약점도 동시에 있지만 이미 세 번째부터 이 사람은 완성된 영화를 만들고 있었구나, 라는 당혹감마저 불러일으킨다고 할까요. 31살에 만든 신상옥 규모의 영화라고 할까.

봉준호_ 컬러인가요?

정성일_ 흑백으로 찍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첫 번째 컬러 영화는 67년에 찍은 <요화 장희빈>입니다. 이 영화도 사극입니다.

봉준호_ 말씀하시는 거에 제가 동의하는 것은 마술적인 순간들이 임 감독님 영화에, 이런 말은 외람되지만, 임 감독님의 별로라고 하는 영화에도 꼭 한두 번 씩 있는 거 같아요.

정성일_ 심지어 저렇게 포기한 영화에서조차도 이런 장면에서는 이렇게!!

봉준호_ 빈손으로 돌아가시진 않는구나(웃음)

(2부에 계속)


(註)_ 인터뷰 중의 대화는 가능하면 오가던 이야기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어휘들이 영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옮기지 않고 그냥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 까닭은 의미는 옮길 수 있으나 대화의 문맥에서 그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중의 일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충분히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마치 점프 컷처럼 진행될 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를 치고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일부독자들에게는 필요치 않을 수 있지만 이 점 이해를 바란다. 또한 서로에게 약간의 어색한 표현들도 대화의 ‘라이브’한 무드를 돕기 위해 수정하지 않았다.
※ 본 게시물에는 작성자(필자)의 요청에 의해 복사, 마우스 드래그, 오른쪽 버튼 클릭 등 일부 기능 사용이 제한됩니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