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해변의 캐리어 김수정, 2017

by.신은실(영화평론가) 2019-10-18조회 7,763
해변의 캐리어 스틸

2015년에 만들고 2018년에 개봉한 첫 장편 <파란 입이 달린 얼굴>(2015)을 두고, 김수정 감독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 열심히 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르고 붙이고 나누는 내 머리 속의 활동을 말한다. 그렇게 열심히 보다 보면 그것이 ‘전부의 세계’가 돼버린다.” 인용문의 ‘나’를 관객의 응시를 지정하는 카메라로, ‘전부의 세계’는 카메라가 본 것을 편집 테이블에서 자르고 붙이고 나눈 뒤 투사하는 뇌 속의 스크린과 같은 ‘프레임’으로 바꿔 읽어도 문제는 없을 터다. <파란 입이 달린 얼굴>의 카메라는  (앙드레 바쟁 같은 이가 영화의 중요한 존재론을 구성한다고 여겼던) ‘프레임’의 안과 밖을 오가며, 주인공 서영과 그녀 밖의 세계 그리고 서영의 자아와 타자를 규정하는 경계를 오가는 모든 ‘비존재’들을 빼어나게 가시화한다.    
 
   
그리고 김수정 감독은 신작 <해변의 캐리어>(2017)를 상재했다. 사전제작지원한 2017년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상영된 다음, 2018년 11월에 열린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독립영화여성감독전’에서 다시 보여졌다. “바다를 떠나는 여자와 바다에 도착한 남자의 맹렬한 하루”라고 간략히 소개된 <해변의 캐리어>(2017)는, ‘연극성’을 영화적 효과로 채용한다. 영화에서 ‘연극성’이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란 무엇인가』 중 「연극과 영화」 편에서, 연극과 영화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되고 친밀하며, <햄릿><헨리 5세><맥베스> 같은 희곡의 영화화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바쟁에 따르면, 영화의 ‘연극성’은 대사에 종속되는 각색, 또는 희곡을 사진처럼 복제하는 작업과는 다르다. 연극과 다른 영화만의 정체성을 만드는 차이로 바쟁이 꼽았던 두 가지 요소는 ‘배경’과 ‘데쿠파주’였다. 

인간이 개입해야 성립하는 연극에서 세트가 하는 역할은 “극이 펼쳐지는 장소”일 뿐이다. 반면, 연출 행위가 적극 개입해야 존재하는 영화의 배경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덕에 성립할 수 있다. 연극의 무대장치는 무대건축 구조의 한 요소로 머물기에 “물리적으로 폐쇄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으며, 경계가 쳐진 장소”다. 한편, <해변의 캐리어>의 부산 광안리 바다와 그곳을 굽어보는 창이 있는 노래방의 낮과 밤은 연극적 표현주의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무대인 동시에, 실재하는 자연과는 다른 특권적 자연, 즉 영화의 프레임이라는 세계를 이루는 상상적 공간이며 미학적 소우주다. 데쿠파주에 있어서도 김수정 감독은 발군의 창의력을 보여준다. <해변의 캐리어>의 프레임은 “주변 존재를 끊임없이 감지하는 현실의 일시적 결정”을 화편화한다. 자신의 퍼포먼스를 보았던 관객과 재회한 여자(김다인 분)가 나누는 대화와 포옹, 바다가 보이는 방을 찾는 남자(박종환 분)가 방문한 부동산 직원이 겨누는 총, 노래방을 방문한 손님들과 사장이 창출하는 리듬은, 관객이 연극 무대를 눈앞에 둔 듯 사건이 표출하는 희비극의 에너지에 공명하게 한다. 이러한 힘은, 장 콕토에게서 바쟁이 발견한 데쿠파주의 역량처럼, 쇼트-리버스 쇼트 촬영이 배우의 몸과 대사를 새롭게 분할하는 상상력에서 온다. 결국, <해변의 캐리어>에서 마주한 남녀 주인공의 “상호의식에 바탕을 둔 연극은, 연기가 현실과 대립하고, 공모가 무관심과 대립하며, 전례가 실익의 비속함과 대립하듯 세계의 다른 부분과 대립함을 필요로 한다. 의상이나 가면, 분장이나 언어양식, 또는 풋라이트 같은 것이 이와 같은 구별에 협력하고 있”다. 여기서 구별의 가장 분명한 징표는 무대인데, 대다수 프레임의 배경인 노래방과 바다가 분할된 몸과 대사를 구별하게 하는 무대다. 
 
 
 
“우리는 다만 공간이라는 단 한 가지 현실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영상으로부터 모든 현실을 퇴거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바쟁은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자연을 일절 고려하지 않은 공간 재현이란 있을 수 없으며, 스크린이라는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나란히 존재할 수 없고 우리의 세계와 대치하고야 만다. 기실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배타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관해서도, 영화는 세계이며 우주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자연이기도 하다.” 역시 바쟁에 따르면, 인간이 드라마의 주요한 원천임을 부인할 이유는 없으며 그런 연유로 영화는 연극과 겹쳐질 수도 있다. ‘자연’과 ‘무대’, 이른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의 경계를 자신의 몸과 목소리로 교란하는 두 주연 배우의 호연 덕에, <해변의 캐리어>는 연극적인 동시에 영화적이기도  하다. 

어떤 “전부의 세계” 또는 우주를 ‘상연’하는 <해변의 캐리어> 속 바다와 카메라는, “일단 커다란 짐 가방을 다 풀고 보자”는 연극연출가 출신 감독의 의도를, 배우들과 더불어 한 시간 남짓한 자연으로 형상화한다. 올 가을 개봉 예정이다.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 인용문은 ‘시각과 언어’가 출간한 1998년 한국어판(박상규 역)을 바탕으로 했으며, 필자가 일부 번역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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