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국영화의 진짜 위기에 대한 생각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19-10-22조회 9,934
벌새 스틸
한국 경제와 마찬가지로 한국영화도 일정한 주기로 위기설에 부딪친다. 2000년대 초반 몇 몇 대작들이 속절없이 흥행에 실패했을 때도 그랬고 2006년 한국영화가 거품 활황기를 지날 무렵에도 대공황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가 고상한 영화이론을 대하며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었던 1990년대 초반엔 한국영화 점유율이 10%대여서 위기설도 사치였다. 그런데도 가뭄에 콩 나듯 좋은 영화가 나오면 희소성이 있었고 적어도 저널리즘이나 학계, 영화광들의 관심은 질적으로 우수한 영화들에 대한 집중도가 있었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바닥을 길 때 영화문화에 대한 관심은 팽창해서 신문, 잡지, 방송에서 앞 다퉈 영화를 다뤘고 문학을 비롯해 예술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영화를 좀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어났다. 단명했지만 문학 외에 영상문화를 다루는 문화비평 계간지 ‘상상’과 같은 잡지들도 유행처럼 생겨났다.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영화주간지 ‘씨네 21’, 월간지 ‘키노’가 창간되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씨네 21’ 창간호 멤버였던 나는 출근길 전철에서 많은 대학생들이 ‘씨네 21’ 창간호를 사서 읽고 있었던 광경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춘향뎐>

세월은 흘러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적지 않은 영화제들이 지자체에 자리를 잡았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영화는 세계 영화의 흐름 안에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이 칸 영화제 경쟁에 최초로 진출했다고 한국의 영화인들이 칸 팔레 드 페스티벌 근처 카페에 모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축배를 들던 촌스런 회상이 무색하게 이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황금종려상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한국영화 위기설이 근래에 화제로 오르는 건 상업영화들의 제작비 대비 수익이 저조하다는 이유 때문일 텐데 ‘씨네 21’과 같은 영화잡지나 일간지의 특집기사를 보며 나는 그것 말고 더 할 말은 없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제작자나 투자자들의 돈의 흐름에 관한 진단, 돈이 흐르는 물꼬를 일방적으로 독점하고 배분하는 극장 플랫폼의 유통구조에 대한 비판, 거기다 안이한 기획에 따른 소재의 획일성에 대한 지적은 하나 마나한 소리다. 그것들에 대해 제작자나 투자자들이 누구보다 절실하게 고민하고 출구전략을 모색할 때 영화저널리즘은 부지런히 그들의 고민을 지상 중계할 뿐이다.
 

<극한직업>

당대의 한국 상업영화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는 나 같은 평자는 좀 다른 불만을 제기하고 싶다. 소재의 착상과 스토리텔링 구성방식과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겠지만 대다수 한국 상업영화들이 스토리텔링을 실어 나르는 화면들이 서로 분별이 힘들만큼 비슷하고 개성이 없어서 보기 괴롭다는 불만이다.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관한 형식적 아이디어들은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엄청나게 많이 축적돼 있다. 특히 젊은 감독들의 영화에서 다른 누구의 영화와 대치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에 대한 고민이 없는 걸 보는 건 괴롭다. 올해의 드문 흥행작들 가운데 <극한직업>(2018)은 개인적으로 이병헌 감독의 상업적 성공에 축하를 보내는 마음 한편으로 그가 전작들에서 슬쩍 드러낸 야심(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아서, 슬랩스틱 영화의 기운으로 시간을 확장하며 활기를 뿜어내려던 패기의 흔적이 없어진 것 같아서 아쉬웠다. <엑시트>(이상근, 2018) 같은 경우에는 초반의 재기 넘치는 출발에도 불구하고 재난극이 본격적으로 펼쳐질수록 화면이 너무 싸보여서 보기 민망했다. 배우들이 최선을 다해 기량을 펼치는 화면들의 구성과 연결이 관습적이고 편의적인 설명기능에만 매달리는 사이에 오락영화의 격도 떨어진다. 영화적 호흡이라고 반길 수 있는 화면들은 위 영화들보다 10배 이하의 작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벌새>(김보라, 2018)에서 오히려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벌새>

언젠가부터 내 주변의 사람들도 한국영화를 보고 오면 역정을 내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 특정 영화가 이슈가 된다고 하는 그 이유만으로 흥행이 되는 것이 영화 마케팅의 특이한 현상인데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점점 한국영화를 낮춰보기 시작하는 것도 바닥 인심이다. 잘 팔리는 상품이라도 최소한의 존경심은 받을 수 있어야 그 판이 오래 갈 수 있다. 이미지의 카리스마, 진실성, 복합성에 대한 탐구는 예술영화만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너무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만 이어붙이는 한국 상업영화가 걱정이다. 걱정도 팔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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