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거 영화의 복원이 지닌 의미에 대한 단상

by.변성찬(영화평론가) 2019-05-29조회 6,647
파업전야 포스터

2019년 5월, 4K로 복원된 옛날 한국영화 두 편을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하나는 <성춘향><신상옥, 1961)이고, 다른 하나는 <파업전야>(장산곶매, 1990)이다(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말하는 <성춘향>은 144분짜리 복원본이 아니라 영상자료원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의 개막식에서 있었던 90분짜리 ‘필름 판소리, 춘향’이라는 공연이다). 두 편의 영화 사이에는 대략 30년의 간격이 있지만 각자가 놓인 시대적 맥락에서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영화적 사건이 되었던 작품이고, 그런 만큼 이미 여러 번 기념 상영되고 그때마다 반복해서 이야기되어왔던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을 함께 묶어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게 만든 것은, 두 작품이 각각 취하고 있는 ‘공연’과 ‘상영’이라는 공개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거의 동시적으로 나를 찾아온 두 작품을 체험하며, 새삼스럽게 영화의 복원이 지닌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 또는 상념과 마주하게 되었다.

<파업전야>의 재개봉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등장한다. ‘90년 노동영화의 전설이 돌아온다!’,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30년 만에 극장 정식 개봉!’ 등이 그것이다. 30년 만에서 4K로 복원된 <파업전야>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분명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복잡한 질문을 품게 만들기도 했다. <파업전야>의 ‘전설’의 많은 부분은 영화의 상영 자체가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파업전야>의 필름은 더 높은 해상도로 복원되었지만, <파업전야>의 ‘영화적 사건성’의 어떤 측면, 즉 그 상영투쟁을 둘러싼 온갖 전설과 무용담은 기억되거나 증언될 수는 있을지언정, 복원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건성을 근사치에 가깝게 복원하는 방법은 당대에 다양한 위치에서 그 사건을 체험했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담는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이거나, 에이젠슈테인이 <전함 포템킨>이나 <시월>에서 했던 것처럼 대규모 대중을 동원하여 그 사건을 재연하고 그것을 영화 안에 담는 픽션적 방식일 것이다. 30년 만에 극장에서 (재)개봉된 <파업전야>는 오직 포스터의 배경 이미지(당대의 사건성을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는 다양한 신문 기사들의 스크랩-몽타주)를 통해서 그 사건성의 희미한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이번 <파업전야>의 (재)개봉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파업전야>를 다시 보면서, 뒤늦게 발견한 이 작품의 의미 또한 적지 않다. 오프닝의 배우 소개와 엔딩 크레딧에서 배역의 중요도나 역할의 기여도와 상관없이 오직 ‘가나다 순’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데서 드러나는 ‘장산곶매’의 철저한 ‘공동창작’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사건성이다. <파업전야>가 80년대 리얼리즘 미학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할리우드 리얼리즘의 개인적 영웅서사와 소비에트 리얼리즘의 전형성의 미학 사이의 긴장을 품고 있다는 점은, 새롭게 이야기될 만한 가치가 있다. 어쩌면 <파업전야>의 리얼리즘이 보여준 사건성은 당대의 노동현실을 충실히 취재-반영한 후 앞서 말한 혼종성의 리얼리즘 스타일로 그것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앞서 내다보고 있는 일종의 ‘예지적 리얼리즘’이라는 점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안에서 한수(김동범)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스패너를 들고 일어나게 한 것이 용역 깡패들의 무자비한 폭력이었듯, 영화 밖에서 <파업전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대중들이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떨쳐 일어나게 만든 것은 당시 공안 당국의 과잉 탄압이었다. 영화가 당대의 노동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던 만큼이나, 당대의 정치현실이 영화의 만듦새를 반영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예지적 리얼리즘의 측면이 <파업전야>의 ‘영화적 사건성’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그것의 복원은 불가능한 것에 가까운 것이다.
 

‘필름 판소리, 춘향’은 김태용 감독의 연출, 이소연 소리꾼의 판소리 공연, 손성제 및 최혜원 이라는 두 뮤지션의 현장 연주를 통해 재창조된 ‘복합예술 공연’이다. 거의 60년 만에 이루어진 이 공연은 애초에 <성춘향> 개봉 당대의 ‘영화적 사건성’의 반복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던 기획이다. 그 공연은 영화 <성춘향>이 재매개한 원전인 판소리 현장 공연과 결합된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역-재매개로서의 복원이고, 두 뮤지션이 연주하는 전자음향과 결합된 여러 매체 사이의 크로스-오버라는 점에서는 새롭게 반복되는 재매개로서의 복원이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가 한 편의 영화 안에 이 복잡한 재매개 과정을 담아내려 한 시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필름 판소리, 춘향’은 그것을 영화 작품 밖으로 풀어헤쳐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자의 시도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복원된 몇몇 무성영화의 공개 시에 시도되었던 공연을 유성영화인 <성춘향>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디지털 복원은 원래 영화의 시청각적 질료를 최대한 원래의 것과 가깝게 복원해 내거나(<성춘향>의 경우), 심지어 그것보다 더 나은 해상도로 복원해 내기도 한다(<파업전야>의 경우). 그러나 이 복원의 충실도는 매체의 질료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성과다. 하지만 한 편의 작품이 갖는 영화적 사건성에는 그 매체의 질료적 차원 이상의 것이 항상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상영조건과 상영 형식의 측면(또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당대의 사회적 조건과 관객성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파업전야>의 (재)개봉은 일종의 ‘과소 복원’이고, ‘필름 판소리, 춘향’ 공연은 일종의 ‘과잉 복원’이다(이 ‘과소’ 또는 ‘과잉’이라는 표현은 단지 상대적인 비교를 위한 묘사적인 형용사일 뿐, 어떤 가치 평가적 함축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과소와 과잉은 과거의 영화가 지닌 사건성을 총체적으로 복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총체적 복원 불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복원의 정치학을 위해서는 매체의 질료적 측면의 복원만이 아니라, 그것의 공개 형식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과 실험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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