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의 비애 녹여낸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 취기가 돌면 부르던 ‘고향’ 한 소절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8-08-14조회 2,846

영산 유현목(詠山 兪賢穆) 감독은 유난히 맥주를 좋아했다. 맥주잔이 몇 차례 채워지고 취기가 돌면 으레 정지용의 ‘고향’을 불렀다.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그러고 나서 거의 예외 없이 “다음 구절은 뭐였지?” 하고 물었다. “산꿩이 알을 품고요.” 이렇게 옆에서 거들면 유 감독은 안경테에까지 내려온 은발을 손으로 빗어 올리며 “어이, 중!” 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는 내가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로 스님이 아닌 중이라 불렀다. 채동선이 작곡한 ‘고향’은 작자인 정지용 시인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이은상의 ‘그리워’로 가사가 바뀐 사연이 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리워’보다 ‘고향’에 익숙하다. 유 감독은 ‘고향’의 한 소절을 부르고 나서 이탈리아 가곡 ‘산타루치아’로 노래를 바꿔 불렀다. 그는 청년 시절 바이올린을 켰을 만큼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으나 여전히 가사는 이어지지 않았다.

한번은 자정이 가까울 무렵 유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받았더니 ‘고향’의 전문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일간신문에 ‘나의 애송시’라는 주제의 글을 청탁받았는데 내일까지 써야 한다는 것이다. 유현목 감독이 이 시를 유난히 좋아한 데는 실향민으로서 남다른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 <오발탄> (1961)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살아생전 역사가 된 영화인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3?8선 이북, 봉산탈춤으로 유명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밖 벽지 태생인 그에게는 6.25전쟁 때 과수원에 피신했다가 폭격으로 죽은 아버지와 형에 대한 어두운 내력이 있다.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유 감독은 1939년 보통학교를 마치자 서울의 휘문중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2학년 때 중이염으로 휴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의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은 것은 이때의 후유증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1946년 늦여름 남북한 단독 정부를 둘러싼 대립으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그는 두 친구와 함께 3?8선을 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도 1.4후퇴 때 누이와 동생을 데리고 월남했다.

그는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소망대로 대한감리교신학교에 응시해 낙방하자 생각을 바꿔 문재들이 모이는 동국대학 국문과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극장과 도서관에 드나들며 공연을 보고 「희곡과 시나리오의 유사성」 「희곡론」과 같은 이론서를 찾아 읽었다. 이는 뒷날 정창화 감독의 첫 작품 <최후의 유혹>(1953)의 시나리오를 쓰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동국대학교 시절 영화연구소를 만들고 <해풍>이라는 45분짜리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인천 앞바다 영종도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대학가의 화제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물고기를 뜯어 먹는 미친 어부 역을 능청스레 해냈다.

전란으로 흩어졌던 영화계가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할 무렵 그는 이규환 감독의 조수로 들어가 <춘향전>(1955)의 제작에 참여한다. 이를 계기로 뒷날 한국배우전문학원을 창설한 김인걸의 부탁으로 <교차로>(1956)의 메가폰을 잡게 된다. 쌍둥이 자매(조미령 분)를 등장시킨 이 데뷔작에서 그는 내용보다 기교에 역점을 뒀다. 잇따라 <유전의 애수>(1956)와 <잃어버린 청춘>(1957)을 내놓는다.

내가 유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유전의 애수>였다. 재개봉관인 동화백화점(신세계백화점 전신) 3층에 있던 동화영화관이었다. 대학 1학년 때였다. 그 뒤 최무룡 주연의 <잃어버린 청춘>과 김승호 주연의 <인생차압>(1958)을 보고 주목하게 됐다. 이 무렵 유 감독은 열애 중이던 박근자 화가와 화촉을 밝힌다. 그런데 정작 유 감독을 뵙게 된 것은 <구름은 흘러도>(1959)를 내놓고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수확으로 꼽히는 차기작 <오발탄> (1961)을 준비할 때였다. 1960년 가을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유 감독은 내로라하는 영화인들이 즐겨 모이는 명동의 나일구 다방을 외면하고 부근의 다른 다방에 포진했다. 자리는 협소했으나 <오발탄> 각색을 맡은 이종기, 조홍정, 이이녕 등과 나소운, 홍은원과 같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드나들었다. 나는 이 무렵 이영일 영화평론가의 소개로 이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계속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만나게 되고 내 결혼식 때는 청첩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뒤 이분의 추천으로 동국대학교에서 ‘한국영화사’ 강의까지 하게 되었다.

그가 2009년 6월 28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어느새 그가 떠난 지도 9년째가 된다. 다음은 내가 지은 성남 모란공원 묘역의 ‘영산(詠山) 유현목 추모비’의 비문 「이미 역사가 된 당신/ 유현목 감독님을 보내며」의 전문이다.

역사란 결코 만만한 게 아닌데/ 당신은 이미 살아생전에 역사였습니다./ 그때 나는 갓 스물 네 살이었습니다.// 4?19 학생 혁명의 격랑이/ 채 사그라지지 않은 1961년 5월 16일,/ 군화가 짓밟고 지나간/ 서슬 퍼런 광화문 거리 국제극장에/ 겁 없이 고개를 내민 영화 간판 하나.// 오오, 동강난 산하/ 실성한 해방촌의 ‘오발탄’이여./ 실향민의 설움으로 빚은/ 분단시대의 절규/ 사실주의 영화의 정점이여./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때 걸린 영화 한 편이/ 이렇게 큰일 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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