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검열 그리고 이만희 영화 이만희의 <휴일>(1968)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8-03-20조회 4,265
휴일

196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영화는 1960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르였다. 1960년대를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라 부르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물론 수치로도 증명된다. 영화 관객 수는 1961년 5,800만 명에서 1969년 1억 7,300만 명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고(이 기록은 2012년에나 깨졌고, 2013년부터는 총 관객 2억 명을 넘는 영화 시장이 되었다.) 1962년 100편을 훌쩍 넘긴 제작편수는 1965년 189편을 기록하더니 1968년부터는 한 해에 무려 200편 넘게 제작되었다. 유례없는 양산 시스템에서 특히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은 대중 관객과의 접점을 의미하는 장르다. 한국의 전통적인 영화 장르이자 지금도 가장 유효한 멜로드라마와 스릴러·액션영화가 스크린을 주도하면서 코미디, 시대극, 괴기 등 다양한 장르가 다작의 성분을 채웠다. 하지만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역사를 양적 가치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시기 대중성과 작가성을 두루 만족시키는 뛰어난 감독들이 군집해 각자의 스타일로 한국영화의 미학을 개척해갔다. 이들을 1960 년대 ‘대중적 작가주의’ 감독군으로 부르는 데 동의한다면, 그중 이만희는 꼭 언급해야만 할 존재일 것이다. 그는 할리우드가 개발한 기존 장르를 활용하면서 재해석했고, 대사로 설명하기보다 영상과 분위기로 관객이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멜로드라마도, 스릴러 액션영화도, 심지어 시대극도 그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태어났다. 무엇보다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영화 화법까지 가장 독창적으로 수용한 감독이었다. 

스타 감독으로 등극 그리고 시스템과의 고투 

1931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난 이만희는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광무극장, 동화극장 등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감독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렇게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보낸 그는 6·25 전쟁 발발 후 암호병으로 근무하다 중사로 만기 제대, 1955년경 유치진이 운영하는 연기학원을 다니며 극단 생활을 시작한다. 1956년 안종화 감독의 연출부로 영화에 입문했고, 명동파 건달이었지만 1960년 이후 뛰어난 영화제작자로 이름을 날린 이화룡의 화성영화사에서 <주마등>(1961)으로 데뷔 했다(이화룡은 역시 젊은 감독이던 강대진의 <마부>(1961)를 다음 작품으로 택했다). 1962년 액션스릴러 <다이알 112를 돌려라>로 충무로의 이목을 끈 후 19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흥행 성공으로 일약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1965년 <7인의 여포로>의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 생활을 했지만, 이듬해 <시장>(1965), <물레방아>·<군번 없는 용사>·<만추>(1966) 4편을 1966년 한국영화 ‘베스트 10’(부산영화평론가협회 선정)에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1968년에는 다시 당국의 검열로 고초를 겪었다. 바로 <휴일>이다. 이 영화는 사전 각본 심의에서 3차례나 반려되었는데, 첫 번째 반려 이유는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두 번째는 “주체성은 있으나 예술성이 없다”, 세 번째는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는 황당무계한 판정이었다. 이 영화의 제작자 전옥숙(대한연합영화사)과 이만희는 시나리오 심의를 넣어놓고 제작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8년 3월경 촬영에 들어가 문화공보부의 개작 지시까지 반영해 작품을 완성했지만, 결국 영화는 개봉되지 못했다. 아니 제작자와 감 독이 개봉을 포기했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가 대중에게 상영된 것은 37년이 지난 2005년이다. 다행히 한국영상자료원의 보존고에 있던 필름을 찾아내 공개할 수 있었고, 영화평론가들로부터 그해 개봉작들과 함께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1974년 영화진흥공사가 제작한 국책전쟁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연출했으나 의견 차이로 편집권을 포기하는 사건이 있었고, 1975년 4월 <삼포가는 길> 후반 작업 중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말 청춘들을 위한 비가 

많은 평론가가 언급하고 있듯이, <휴일>은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이다. 말하자면 스토리의 전달보다는 인물이 처한 공간의 풍경과 영화적 분위기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영화다. 카메라는 클로즈 숏 사이즈로 인물과 밀착해 허욱과 지연의 감정을 포착하다가도, 익스트림 롱 숏으로 물러난 황폐한 공간 속에 그저 둘을 던져놓기도 한다. 가난한 연인은 그들의 내면 풍경이라 할 초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남산 공원을 그저 말없이 걸을 뿐이다. 숏을 나누지 않는 회화적인 구도의 흑백 화면은 무척 슬프지만 또한 아름답다. 사실 스토리는 간단하다. 허욱(신성일)과 지연(전지연)은 일요일마다 만나는 연인이다. 무일푼인 허욱은 사기를 쳐서 택시를 타고 담배를 살 정도이고, 지연 역시 커피 값이 없어 다방 앞에서 그를 기다린다. 어렵게 말을 꺼낸 지연은 중절 수술을 받겠다고 말하고 허욱은 지연을 공원 벤치에 남겨두고 수술비를 구하러 친구들을 찾는다. 같은 처지의 룸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 만무했던 그는 결국 부자 친구의 집에서 돈을 훔쳐 나온다. 둘은 산부인과로 향하고 결국 그녀는 수술을 받는다. 그사이 허욱은 카페에서 만난 여인과 술집을 전전하다 공사장에서 정사를 나누려 한다. 교회 종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지연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쫓아온 규제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은 허욱은 지연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절규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전차를 타고 종점에 내려 머리를 깎아야겠다고 읊조린다. 과연 이 장면은 그의 새로운 출발일까, 생의 마지막일까.

오리지널 시나리오, 심의대본 그리고 필름 <휴일> 

현재 우리는 영화 <휴일>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심의 전 버전), 심의 대본 그리고 당시 개봉되지 못한 필름이라는 세 가지 텍스트를 접할 수 있어 각 버전 간의 차이와 당국의 검열이 미친 영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이라는 내셔널 필름 아카이브의 존재가 가치를 빛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심의 서류는 남아 있지 않은데, 이는 정식 개봉을 하지 못한 것 즉 당국으로부터 상영 허가를 받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이후 버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시작과 끝에 룸펜 청년 허욱의 자살이 그려진 점이다. 시나리오의 시작은 한강에서 한 사공이 시체를 건져 올리는 것이고 마지막은 허욱이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신과 그의 친구들이 부패한 시체를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증언하는 신으로 끝난다. 이 영화가 전하는 암울함에 정점을 찍는 구도였고, 검열을 거친 심의용 대본에서는 허욱의 자살을 지우는 방식으로 물러난다. 다른 삭제된 장면 중 눈에 띄는 것은 연인 지연이 수술비를 구하러 간 허욱을 기다리다 잠깐 꿈을 꾸는 신이다. 꿈속에서 둘은 마치 <만추>의 동물원 장면처럼 시내 곳곳에서 데이트를 하다, 지연이 택시에 치여 죽는 것으로 끝난다. 지연의 죽음을 예비한 장면이지만, 역시 어두운 분위기를 지우기 위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심의 대본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마지막 장면이다. 허욱은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보통 연인들처럼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했던 지연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질주하다, 이제 전차 철로가 끊긴 자리에 서 있다. “서울, 남산, 전차, 술집주인 아저씨, 하숙집 아주머니, 일요일 그리고 모든 것. 나는 다 사랑하고 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어. 이제 일요일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 커피 값이 없어도 돼. 안녕, 안녕.”이라는 시나리오 상의 내레이션이 영화 속 허욱의 목소리로 흐르지만, 영화에서는 자살을 의미하는 “안녕, 안녕” 대신 “이제 곧 날이 밝겠지… 머리부터 깎아야지, 머리부터 깎아야지”라는 대사로 대체된다. 한국 사회의 남성에 대한 오래된 폭언 중 하나인 “인간이 되려면 군대부터 갔다 와야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청춘들에 대한 위로와 공감의 자리는 계몽과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멋진 일요일>의 멜랑콜리 버전 

1968년작 <휴일>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明)의 초기작 <멋진 일요일 素睛らしき日曜 日>(1947)을 떠올리게 한다. 이만희 혹은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이 영화를 혹은 그 시나리오를 접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멋진 일요일>은 전후 도쿄를 배경으로 일요일에만 만나는 유조와 마사코라는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다. 전철역에서 만난 유조와 마사코는 고작 35엔밖에 없어 변변한 데이트를 할 수 없고, 그저 둘은 도쿄의 곳곳을 떠돌 뿐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야외음악당 시퀀스에서 둘만의 음악회를 열며 희망을 꿈꾼다. 이처럼 <멋진 일요일>은 전후 일본 젊은이들에게 위안을 안기는 영화였지만, <휴일>은 1960년대 말 한국 청춘들에게 멜랑콜리의 심연을 느끼게 하고 이를 통해 위로의 손짓을 건넨다. 두 영화는, 일요일마다 만난다는 설정이라든지(자세한 이유는 둘 다 말해주지 않는다), 담배가 중요한 소품으로 기능한다든지, 연인들을 더욱 움츠리게 만드는 겨울바람이라든지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 <휴일>이 <멋진 일요일>의 암울한 버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만희의 무의식 속에 <멋진 일요일>의 장면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지만 예견하기도 한다 

1968년 제작편수 212편, 1969년 229편 등 양적 지표는 1960 년대 후반을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인식하게 하지만, 그 내면은 이미 1970년대의 쇠퇴기를 예비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의 흥행 실적과 질적 수준이 급격히 하락하는 중이었고 그 배경에는 당국의 신경과민적인 영화 정책과 검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공영화, 계몽영화 제작을 강제하는 것으로 모자라 검열 당국은 감독의 편집권까지 빼앗았다. 예를 들어 유현목이 리메이크한 <아리랑>(1968)은 일제시대가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일장기가 나오는 장면이 모두 삭제되는 등,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이어지는 검열과 관련된 웃지 못할 해프닝이 그 전조를 보였다. 때마침 텔레비전의 공세가 거세지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기나긴 불황의 터널로 접어들었다. 1971 년 202편을 유지했던 한국영화는 1972년 122편으로 급감했고, TV와 외국영화 대작 사이에 끼어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무협액션영화로 연명하게 된다. 1970년대가 극심한 암흑의 시대였다고 해서 청년들의 에너지와 희망마저 꺾을 수는 없었고, 영화는 이를 포착해 작은 위안들을 발신했다. 서구영화의 뉴웨이브 정신과 교감하는 청년 감독들이 신선한 영상 감각을 앞세운 ‘청년영화’로 젊은 관객들과 만난 것이다. 홀연 데뷔작으로 단관 46만 관객 동원의 사고를 친 이장호가 바로 그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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