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괴물>(2006) 현대 한국영화의 정점을 만들다 천만 관객 시대 | 2005~2010년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장) 2019-05-27조회 1003
괴물 스틸
현서를 찾으려는 강두 가족의 사투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산업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에 분 산업의 활기는 2006년 정점을 찍었다. 2003년부터 80편대를 기록하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6년을 기점으로 100편을 넘어섰다. 2001년 50%를 넘어 2004년부터 60%대에 육박하던 한국영화 점유율도 급기야 2006년 63.8%를 기록했다. 현재(2018년 기준 50.9%)까지도 가장 높은 수치로 기록된 비율이다. 이처럼 2006년이 한국 영화 산업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보여준 해였다면, 2007년 이후는 위기 혹은 조정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2006년 7월 긴 논란 끝에 결국 스크린쿼터 즉 한국영화 의무 상영제도가 73일로 축소되었고, 때마침 버팀목이라도 무너진 듯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가 거세졌으며, 한국영화 관객은 감소했고 수익률과 수출 실적 또한 하락했다. 2007년 50%로 내려선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8년 42.1%까지 떨어졌다.

2007년부터 시작된 산업의 하락세가 불과 2년 만에 극복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2009년 시장과 관객의 신뢰를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2011년부터는 극장 관객과 매출액이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영화도 4년 만에 다시 시장점유율 50%대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2012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산업은 관객 수, 매출액, 수익성 면에서 도약하며 불황의 그늘을 완전히 떨쳐냈다. 한국영화 점유율도 다시 60%대에 육박하게 된다. 2013년 영화산업은 다시 호황을 맞이한다.

‘천만 영화’가 말해주는 것들
2004년 <실미도>(강우석, 2003)와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로 시작된 천만 관객 영화가 한국 영화 산업의 상승 국면과 연동되어 등장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2005년 <왕의 남자>(이준익)가 1,200만, 2006년 <괴물>(봉준호)이 1,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2000년대 중반 영화 산업의 활력을 대변했다. 그리고 2년간의 체질 개선을 거친 2009년 <해운대>(윤제균)가 천만 영화 대열에 다시 합류했다. 따져보면 천만 영화가 등장한 것은 산업이 회복됐다는 신호가 강해진 시기다. 이후에도 2012년 <도둑들>(최동훈)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2013년 <7번방의 선물>(이환경) <변호인>(양우석), 2014년 <명량>(김한민) <국제시장>(윤제균), 2015년 <암살>(최동훈) <베테랑>(류승완) 등 매년 2편씩의 천만 영화가 잇달아 등장하며, 한국영화산업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의 천만 관객 동원은 무엇보다 영화산업의 양적 규모를 확대해나가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산업적 의미가 큰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천만 영화는 제작사의 역량이나 투자배급사의 물량 공세만으로 달성되기는 힘들다. 넓은 층위의 관객들에게 일정한 공감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개봉 시점 한국 사회의 분위기나 관심사와도 들어맞아야 한다. 어쩌면 천만이라는 숫자는,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을 넘어선 일종의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천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의 장르나 경향으로 일별하기 힘든, 각기 당대의 복잡한 맥락이 새겨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괴물>은 대형 배급사가 150억 원의 총 제작비를 투여하고 스크린 독과점 이슈까지 발생시킨 영화였지만, 영화적으로는 다른 천만 영화들이 목표로 한 대중적 화법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봉준호라는 특별한 감독이 산업과 행복하게 결합한 덕분이었다.
 
봉준호 감독
 
영화광 출신의 감독, 글로벌 영화로 나아가다
한국의 ‘영화청년’은 어떻게 감독이 될 수 있을까. 봉준호는 한국에서 감독이 되려는 영화청년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 된 감독이다. 영화광으로 출발한 그가 개척한 길은, 현재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인상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구체적인 행보뿐만 아니라 독특한 감각의 영화 세계, 양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1969년생인 봉준호는 대학에서는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로 입학해 영화를 공부했다. 대학 동아리에서 첫 단편영화 <백색인>(1994)을 만들었고, 영화아카데미에서는 <프레임 속의 기억>(1994)과 졸업 작품으로 <지리멸렬>(1994)을 연출했다.

이후 충무로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김유진·장현수·정지영·박철수·박종원·장길수·강우석, 1996)에서 각색과 연출부를 경험했고, <모텔 선인장>(박기용, 1997)에서 각본과 조감독을 맡았고, <유령>(민병천, 1999)의 각본도 썼다. 많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6년가량 그저 버텨보는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감독 데뷔의 기회는 후자의 두 작품을 제작한 차승재의 우노필름에서 얻었다. 한 대학 시간강사가 일으킨 소동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빗대 보는 <플란다스의 개>(2000)는 개봉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이다. 특히 봉준호 영화 세계의 원형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다시 확인해야 할 영화이기도 하다.

2003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1980년대의 시대상을 투영해 풀어낸 <살인의 추억>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하며 연출 역량을 인정받았고, 2006년 세 번째 장편 <괴물> 역시 국내를 넘어선 흥행과 비평적 지지를 받으며 봉준호는 21세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2009년 네 번째 장편 <마더>는 모성을 미스터리의 소재로 삼아 한국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며 국내외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2013년 450억 규모의 다국적 프로젝트 <설국열차>로 글로벌 영화 신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2017년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가 제작한 <옥자>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처음 진출하기도 했다. 봉준호는 이제 한국영화를 넘어, 그의 이름 자체가 영화 브랜드가 된 국제적인 감독이 되었다.
 
현서가 갇혀 있는 하수구 공간
 
미학으로 승화된 스타일, 한국사회에 대해 발언하다
영화 <괴물>이 탁월한 지점은, ‘괴수영화’라는 장르적 표면(환상)과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발언(리얼리티)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낸 것이다. 이는 영화의 오프닝부터 정교하게 설계된다. 첫 장면은 2000년 시점의 미8군 용산기지 영안실, 감독은 수평 구도의 미장센과 인물의 어깨너머 쇼트를 활용해 관객을 영화 속으로 이끈다. 2000년 실제 발생한 사건인 주한 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을 직접 인용한 영화는, 바로 2002년 한강에서 낚시하던 사람들이 돌연변이 물고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2006년 한 중소기업 사장이 한강으로 떨어져 자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극 중 동료/관객에게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살아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한강 밑으로 빠져든다. 우리 소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둔하게 살고 있는가.

빗물이 떨어지는 수직 구도의 한강을 배경으로 ‘괴물’의 타이틀이 나오고, 영화는 한강변 매점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노란 염색 머리의 남성 강두(송강호)를 보여준다. 아버지 희봉(변희봉)이 운영하는 매점에서 딸 현서(고아성)와 같이 사는 그는 한눈에 봐도 좀 모자란 사람이다. 하지만 강두는 딸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인 애정을 보이는 인물로, 이후 영화가 진행하면서 현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순간적으로 똑똑해지고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희봉과 현서가 매점 안에서 고모 남주(배두나)의 양궁 대회 중계를 보고 있는 동안 한강변에 괴생물체가 나타난다. 한강을 찾은 시민들과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낀 강두는 그들과 같이 괴물에게 먹을 것을 던지는 등 장난을 친다. 우매한 대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평 구도가 인상적인 장면이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괴물이 지상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한다. 백주 대낮 살육의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영화는 한강 다리 위 버스 속 할머니의 시점으로 그 전경을 보여주며 현실감을 놓치지 않는다. 강두는 현서의 손을 잡고 도망가다 놓치고, 현서를 꼬리에 감은 괴물은 한강 속으로 사라진다. 희생자들 가족이 집결한 단체 장례식장, 희봉의 말대로 현서 덕에 남주와 남동생 남일(박해일)까지 모든 가족이 모이게 된다.

죽을 힘을 다해 현서를 찾는 이들은 국가가 아닌 강두의 가족이다. 2014년 4월 전 국민의 비극이 된 사고처럼, 국가 시스템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국민의 생존을 방해할 뿐이다. 시민들 역시 행동은 고사하고 감정적으로도 다른 이의 불행에 연대하지 못한 채, 강두 가족의 사투를 방관한다. 어쩌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는 전광판의 TV 뉴스를 보며 횡단보도에 서 있는 퇴근길 직장인들의 모습에서 압축적으로 묘사된다. 역시 수평 구도를 활용한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실체도 없는 바이러스 보도에 이목을 빼앗겨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이다.

과연 영화 속 괴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국가주의 혹은 미국이라는 패권국에 대한 비판일까. 아니면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 개인의 이기심 나아가 휴머니즘의 상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의 복합체가 괴물일 것이다. 권력 피라미드의 하층부에서 수평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민중은, 괴물에 잡히는 순간 수직 구도의 하수구로 떨어져 살아 나오지 못한다.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한강으로 떨어져 자살한 남성이 경고했듯이, 우리 소시민들은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자신만 챙기다가 계급 구도의 가장 밑바닥으로 하강해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앞둔 순간, 괴물은 현서와 남자아이를 삼킨 채 다시 땅으로 올라온다. 결국 괴물을 물리친 것은 현서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진한 강두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현서의 시신을 찾는다. 끝내 감독은 해피 엔딩을 선택하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은 눈이 내리는 한강변의 매점이다. 이제 강두는 현서가 돌보던 남자아이와 단둘이 산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을 지키는 이는 여전히 총을 놓을 수 없는 검은 머리의 강두다.

에필로그
현재 한국영화는 150억 원 이상의 고예산을 투여하는 대작 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2006년 <괴물>이 만들어낸 정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지점은 바로 한국사회에 대한 발언과 작가주의적 연출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으면서도 천만 이상의 관객으로부터 응답받은 것, 즉 작품성과 흥행성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는 의미의 성취다. 감독의 발언은 선동이라기보다 세련된 우화에 가까웠고, 섬세한 연출 스타일은 미학으로 승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 상업영화의 오랜 경계까지 무너뜨렸다. 지금 ‘천만 영화’라는 욕망을 품고 선보이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과연 <괴물>이 도달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가? 흥행 성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주목받지 못하는 고예산 영화들이 반복되는 현재야말로, 산업의 양적 성장을 질적 수준으로 전환시킨 13년 전의 <괴물>을 복기해볼 시점일 것이다.

2016년 7월호부터 시작한 ‘한국영화사 100년’의 연재를 예정했던 20회보다 빠른 18회로 마치게 되었다. 한국영화 제작이 처음 운을 뗀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부터 2000년대 박찬욱과 봉준호의 작품까지, 이 연재는 각 5년의 시기마다 주목해야 할 감독과 그 영화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술영화보다는 대중영화라는 장에서, 작가주의를 견지하면서도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을 선정했고, 대체로 그 작품은 시대를 대표하는 상업영화로 기록된 경우였다. 2010년대를 대표하는 두 감독과 영화를 선정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재 초기부터 고민을 멈추지 못한 2010년대 이후의 두 감독을 선정하는 작업을 일단 유보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물론 필자 역시 여러분이 떠올릴 몇몇 감독을 생각했고 그들이 훌륭한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박찬욱, 봉준호처럼 대중영화와 작가주의 영화의 경계를 지워낸 감독이 등장했느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힘들 것 같다. 남겨진 숙제는 다른 지면에서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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