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궁금한 선전영화 이병일 감독 <반도의 처녀들>

by.이준희(대중음악비평가) 2012-11-28조회 63

1940년을 전후한 무렵 조선 대중문화계의 이모저모를 실감나게 그린 <반도의 봄>(1941년 개봉)과 한국영화사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작인 <시집가는 날>(1956년 개봉)을 연출한 이병일(李炳逸) 감독. 그의 이력을 훑다보면 다소 뜻밖의 사실 하나가 눈에 띈다. 대표작으로 통상 거론되는 위의 두 영화 사이에 다른 연출작이 공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기야 그 15년 동안에는 일제강점기 말기의 가혹한 통제, 광복과 분단의 혼란, 전쟁으로 인한 피폐 등으로 영화 제작 여건 자체가 썩 좋지 않기도 했고, 이병일 감독 자신이 1948년부터 1954년까지 한국을 떠나 미국과 일본에 체류한 사정도 있었으므로,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 짐작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과연 그 사이 이병일의 영화는 정말 단 한 편도 없었던 것일까? 다른 영화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이병일 또한 광복 이후 새로운 영화를 찍고자 하는 바람을 물론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1948년 연초 촬영에 착수했다는 <비창(悲愴)>이 바로 이병일 감독의 신작이 될 뻔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시작 기록만 있고 완성과 개봉 기록이 없는 <비창>은 결국 이병일의 필모그래피에 오르지 못하는 미완의 작품으로 사라진 듯하다. 사실 미완성 <비창>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반도의 봄>과 <시집가는 날>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이병일 감독의 숨은 작품은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쉽게 확인되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대 다른 여러 영화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이병일 또한 광복 이전 일본제국의 선전영화를 몇 편 연출했기 때문이다. 1943년작 <반도의 처녀들>과 1944년작 <적기(敵機)는 또 온다>가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되는 작품인데, 전자는 ‘학창에서나 직장에서나 농촌에 있어서나 꿋꿋이 총후(銃後)를 지키는’ 반도의 처녀들을 영상화한 것이고, 기획 단계의 소식까지만 볼 수 있는 후자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방공(防空) 의식 고취를 위한 선전영화였다.

음악으로 남은 영화

<반도의 처녀들>이든 <적기는 또 온다>이든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이나, <반도의 처녀들>은 관련 음악 자료를 통해 내용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1943년 1월에 발표된 신곡을 홍보하기 위해 오케(Okeh)레코드에서 제작한 선전용 소책자에는 영화 <반도의 처녀들(半島の乙女達)>의 주제가인 ‘반도의 처녀들’과 ‘목화를 따며’를 소개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영화 <반도의 처녀들>이 이병일 연출, 김학성(金學成) 촬영(소책자에는 창씨명 가나이 세이이치(金井成一)로 기록되어 있다), 김해송(金海松) 음악으로 제작되었다는 것과 영화에 경성제일고녀(高女)•동덕(同德)고녀•경성여자실업학교 여학생들이 출연하고 오케레코드 관련 공연 단체인 조선악극단이 특별출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책자에 수록된 사진에는 배구 경기를 하고 있는, 건강한 신체를 단련하고 있는 여학생들(아마도 경성제일고녀나 동덕고녀 학생들일 것이다)의 모습이 있고, 주제가 ‘목화를 따며’ 가사에는 직물 생산에 중요한 자원인 목화를 수확하는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 바로 신문 기사에 소개된 대로 학창과 농촌에서 꿋꿋이 총후, 즉 후방을 지키는 조선 여성들의 모습이다. 아마도 직장에 해당하는 장면은 경성여자실업학교 여학생들이 담당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간행된 영화 잡지 <日本映畵>에도 ‘문화영화’ <반도의 처녀들>에 관한 간단한 언급이 있는데, “여학교, 공장, 농촌에서 발랄하게 싸우는 반도의 젊은 여성 군상을 묘사한 음악영화”라는 표현이 보인다. 같은 기사에서 같은 해 개봉된 ‘극영화’로 소개한 <조선해협>이나 <젊은 모습(若き姿)>이 11권 분량(상영 시간으로는 80분 전후)인 것에 비해 <반도의 처녀들>은 비교적 짧은 2권짜리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관련 기록을 종합해보면, <반도의 처녀들>은 아마도 특별한 줄거리 없이 간단한 스케치와 음악 중심으로 연출된 단편영화이지 싶다. 그러고 보면 영화음악을 담당한, 그리고 주제가 두 곡을 작곡한 김해송의 존재, 그리고 김해송이 주요 멤버로 활동했던 조선악극단의 특별출연을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케레코드 소책자에서는 주제가 두 곡이 ‘공전(空前)의 교향악 편성’이라고 홍보하고 있기도 하니, <반도의 처녀들>은 영화 자체로는 단편 선전영화라 특별할 것이 없다 해도 음악 면에서는 의외로 상당히 풍성한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김해송과 조선악극단 관련 영화로는 앞서 <영화천국> 지면에서 소개한 바 있는 <그대와 나>(1941년 개봉)가 있기도 한데, 조선악극단과 K.P.K악단 활동을 통해 당대 무대음악의 천재로 인정받았던 김해송의 음악적 면모를 좀 더 보기 위해서는 역시 <반도의 처녀들> 발굴이 필요할 듯하다. 이미 오래전 저승으로 간 이병일 감독도 이제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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