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신랑> (이규웅, 1970) 1960, 70년대 이모와 고모들을 눈물의 홍수에 빠뜨린 아역배우 “김정훈의 힘”

by.오승욱(영화감독) 2011-03-16조회 4,915
꼬마신랑

1960년대 말.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일하러 나가 나와 동생을 돌봐주러 잠시 우리 집에서 살았던 20대 초반의 이모와 고모는 극장에 갈 때면 항상 대여섯 살밖에 안 된 나를 데리고 갔더랬다. 요즘 같으면 이상하다고 하겠지만, 서울에서 살던 내 또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극장 출입을 했다. 나중에 숙모가 된 애인과 데이트를 하던 삼촌도 당시 개봉관이었던 국도, 국제, 단성사,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는 화제작들을 보여주고 명동 사보이 호텔에서 경양식을 사주거나 파리제과에서 빙수를 사주거나 했는데, 아무리 어렸어도 눈치가 있는지라 데이트하는 남녀 사이에서는 뭔가 좀 불편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애인도 없고 데모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아 할 일이 없던 삼촌이 동네 극장에 데리고 가 남자들의 로망을 부추기는 <대야망> <패튼 대전차 군단>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과, 대학도 못 가고 직장도 없고, 동네 친구들은 모두 군대에 가버려 외톨이가 된 사촌형이 대여섯 살밖에 안 된 나를 당구장의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두어 시간 방치한 후에 기다리다 지쳐 울음보가 터질 무렵이면 청량리의 ‘대왕극장’, 명동의 ‘코리아극장’ 같은 곳에서 보여준 <황야의 은화 일불> <암흑가의 갱들> <돌아온 외팔이> 같은 영화들이었다. 어리긴 했지만, 나도 사내랍시고, 그런 종류의 영화가 좋았다. 문제는 고모와 이모들이었는데, 그녀들이 보여주는 영화는 지루해서 자다 깨면 주인공들이 울고 있고, 또 한참을 자다 깨어나서 보아도 역시나 주인공들이 울고 있는 영화였다. 하도 혼이 나서 다시는 그녀들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결심 했지만, 크라운 산도 과자를 사준다는 말에 금붕어처럼 속아서 따라가곤 했다.

그녀들과 함께 본 영화 중 내 또래의 어린이가 “엄마”를 부르며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르던 장면만 유독 기억나는 극장 안 풍경이 있었다. 스크린에서 어린이가 울면 엄마와 아마 아버지인 듯한 남자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주위를 돌아보면 스크린에서 반사되는 빛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옆자리의 고모도, 이모도, 그리고 극장 안의 아줌마들도, 아저씨들도, 모두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연신 찍어내며 흘쩍거렸다. 나는 그런 광경이 너무나 신기했더랬다. 고모와 이모. 극장 안의 어른들을 눈물의 홍수에 빠뜨린 내 또래의 어린이. 그가 바로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까지 거의 모든 한국 영화에서 아역을 연기했던 김정훈이다.

김정훈 하면 생각나는 영화는 뭐니뭐니 해도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다. 쏟아지는 비를 쫄딱 맞으며 문희와 신영균 사이에서 또랑또랑한 눈에 빗물이 스며들자 눈을 깜박거리며 엄마를 부르는 모습은 당시 수많은 이모와 고모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김정훈은 <꼬마 신랑> 시리즈다. 동네 아이들이 모이면 <꼬마 신랑> 시리즈가 몇 편까지 있나를 가지고 하루 해를 넘기며 말씨름을 했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어린이들이 볼만한 한국영화는 거의 없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무슨 행사처럼 상영되었던 애니메이션이 전부였다.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 내가 기억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한국영화는 <똘똘이의 모험>과 <용가리>가 유일하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꼬마 신랑>은 어린이가 주인공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꼬마 신랑>을 어린이 영화라 착각했었다. 당시 이모나 고모들은 신성일만큼이나 김정훈을 좋아했다. 그래서 예쁘장하게 생긴 어린이를 보면 누나들이 달려들어 김정훈 닮았다며 얼굴을 쓰다듬거나 했었고, 고모는 김정훈과 전혀 닮지 않은 나를 머리에 기름을 발라 빗질해 김정훈처럼 만들려고 헛수고를 하기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이모와 고모들이 좋아하는 김정훈이 그녀들과 비슷한 나이의 문희와 출연한 <꼬마 신랑>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어린이들만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라 이모와 고모들을 위해서 만든 것 같은 영화. 꼬마 신랑 김정훈은 자기보다 열댓 살은 더 나이가 많은 새색시 문희와 결혼했지만, 그녀의 진짜 신랑이 되어 어른들이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얻어내기에는 너무나 어리다. 결핍된 존재인 것. 그래서 꼬마 신랑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젓해지려고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신혼 초.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면서 꼬마 신랑의 어른스러워지려는 허세는 무너져버린다. 그리고 김정훈과 문희 부부의 최대의 약점. 섹스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부라는 것을 노리고 그들 주위에서 음모가 꾸며진다. 음모의 주인공은 문희를 질투하는 배다른 시누이. 시누이의 음모에 대해 꼬마 신랑과 시집을 와서 믿고 의지할 자기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색시는 너무나 무력하다. 집안 자체가 불륜 덩어리인 양반가의 어른들은 새색시 문희가 불륜을 저지를까 항상 의심한다. 그리고 불륜에 의한 자식인 시누이는 문희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음해한다. 무력하고 나약한 문희. 그리고 모든 음모와 그 배후를 알지만 어리기 때문에 무력한 꼬마 신랑. 하지만 꼬마 신랑은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고 기지를 발휘해 불륜을 저질렀다는 음모에서 문희를 구해내고 그녀의 사랑을 얻어낸다. 이 영화는 꼬마 신랑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김정훈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했고, 당시 연이은 속편을 쏟아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우리 집 벽에 붙어 있던 <꼬마신랑의 한>이라는 영화의 포스터다. 이 영화를 보고 온 동네 아이들의 자랑 때문에 그 영화가 꽤나 보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김정훈 주연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김정훈이 쌍둥이로 등장하는 <쌍둥이 꼬마 신랑> <속 꼬마 신랑> <꼬마 신랑 3편> 그리고 김정훈의 인기에 힘입어 꼬마 시리즈 <꼬마 암행어사> <꼬마 검객> <꼬마 사장과 여비서> 등등이었다. 김정훈은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끝으로 어린이 연기를 끝내고, <고교 얄개>로 청소년 연기자가 되어 돌아와 70년대 말 하이틴 영화에서 활약하다 성인 연기자로는 성공을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내가 연출부로 처음 일했던 영화에는 아역배우들이 여럿 나왔다. 영화에 출연했던 안성기 씨는 아역 배우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아역 배우 시절을 떠올렸는지, 측은한 얼굴로 “어릴 때 어른 틈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닌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당시 아역 배우 중 하나는 슛이 들어가기 전이면 항상 오줌이 마렵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슛과 슛 사이 조명을 고치는 대기 상황에서 오줌을 참다 못해 바지에 싸고 말았다. 엄동설한의 세트장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로 씻겨주며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오줌을 누고 싶다 말도 못한 그 어린이를 보며 유년기에 집을 떠나서 물 설고 낯선 땅에서 무시무시한 어른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김정훈이 어른들 틈에서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바친 영화가 바로 <꼬마 신랑>이다. 몇 해 전 영상자료원에서 본 한 액션영화의 장동휘, 박노식, 김희라, 허장강 같은 우락부락하고 투박한 사내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어둡고 삭막한 장면에서 대여섯 살의 어린 김정훈이 화면에 등장하자, 갑자기 주위가 환기되며 환한 촛불이 밝혀진 듯한 이상한 착각을 경험했다. 아역배우 김정훈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물론 기억이란 것이 완전하지는 않아 믿을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분명히 고등학생 때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인데, 영상자료원에는 네거 필름과 프린트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에서는 어떻게 그 영화를 방영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방송국의 자료실을 뒤져보면 사라진 영화의 방송용 테이프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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