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꼭 찾아야 할 한국영화 6 한정된 조건 속에서 발휘된 감독의 천재적 연출, 이만희 감독의 <기적>(1967)

by.정지영(영화감독) 2011-01-07조회 1,032
기적

나는 1960년대의 영화, 즉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 김수용 이만희 감독을 밑거름으로 영화학도가 된 세대다. 10대 후반에 <오발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하녀> <안개> 등이 저마다 다른 색깔로 내게 영화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심어주더니 1966년 <만추>는 20대 초반 나의 영화관에 새로운 비전을 심어놓는다. 아웃사이더들의 삶과 정서에 다가가 이토록 섬세한 감성으로 영화의 멋과 맛을 듬뿍 담아낼 수 있다니…. <만추>의 영상은 정말 ‘아픈 아름다움’이었다.

<기적>은 바로 그 다음해에 나온 작품이다.
- 밤기차 타는 장면을 시작으로 새벽기차에서 내리면 끝나는 영화
- 세트 없이 영화 한 시간 반 동안 기차 안팎만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 음악 없이 기차의 각종 소음 및 효과음으로만 사운드를 디자인한 영화

이런 사전 정보는 영화학도인 날 흥분시켰고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개봉을 기다렸다. 더욱이 개봉도 하기 전에 이 영화는 표절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었는데 그러한 시비는 내 호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이 영화를 놓치고 말았다. 그토록 우리 영화에 열정적이었고, 이만희 감독에게 빠져 있었고, 사전 정보가 흥미로웠고, 더욱이 표절 시비로 시끄러웠던 영화인 만큼 특별한 사연이 없으면 놓치지 않았을 영화인데 어쩌다가 이 영화를 놓쳤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아무튼 내가 지금껏 이 영화를 못 본 것을 안타까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인물을 놓고 발휘했을 이만희 감독의 천재적 연출 솜씨를 볼 기회를 놓쳤다는 데 있다.

살인 누명을 쓴 한 사내(최무룡)가 용산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탄다. 그 뒤를 형사들이 쫓는다. 사내는 부산에서 이튿날 새벽 배를 타고 해외로 도주하려는 진범을 붙잡아 경찰에 넘겨야 누명을 벗을 수 있다. 지금 잡히면 진범을 영영 놓치고 만다. 사내는 기차 안에서 형사들을 따돌리다가 한 여자(남정임)를 만나고 그 여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두 사람은 그 여자의 침대칸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내가 나타나 돈을 요구한다. 그 여자는 꽃뱀이었던 것이다. 사내와 여자의 남편은 격투를 벌이고 끝내 남편은 죽고 만다. 진짜 살인범이 되어버린 사내와 공범이 되어버린 여자는 더욱 가까워진다. 그들이 종착역에 내렸을 때 그들 앞을 형사들이 막아선다.

자료를 찾아 정리해본 줄거리다. 정말 치밀한 계산과 밀도 있는 연출이 아니고는 어떻게 그 미묘한 갈등과 긴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당시 신문에 난 영화평 일부를 옮겨보자.
‘…몇 가지 삽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살인혐의를 받은 도망자의 심리적 서스펜스가 이 영화의 전부라고 파악하면 차라리 이해가 빠를지 모르겠다. 연출의 이만희는 금욕적이라고조차 할 수 있는 방법의 엄격으로 다져가는데 있어 세밀한 계산과 치밀한 구성을 꾀하고 있다…’
표절시비 1년여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은 <기적>을 영영 만날 수 없다면 다시 만들기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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