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꼭 찾아야 할 한국영화 4 빗나간 부부관계 속에서 억눌린 관능을 발산하다, 이만희 감독의 <시장>(1965)

by.이연호(영화평론가) 2011-01-07조회 1,084
시장

정말 내가 본 영화가 맞을까? 아니 거꾸로 정말 내가 보지 못한 영화일까? 필모그래피의 거의 절반이 유실된 이만희 감독의 영화들은 내게 정말 이상한 대상이다. 여기엔 거듭되는 기억의 오류가 있다. 이런 식이다. 오랫동안 못 본 영화라고 생각했고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라고 밀린 숙제처럼 여겼던 <검은 머리>는, 뒤늦게 2009년에야 보면서 시작한 지 10여 분 만에 어린 시절에 이미 본 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목도, 감독도, 배우도 잊은 채 한 여인이 화려한 옷을 입고 허름한 뒷골목을 서성이던 한 조각의 이미지는 비로소 제 집을 찾았다. 아, 왜 몰랐을까? 그 여인이 문정숙 씨였다는 사실만 기억했으면 어떻게든 이만희 감독에게 도착했을 텐데….

<시장>은 반대의 경우다. 이 영화는 정말 보았는데 지금은 유실된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1965년 작인 이 영화를 나는 두 번 보았다. 한번은 다섯 살인 나를 안고 어머니가 극장에서 보았다고 한다. 문정숙 씨를 좋아해서 그녀의 출연작이라면 모두 보았으며 지금도 그녀가 불렀던 구슬픈 영화주제가를 노래방 18번으로 삼고 있는 어머니는 어린 딸이 미성년자 불가 영화에 보였던 반응들을 육아일기처럼 말해주곤 하셨다. 두 번째 관람은 흑백 TV를 통해서인데 사실 이렇게 말하면 곤란한 지점이 있다. <시장>은 상당히 관능적인 성인 취향의 영화인데 그것을 본 나는 초등학교 6년생이었다.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 당시 데카당스 계열의 유럽영화에 매료되었던 조숙한 소녀에게 정신적 충격을 안겨준 첫 번째 한국영화가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감독의 이름은 나중에 알았지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 그리도>(TV 영화 제목은 <여로>였다)를 보고 인생의 허무를 일찍이 간파했던 나는 침묵에 가까운 대사, 인물들의 공허한 눈동자가 무조건 좋았다. 그리고 <시장>은 제목도 신선했지만 어시장의 다큐적인 스케치가 <일 그리도>의 채석장 분위기를 닮았고, 퀭한 눈동자의 문정숙이 어린 딸에게 젖을 물린 채 노점상을 하는 모습이 심금을 울렸다. 내가 딸이었기 때문일까? 전쟁의 후유증을 넌지시 품고 있는 두 영화는 빗나간 부부관계와 그 과정에서 억눌린 관능을 미묘하게 발산했는데 <일 그리도>의 배신당한 남편과 <시장>의 배신당한 아내에게는 똑같이 어린 딸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아, 아이들은 왜 태어났을까? 어른들은 왜 저렇게 외로워할까?

훗날 이만희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보았지만 모성본능까지 보여주는 문정숙 씨는 보이지 않았다. 전쟁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귀로>에서도 <검은 머리>에서도 문정숙 씨는 불임녀에 가까웠다. 네오리얼리즘과 실존주의가 결합된(이것은 나의 추정이지만) <시장>의 유실이 안타까운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딸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지금의 나에게 그 3자의 육화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사춘기 초입에 만났던 그 블랙홀 같은 삶의 심연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다. 그런데 혹시 KBS나 MBC의 자료실을 뒤지면 방송용 테이프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그 시절엔 방송국도 겨우 2개밖에 없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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