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임권택과 나 ④ 삶의 체험 현장을 만드신 분

by.예지원(영화배우) 2010-08-05조회 99

지난 겨울 나는 ‘인간 난로’를 만났다. 바로 임권택 감독님이시다. 현장에서 모두 감독님을 그렇게 불렀다. 추운 날씨에 작업을 이어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분의 섬세한 배려와 따뜻한 눈빛은 언제나 현장을 훈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101번 째 작품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름 석 자 그대로 ‘임권택’이었으니까.

임권택 감독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수많은 미사어구를 동원할 수 있겠지만 내게 기억되는 감독님은 그 어떤 말보다 ‘영화 그 자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임권택 감독님은 진정한 영화인이시고 그래서 그런지 그 현장에는 사심 없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감독님은 애써 따뜻한 말을 건네시는 분은 아니다. 단지 그분이 보여주는 행동만으로도 가르침을 주셨고, 또 모든 현장의 사람을 아껴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하는 모든 사람은 그 존재감만으로 아랫목의 평안함과 안정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 덕에 작업 현장의 사람 한 명 한 명은 서로를 배려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영화인’으로 성장한다. 그런 현장에 머물면서, 나는 수도 없이 ‘난 참 복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임권택 감독의 대본은 살아 있다. 감독님은 촬영이 끝나면 ‘이제야 시나리오가 끝났다’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매일 대본을 받았다. 언뜻 배우에게 꽤 부담되는 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배우와 소통하시면서 현장의 에너지가 묻어나도록 살아 있는 대본을 써서 감독님께서 직접 손에 쥐어주실 때마다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느꼈다.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감독님께서는 언제나 나의 오감을 열어주셨고 역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루는 세트장으로 날 부르시고는 의견을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내게 감독님이 건네주신 것은 ‘은단’이었다. “우리 은단 먹고 머리를 맑게 하자.” 이 한 마디에 나는 웃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잊혀가고 있던 그것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향수를 느꼈고 그 엉뚱한 말씀이 나의 긴장을 풀어주시려는 자상함임을 알았기에 아이처럼 웃어버렸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런 분이다. 나의 걱정을 녹여주는, 또 배우 예지원을 배역에 녹여주는 그런 난로 같은 분이다.

얼마 전에 <달빛 길어 올리기>의 보충 촬영이 진행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그 현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현장의 따뜻함과 멋진 영화인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또 한번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마냥 기대된다. 이처럼 <달빛 길어 올리기>는 생각만으로 벅차 오르는 특별한 영화다. 지금까지도 배우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배우의 삶에 대해 느끼게 해준 ‘삶의 체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임권택 감독님께서 만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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