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길>(1991)

by.박철수(영화감독) 2010-05-10조회 1,811

내가 <경마장 가는 길>(장선우, 1991)을 본 것은 하일지의 ‘경마장’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소설 몇 편을 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비디오-그 영화가 개봉할 즈음에는 내가 영화를 전공하기 전이라 당시 문제작이었겠지만 필름으로 보지 못했다-로 볼 기회가 있어서였다. <경마장 가는 길>을 소설로 본 것은 아니고, 『경마장의 오리나무』 『경마장을 위하여』 등을 소설로 읽은 듯하다. 그것도 소설 제목에 ‘경마장’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내용도 거의 잊어버려서 이참에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알아낸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소설도 보고 영화도 보았는데<경마장 가는 길>은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내가 영화 일을 해서일 수도 있고, 영화라는 매체의 각별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경마장 가는 길>을 두 번째로 보면서 친숙한 문성근 선배님의 한 시절 모습을 다시 보니 느낌이 남달랐다. 내가 문성근 선배님께 지나간 영화 중에 다시 연기하고 싶은 영화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문성근 선배님은 <경마장 가는 길>이라고 했다. 잘 모른 채로 연기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자 연출부로 <오! 수정> 작업을 할 때 홍상수 감독님이 문성근 선배님 캐스팅을 고심하면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홍상수 감독님은 문성근 선배님이 “<경마장 가는 길>에서 다 보여주었다”라고 그랬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고, 나 역시 <질투는 나의 힘> 캐스팅 작업을 하면서 고심했다. 그런데 정작 문성근 선배님은 <경마장 가는 길>을 다시 연기하고 싶은 영화라고 그러신다. 흥미로운 얘기다.

내게 이 영화가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은 각별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과 엔딩 때문이다. R은 한국영화에서 아주 드물게, 어쩌면 최초로 미화되지 않은 주인공이다. 사실 열광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한테 진정 인상 깊은 것은 R이 영화 내내 J와의 섹스, 더 나아가 아내와 이혼하고 J와 안정적인(?) 섹스를 하느냐 마느냐에 골몰하는 이상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인격의 한 부분만 특화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거세된 듯한 R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영화니까 더욱 그래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인물의 깊은 속은 알 수 없고 대사와 행동으로만 보여지니까 일련의 ‘경마장’소설들의 주인공보다 더 낯설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R이 고속버스 창 밖으로 함지박을 이고 가는 아낙을 보고 우유를 흘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장선우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R이 ‘찰나적 각성’을 하는 순간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다. 말이 좀 거창한 듯하지만 그래도 그 말의 의미에 나도 꽤 공감한다. 사람은 잠시 혹은 순간 괜찮고 깨끗한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은 더러운(?) 번민 속에 산다. 그래서 그 순간이 소중하고, 이 영화는 그것을 포착했다. R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유를 흘리기도 하니까 다행인 것이다.

박찬옥 | 영화감독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거친 후 조명, 영화음악, 각본, 연출 등 다양한 영화 작업에 참여하며 자신의 연출력을 탄탄하게 다져온 감독. <질투는 나의 힘>(2003), <파주>(2009) 등을 통해 관객에게 확고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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