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감독의 괴작. 잠에서 깨어나다! ‘부산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 2009’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이만희 감독의 <검은머리>

by.김기호(한국영상자료원 보존기술센터) 2009-11-06조회 953
검은머리

지난 10월 9일 저녁, 부산영화제가 한창인 해운대 메가박스에는 고전영화치고는 제법 많은 170여 명의 관객이 고 이만희 감독의 <검은 머리>(1964년 작)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고 묘한 매력을 풍기는 몇 작품 중 하나, 천재 감독이 남긴 돌연변이 같은 괴작, <검은 머리>가 드디어 깨끗한 화질로 2009년의 관객 앞에 펼쳐졌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디지털 복원한 한국 고전영화가 3년 연속 칸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쾌거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한 해에 많아야 2~3편밖에 복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막대한 소요 비용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검은 머리>의 작업 예산은 국내 첫 디지털 복원 협력 프로젝트인 ‘부산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 2009’로 조성되었다. 부산영상위원회, 부산영화제, 부산시와 자료원이 디지털 복원에서 상영까지 한뜻으로 협력하여 일궈낸 결과다. 물론 여기에는 자료원과 디지털 복원 사업을 계속해온 베테랑 후반작업 업체 AzWorks의 땀이 배어 있다.

필름캔에 스며든 녹물로 화면이 심하게 잠식당해 ‘훼손 필름의 대명사’로 자주 인용되던 영화 초반 8분여는 그 악명에, 걸맞게 현 기술 수준으로 완전 복원이 힘들었지만 어색하나마 화면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개선되었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동영상 버퍼링을 연상시키는 툭툭 튀는 화면 움직임에 대체로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영 직전 공개 예정이었던 복원 전후 비교 영상이 진행상의 실수로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전설처럼 회자되던 작품인지라, 새로 태어난 고품질의 화면이 더해지면서 대체로 즐겁게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어색하지만 중독성 있는 구식 유머 코드에 까르르 웃기도 하고, 투박한 듯 매력 있는 장중함과 비애에 몰입하기도 하며 한국 고전영화가 얼마나 재밌는지, 왜 여태 몰랐는지 깨닫는 분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는 한국 누아르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한 외국 남성 관객의 소감 한마디로 대신한다. 기자가 퇴장하는 관객 한 명에게 소감을 묻자 그는 상기된 얼굴과는 대조적인 낮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VERY… GOOD”. 기자분은 몰랐겠지만, 그는 칸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인 피에르 르쉬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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