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지상 전시 6.25와 한국영화

by.최소원(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08-11-13조회 237

6.25 전쟁만큼 삶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 또 있을까. 영화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후 일제가 남기고 간 열악한 기자재로 서서히 제작기반을 다져가던 1950년. 전쟁 발발 후 영화인들은 부족한 시설과 귀한 필름 등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군과 관에 소속되어 전쟁을 기록하고 극영화를 제작했다. 전선의 소식을 알리고 피난민들에게 위안을 줄 영화를 만들었고 나아가 산업적인 가능성까지 타진했던 전쟁기는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영화 성장을 위한 맹아를 키웠던 시기였다.

영화보다 더 지독했던 전쟁의 현실

영화제작은 주로 피난지에서 이루어졌다. 대구는 ‘한국의 호리?드화’라는 표현처럼 영화제작으로 활기를 띄었다.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는 서울 촬영 중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지 대구에서 ‘배우가 모이면 그때그때 몇 컷씩’ 찍는 방법으로 완성되었다. ‘유엔마담’이 등장하는 <태양의 거리>(1952)도 대구에서 제작되었다. 두 작품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코리안 리얼리즘’ 의 시도로 평가받았다. 전쟁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자극적이었고 극영화와 기록영화 양식이 혼재된 영화가 많았다. 이후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 도입부에서 양공주가 미군과 이야기하는 실제 장면도 이러한 경향의 연장이다.

종군 활동에 치열했던 영화인들, 그리고 <정의의 진격>

6.25 발발 당시 목포 로케이션 중이던 한형모 감독이 흰 광목에 검은 글씨로 ‘국방부 촬영대’라고 완장을 써서 차고 바로 전선에 뛰어든 것을 시작으로 영화인들의 종군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정의의 진격>(1951) 1, 2부는 6.25 전쟁을 조망하는 방대한 작업으로 종군 활동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2부를 촬영하던 김학성 촬영감독이 미 보병부대의 전투를 취재하던 중 박격포탄에 맞아 크게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51년 1.4후퇴 후에는 부산의 목욕탕 건물을 징발해 평양촬영소의 ‘노획품’을 이용해 원시적인 현상시설을 만들어 수공업식으로 네가 필름을 현상했다. 극작가 오영진이 해설을 썼고 아나운서 홍영보가 내레이션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역시 ‘노획품’인 북한군이 촬영했던 필름도 상당 부분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북한군의 서울입성 장면, 영천전투에서 승리한 북한군의 오락장면,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노역하는 시민들 장면 등이다. 한국영화박물관의 전쟁기 전시장에는 김학성 촬영감독이 전선에서 사용했던 철모, 국방부 완장, 카메라 등의 유품들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코닥 레티나 카메라의 실탄이 꿰뚫고 지나간 구멍은 전시의 긴박한 상황을 증언한다.

피난민들의 정보수단이자 오락거리였던 ‘영화’

미공보원의 <리버티뉴스>, 공보처의 <대한뉴스>, 국방부 정훈국의 <국방 뉴스>등 전선의 상황을 알려주는 뉴스영화는 수복 후 서울시민의 가장 중요한 매체였고, 피난지에서는 무대공연과 함께 영화가 전쟁으로 터전을 잃고 갈 곳 잃은 시민들을 위로했다. 무분별한 외화 수입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을 정도로 극장엔 어떤 영화를 걸어도 관객들로 넘쳐났다. 그만큼 심신이 지칠 데로 지친 피난지 대중들은 오락에 목말라 있었고, 달리 갈 곳이 없어 낮에는 거리와 공원과 다방을, 밤에는 대폿집과 극장을 배회했다.

영화인들의 의지로 싹틔운 한국영화 성장의 맹아

전쟁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는 16밀리였다. 그만큼 35밀리 필름은 구하기 힘들었다. 제대로 된 현상소가 없어 목욕탕을 개조해 현상을 하기도 했고, 전문분야와 상관없이 촬영, 편집, 현상 등 제작과정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했다. 이와 더불어 국방부와 공보처, 미공보원 등에서 최신 영화기재들을 수입하면서 영화기술인들은 극한 상황에서 배운 노하우와 제작과정 전반의 이해는 물론 최신 기술력까지 다지게 된다. 이후 국방부 정훈국과 미공보원 출신 영화기술인들이 한국영화기술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영화배우들은 ‘신협’ 등의 극단 무대와 영화를 넘나들었고, 50년 9월 10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발족해 영화평론 문화 또한 싹트기 시작했다. 1955년 <춘향전>이 10일 만에 18만 관객을 돌파한 전례 없는 성공을 기점으로 시작된 ‘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기’는 바로 전쟁기 영화인들의 땀과 의지의 산물이었다.

연관영화 : 악야(惡夜) (신상옥 , 1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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