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삼포가는 길 이만희, 1975

by.김병철(동의대 영화과 교수) 2012-08-30조회 4,840
삼포가는 길

이만희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의 이름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1961년 <주마등>으로 데뷔할 때부터 1975년 유작 <삼포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15년의 시간 동안 50편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한국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가 당대에 활발한 활동을 한 영향력 있는 감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단순히 한국 고전영화로 소비되고 마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재발견, 재해석되면서 수많은 영화인과 영화팬에게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에, 그것도 그 작품 세계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원숙해지는 시점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아쉬움에 사로잡혀 그의 이름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만희 감독의 유작인 <삼포 가는 길>은 1973년에 발표된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가상의 공간이 삼포라는 고향을 찾아가는 정가를 중심으로 떠돌이 일꾼이 노영달과 시골 술집에서 도망친 백화라는 작부의 여정을 담담하게 따라가면서 1970년대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고도성장의 이면에서 뿌리를 잃고 헤매는 군상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한다. 

<삼포 가는 길>이 세 떠돌이의 여정을 그린 로드무비인 만큼 영화의 대부분은 이들이 걸어가는 길을 배경으로 한다. 이들은 눈 내리는 산길이나 평화로운 농촌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는데, 이때 보이는 풍경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같은 날씨와 결합되어 영화 전체의 정서를 전달하는 심리적인 공간으로 기능한다. 

영화는 눈이 쌓인 개울가에 주막집에서 쫓겨난 노영달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뒤늦게 정가가 나타나 오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를 한탄하는 노영달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둘은 동행이 되어 길을 떠난다.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겨야 하는 둘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처럼 황량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대지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을씨년스럽고, 풍경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눈 녹은 개울은 검게 보여서 이러한 심리를 더욱 부채질한다. 그저 동행에 불과했던 이 둘의 관계는 술집에서 도망친 작부백화를 만나면서 일종의 유사 가족 혹은 완전한 공동체로 변모한다. 아버지 격인 연장자 정가, 딸 격인 백화 그리고 사위와 같은 젊은 노영달은 미묘한 애정관계를 형성하며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이후 정가가 술집에서 곤경에 처한 백화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 행세를 하면서 이들의 유사가족 관계는 정점에 달한다). 정가와 노영달은 몰아치던 눈보라가 그치고 쨍하게 해가 내리쬐는 가운데 거대한 다리 밑에서 백화를 만난다. 눈보라가 그친 이후의 맑은 하늘은 이들의 짧은 동행이 비록 덧없는 것일지라도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따스할 것임을 암시라도 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 이들의 행보는 그리 쉽지만은 않다. 거친 눈보라를 만난 이 세 명의 떠돌이는 서로의 손을 잡고 끌어주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함께 나아간다. 

노영달과 백화가 쓰러지고, 정가가 이 둘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줄 때 황량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풍경은 이들의 운명 앞에 놓인 험한 세파가 되고 이들의 행동은 그에 맞서는 지난한 몸짓이 된다. 눈보라가 그친 후 이들이 찾는 낡은 폐가는 모닥불과 이들의 체온으로 덥혀지면서 바깥의 황량함과 대비되는 온기 어린 공간, 가상의 고향 즉 삼포의 또 다른 모습이다.따라서 이 낡은 폐가에서 각자의 과거사를 이야기하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쌓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한때나마 서로에게 희망과 위안이 되던 이들은 작은 시골 역사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라도 곧 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하늘, 낮은 천장의 허름한 역사에서 한때 온기를 나누었던 이들은 헤어진다. 이들이 만난 곳도 길 위였고, 이들이 헤어지는 곳도 다른 길 위다. 변한 것이 있다면 날씨와 길의 종류뿐(보다 근대화된 길인 철도역). 영달과 정가가 떠난 후 홀로 남은 백화가 역사 밖의 술집을 바라볼 때, 그녀의 모습을 비추는 깨진 유리창은 백화의 공허한 정서를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시각화한다. 영화의 마지막, 정가는 너무 변해버려 이제는 알아볼 수조차 없는 삼포를 직면한다. 화창하게 맑은 날, 버스를 타고 때 이른 벚꽃이 핀 길을 따라가던 정가는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를 만난다. 영화 전편의 느낌과는 너무나 확연하게 차이나는, 그래서 그만큼이나 거부감을 자아내는 현대적인 다리의 이미지는 그들이 품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관계가 이미 끝났음을 알린다. 

이처럼 화려한 고도성장기 대한민국의 이면을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묘사해낸 이 작품은 단순한 서정성을 뛰어넘는 실험이 가득한 작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작품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영달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대사로는 그의 잘나갔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지만 실제로 화면에 보이는 것은 쥐약장사를 하며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비루한 그의 과거 생활이다. 이처럼 이만희 감독은 다양한 사운드의 양식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미학적인 차원에서도 이 작품이 한국영화사의 의미 있는 한 영역을 차지할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만희 감독의 유작 <삼포 가는 길>은 길 위에서 만난 떠돌이들이 유사 가족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해체되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근대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잊혀가는 것들을 애도한다. 이 작품을 보고나면 온통 눈으로 가득한 험난한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세 뜨내기의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이 뒷모습들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한국영화의 깊이와 폭을 넓혔던 이만희 감독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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