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휴일 이만희, 1968

by.남동철(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2018-02-26조회 5,819
휴일 스틸

<휴일>의 주인공 허욱(신성일)은 몹쓸 인간이다. 돈도, 직업도 없는 남자가 여자를 임신시키고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는다. 아무 대책도 없는 남자임을 뻔히 아는 여자는 남자에게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묻거나 결혼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아이는 둘을 낳을지, 셋을 낳을지, 결혼식을 예배당에서 할지 어디서 할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자는 여자가 임신중절을 염두에 두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훈계부터 내놓지만 그 외에 아무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수술비를 마련하러 나선다. <휴일>은 허욱이 연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녀의 수술비를 마련하러 돌아다닌 하루를 다루고 있다.

허욱은 “난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난 차라리 바보”라고도 한다. 택시비도 없는 그가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담뱃값까지 덮어씌우는 장면은 그가 거짓말을 잘 하는 남자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커피 한잔 살 돈도 없으면서 길에서 만난 점쟁이에게 오늘의 운세를 보는 걸 보면 그가 바보인 것도 사실이다. 허욱은 그런 자신을 잘 안다. 그래서 그걸 자신의 핑계로 삼는다.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라는 것이다. 허욱이 못난 남자인 것은 그가 겁쟁이의 면모를 보여줄 때 가장 도드라진다. 여자와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간 남자는 당장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수술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여자를 혼자 두고 병원을 나온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낯선 여자를 만나 함께 술에 취한다. 심지어 육체적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휴일의 끝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여자가 죽어버린 후이다.

<휴일>은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 때문에 당대에 개봉을 못 했다. 지금 다시 봐도 <휴일>에는 내일의 희망을 꿈꿀만한 여지가 없다. 영화 초반부에 연인이 대화를 나누는 늦가을 남산의 풍경은 <휴일>이 감상적인 로맨스영화로 해석될 길을 열어놓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런 기대는 무참히 짓밟힌다. 모래바람이 계속 불어대는 남산 공원의 메마른 나무 옆에 가녀린 여자가 커피 한잔 마실 돈이 없어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서 있다. 남자는 수술비를 마련하겠다고 여자 혼자 남산에 남겨둔 채 떠난다. 어떻게 보면 가난이 원죄일 수도 있다. 그들이 다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이유도 수중에 돈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그들의 시련이 해결될 것인가? 영화는 가난의 원인을 추적하거나 가난의 양상을 펼쳐 보이는 데 관심이 없다. <휴일>은 여기서 보통의 리얼리즘영화들과 다른 결을 보여준다. 가난이라는 조건 안에서 영화는 그저 한 남자의 자기 파괴적인 행보를 쫓는다. 허욱은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리며 돈을 훔치고 여자를 배신한 뒤 후회하고 자책한다. 모든 잘못은 이미 저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휴일>의 정조를 완성한다. 이것을 ‘60년대의 비관’이라 부르건 ‘시대의 우울’이라 부르건 이 정조는 <휴일>의 독보적인 성취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야기나 캐릭터가 아니라 무드이다. 지독히 낭만적인 무드에서 참으로 암울한 무드까지 <휴일>을 보는 경험은 어떤 무드에 흠뻑 젖어 드는 일이다. 오직 영화를 통해 시를 쓰는 대가들만이 이런 영화를 만든다. <휴일>은 이만희 감독이 그런 대가였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남는다.

어떻게 보면 <휴일>은 시종 기다리는 사람과 그날 그곳에 뒤늦게 도착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뤄진 영화다. 영화는 다방 앞에서 기다리는 여자와 뒤늦게 도착해 “왜 안 들어가 있냐?”고 묻는 남자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남산을 향하고 남자가 돈을 구해올 동안 여자는 그곳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남자를 기다린다. 그들은 다시 병원에서 헤어진다. 여자는 병원에서 남자를 기다렸을 테지만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 남자는 그 시간에 다른 여자와 술에 취해 있었다. 남자는 오직 연인이 죽은 뒤에야 그곳에 도착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남자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에 서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부터 깎아야지”라는 중얼거림뿐 이다. 남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배반한 대가로 전차의 종점에서 비틀거리는 중이다. 불현듯 이곳이 이 남자가 맞이할 삶의 종점일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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