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집념의 연기자, 황정순

by.권용숙(영화사연구자) 2019-02-12
황정순 메인 사진
“그녀는 어머니 역할을 많이 하여 한국의 어머니란 소리를 들을 정도지만 그러나 그녀가 표현하는 어머니는 시츄에이션에 따라 모두 다르다.
말하자면 누구보다 제대로 변신을 할 줄 아는 배우인 것이다.”  
                                                                                                                                           -연출가 이해랑, 1967년“1)

2014년 연기자 황정순이 타계했을 때, 세상은 ‘한국영화의 영원한 어머니’가 떠난 것을 추모했다. 그녀는 1940년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래로 연극, 라디오드라마, 영화, TV드라마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활동을 펼쳤다. 10대에 연기를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80세까지(2005년)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했다. 그녀가 평생을 바친 연기 인생을 단지 ‘어머니’ 전문 배우라는 한가지 인상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황정순은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감성을 개성 있는 연기를 통해 선사했다.   

황정순은 1925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손윗 남매들도 일찍 세상을 떠나 오빠만 남게 되었다. 홀로 된 어머니가 막내 외동딸은 오래 살길 바라며 위해준 덕분에 귀하게 자랐다. 학창시절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서 영화를 처음 본 것이 <타잔>이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스릴과 장관 그리고 특히 여자주인공 ‘제인’의 활동적인 모습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 후로부터 거주하던 인천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으로 영화 구경을 다니기 시작했다. 영화 바람이 난 것이다. 어릴 적 몸이 약했던 그녀는 오빠 등에 업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미국 배우 타이론 파워(Tyrone Power)를 흠모하기도 하고, 배우 문예봉이 연기하는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연기자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이듬해, 16세가 된 그녀는 연기자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해 동양극장 배우모집에 응시한다. <장화홍련전> 낭독 시험을 통과하고,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입단하여 연기자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선배들의 심부름과 무대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엑스트라를 맡고, 마침내 대사 있는 단역으로는 처음 출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마디 있는 대사의 문장을 앞뒤로 바꿔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관객들로부터 얼뜨기라는 야유를 받으며 호된 무대 신고식을 치렀다. 눈물 바가지를 쏟으며 속상했지만 이내 포기하지 않고, 극단을 따라 전국 순회 및 중국 만주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동양극장에서 9년을 활동하는 동안 홍해성, 박진, 김영수, 나웅 등의 연출가들로부터 연기 지도를 받았다. 맡은 역할의 과거사와 현재, 미래까지 꿰뚫으며 충실하게 성격 분석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인물을 부각시켜 연기해야하는 대목과 극의 맥락이 되는 지점을 찾아 강조해야하는 점을 익혔다. 그리고 상업극단의 숨가쁜 일정에 맞춰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극을 완성하는 훈련을 했다.2) 이러한 경험은 황정순이 연기 실력을 다지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연극 <대지의 어머니>에서 비중 있는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고 주연급 연기자로 발돋움했다. 극중 대감의 하녀로서 두 아들을 낳아 기르는 역을 맡았는데, 그녀의 나이 19세에 해낸 어머니 역할이었다.3)

황정순의 영화 데뷔작은 단역으로 출연한 일본영화 <그대와 나(君と僕)>(허영, 1941)이다. 영화 현장을 처음 경험한 그녀는 인물 사진 찍듯이 자꾸 카메라를 봐서 NG를 냈고, 결국엔 영화에 뒷통수만 출연하게 되었다. 그 뒤 몇 년간 ‘카메라를 쳐다보는 배우’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고 한다.“4) 극단 지방 공연 중에 해방을 맞이했고,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성우로도 활동하면서 1947년 라디오드라마 <청춘행로>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화한 <청춘행로(촌색시, 一名 며누리의 설음)>(장황연, 1949)에서 황정순은 첫 주연을 맡는다. 또한 같은 해에 영화 <파시>(최인규, 1949)와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출연하였다.   

청춘행로 황정순
(그림1) <청춘행로>(장황연, 1949)에서 주인공을 맡은 황정순

여성일기 황정순
(그림2) <여성일기>(홍성기, 1949) 출연 당시 황정순(앞줄 오른쪽)과 배우 주증녀(앞줄 왼쪽)
   
1950년,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 된 신협에서 활동하면서 국립극단 정기공연 첫 작품 <원술랑>과 2회 작품 <뇌우>에 출연했다. 한국전쟁 직전에 공연한 이 작품들은 각각 5만명, 7만5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고, 덕분에 황정순은 연극배우로서 성장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9.28 수복 이전까지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있다가 납북될 뻔한 위기를 겪고, 1951년 1.4 후퇴 당시 신협 단원들과 함께 국군을 따라 대구로 피난 갔다. 

피난 시절, 신협은 군예대 소속으로 전선 위문 공연을 다녔고 여주인공은 황정순이 도맡았다. 낙하산 천으로 의상을 만들어 입고, 군용 트럭 여러대를 동원하여 트럭 헤드라이트를 켜서 무대를 밝혀 연극을 했다. ‘탱크부대’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공연에 열의를 쏟아부었고, 황정순의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환도 후에도 공연을 이어가며 연극 무대에서 주연 배우로 주목 받았으나 전후 50년대 중반부터는 연극이 침체되고 영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연극인이 카메라 앞에 서면 무대 예술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영화 연기로 활동 범위를 넓혀야했다. 그녀 역시 연극인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했고, 같은 해에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황정순
(그림3)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황정순-2
(그림4)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황정순-3
(그림5)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왼쪽), 김동원(오른쪽)

황정순은 무대에서 쌓은 기량을 발휘하여 영화계에서도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사랑>(이강천, 1957)에서 불치병에 걸린 현모양처를 연기하여 1957년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고, <인생차압>(유현목, 1958)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제2회(1959)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수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의 피고인 역으로 1959년 제1회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연달아 수상하며‘무대의 프리마돈나’에서‘은막의 스타’로 자리잡는다. 또한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愛情無限)>(전택이・도광계(屠光啓_홍콩측) 공동감독, 1958)에 출연하여 홍콩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다. 

어느여대생의 고백 황정순
(그림6)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순이(황정순)가 겨울밤 혼자 출산하는 장면

어느여대생의 고백 황정순
(그림7)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피고인 순이(황정순)가 변호인에게 진술하는 장면

애정무한 황정순
(그림8)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전택이·도광계, 1958)의 한 장면,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황정순

그녀가 애착을 갖는 출연작 <청춘극장>(홍성기, 1959)은 김래성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사랑을 그렸다.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여 관객 14만명을 동원5)하며 1959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제작사 선민영화사와 전속계약을 맺어 황정순, 김동원, 최무룡, 김지미, 장동휘 등의 연기자와 홍성기 감독이 ‘선민군단’으로 불리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청춘극장 포스터
(그림9) <청춘극장>(홍성기, 1959) 포스터, 왼쪽에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황정순

청춘극장 황정순
(그림10) <청춘극장>(홍성기,1959) 출연진 및 제작진들과 함께, 왼쪽 4번째가 황정순6)

이듬해 주연을 맡은 <귀거래>(이용민, 1960)에서는 월남한 전쟁 미망인을 연기했고,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에서는 1.4후퇴 때 헤어진 아들을 찾아 헤매면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맡아 전쟁의 비극을 표현했다. 

한편 같은 해 출연한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는 배우 김승호와 부부 연기를 선보였고, 강대진 감독의 다음 작품 <마부>(1961)에서도 김승호와 커플 연기를, 또한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도 김승호와 부부로 출연하여 연기 호흡을 맞췄다. 이후로도 황정순은 김승호와 여러 차례 상대역으로 열연하면서 황정순·김승호 명콤비의 연기가 관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겹치기 출연으로 동시에 여러 작품을 소화해야했던 김승호와 황정순은 함께 역할에 대한 설정과 연결을 자세히 점검하고 연기 짜임새를 논의했다고 한다.   
 
박서방 황정순
(그림11)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오른쪽부터 배우 김혜정, 김진규

삼등과장 황정순
(사진 12)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

마부 황정순
(사진 13) <마부>(강대진, 1961)에서 마부 춘삼(김승호)과 수원댁(황정순)의 극장 데이트 장면

삼십대 중반이었던 황정순은 <굴비>(김수용, 1963)에서도 김승호와 노부부를 연기했고, 그녀의 차분하지만 힘 있는 표현력을 눈여겨 본 김수용 감독은 다음 작품 <혈맥>(1963)에도 황정순을 캐스팅하여 김승호와 연기 대결을 펼치게 했다. 김 감독은 두 배우가 극 중 싸우는 장면을 연기하던 현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육탄전을 벌인다. 땅 위를 구르면서 엎치락 뒤치락을 여러 차례, 배우들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가 아니라 실기다. 카메라가 멎으면 서로 다시 한번 더 찍자고 한다.”7) 


황정순은 이 작품에서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강한 생존력을 보이는 월남민을 열연하여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3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7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굴비 황정순
(그림14) <굴비>(김수용, 1963)에서 노부부를 연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그 뒤로 왼쪽부터 배우 김석훈, 조미령

혈맥 황정순
 (그림15) <혈맥>(김수용, 1963)에서 털보(김승호)와 다투는 복순 어머니(황정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황정순
 (그림1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황정순이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모습

황정순 영화 연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다수의 출연작에 후시 녹음을 직접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영화는 겹치기 출연으로 바쁜 배우들 대신 성우들이 목소리를 녹음 했다. 그러나 황정순은 촬영장에서 한 연기에 본인의 음성을 입혀야만 자신이 추구했던 연기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으로 여기고 직접 녹음까지 마쳤다. 왜냐하면 가지각색의 생활 감정을 나타낼 때, 그녀만의 연기 호흡과 대사 톤은 본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용 감독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가가 고심한 극 중 대사나 감독의 연기 표현이 가끔 그녀 앞에서 말끔히 정리되는 것을 보는 때가 있다. 관념에 흐르기 쉬운 한국영화의 대사가 그녀의 입에서 지극히 사실적인 일상 용어로 바뀐다.”8)는 것이다. 이처럼 맡은 배역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체적으로 소화하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빛을 발해 관객들에게 한층 호소력 짙은 연기로 다가왔다.

김약국의 딸들 황정순
(그림17)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에서 자식들을 보살펴달라고 고목에 기도하는 어머니(황정순)

또한 그녀는 언제나 배가 불룩이 나온 의상 가방을 들고 촬영 현장에 나타나 직접 의상 설정을 만들어서 입고 스스로 분장을 했다. <갯마을>(김수용, 1965)을 각색했던 극작가 신봉승은 촬영장에서 바닷가 촌부를 연기하는 황정순이 입은 빛바랜 베 치마에 수천 개의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낡은 치마를 어디서 구입했는지 묻자 그녀는 지난 밤, 집 마당에 새 치마를 펼쳐놓고 돌로 톡톡 찍어서 구멍을 낸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쓰듯 연기자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마땅히 뭔가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고 한다.9) 평소 그녀는 맡은 배역에 대한 탐구가 풀리지 않으면 마치 숙제를 못 끝낸 기분이 들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기에 대한 집념과 헌신 덕분에 황정순이 펼치는 아내, 편모, 계모, 과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등의 ‘어머니’ 연기의 입체성과 고유성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자하고 정감있는 어머니인 한편 고난과 운명에 맞서 감정을 패배적으로 과잉하지 않고, 체념과 포용을 모두 담아낸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할 극 중 인물을 생생하게 체화했다. 

갯마을 황정순
(사진 18)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아들을 바다에 잃은 어머니(황정순)는 혼자 된 며느리가 인습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길 바란다.
         황정순은 이 작품으로 제5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제9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인들은 황정순씨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연령으로 쳐도 어머니뻘이 되고도 남음이 있지만 결코 그러한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녀가 스크린 위에 새겨 놓은 어머니의 상은 거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배우가 악역마저 무난히 소화할 수 있으니, 그녀를 연기파의 일인자로 손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10)고 평한 김수용 감독은 그녀의 연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①인자한 어머니 ②쾌활하고 코믹한 중년부인 ③악의에 찬 변덕스러운 여인 ④육감적인 요부 등과 같이, 연기자 황정순에게는 “한계선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연기 폭이 넓다는 점을 극찬했다.11)
 
이렇듯 어머니 역할 외에도 그녀는 <유정>(김수용, 1966)의 사감, <월급봉투>(김수용, 1964)의 올드미스,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의 주모와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정력적인 아내 역할을 맡아 손색 없는 희극 연기를 선보였고, 스스로 “심각한 역보다는 즐겁고 재미있는 역을 좋아했다”12)고 밝혔다.

말띠신부 황정순
(그림19)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 출연한 황정순과 박암

말띠신부 황정순
(그림20)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부부관계를 주도하는 아내를 코믹하게 연기한 황정순

말띠신부 황정순
(그림21)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백말띠 딸을 출산하길 바라는 말띠 신부들(가운데 황정순)

그런가하면, 배우 황정순을 떠올리면 주로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한 전통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흙>(권영순, 1960)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산부인과 의사 ‘닥터 현’으로 출연한다. 그녀는 주인공이 멘토로 따르며 의지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올드 미스’를 자칭하며 비혼을 선택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전문직 여성을 연기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1회 공보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흙 황정순
(그림 22) <흙>(권영순, 1960)에서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는 닥터 현(황정순)

그리고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에서는 각각 양공주와 조폭 두목이라는 그늘진 정체를 숨기고, 자식을 위하느라 분투하는 모성의 복잡한 심성을 연기했다. 특히 주연을 맡은 <육체의 고백>은 연기자 황정순의 다면적인 매력을 접할 수 있는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무정의 40계단 포스터
(그림 23)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 조직폭력배 두목을 연기한 황정순(하단 왼쪽)

육체의 고백 황정순
(그림 2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부산 텍사스 거리의‘프레지던트’라 불리는 마담(황정순) 

육체의 고백 황정순
(그림 25)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매춘부들이 섬기는 “정의감 강하고 인정 많은 대통령 엄마”(오른쪽, 황정순)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세 딸들에게는 양장점 주인인 척하며,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밀수까지 감행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 황정순
(그림 26)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실명으로 출연한 황정순의 집에서 촬영한 장면, 방에 보이는 트로피도 실제로 황정순이 받은 상들이다.

<팔도강산>(배석인, 1967)은 배우 김희갑과 황정순이 노부부로 출연하여 전국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황정순은 자녀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어머니를 연기하여, 근대화의 피로감 속에서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모성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크게 흥행하여 이후 <팔도강산(속)>(양종해, 1968),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돌아온 팔도강산>(정소영, 1976)까지 총 5편이 더 제작되었다. 황정순은 팔도강산 시리즈의 성공으로 국민 배우이자 ‘국민 어머니’로서 널리 사랑받는 연기자가 되었지만, 1970년대 KBS 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까지 역할이 지속되면서 이미지가 더욱 굳어져 이후 어머니 역할로 배역이 고정되는 면도 있었다. 
  
그녀는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든 1970년대 이후 TV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로 가족 드라마에서 다정한 어머니나 할머니로 분하여 원숙한 연기를 펼치는 한편, 사극 <사모곡(思母曲)>(신봉승 작, 동양텔레비전)에서는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역을 맡아 실권을 갖춘 대비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기도 했다. 

장마 황정순
(그림 27) <장마>(유현목, 1979)에서 동란 중에 아들을 잃고 천둥 번개치는 하늘에 토로하는 어머니(황정순) 

장남 황정순
(그림 28) <장남>(이두용, 1984), 고향집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서울의 장남 집에 온 어머니(황정순)가 딸과 통화하는 장면.
마치 다큐멘터리 속 인물을 보는 듯한 황정순의 생생한 자연스러움에 빠져들게 된다. 연출의 존재가 전혀 의식되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연기를 보여준다.

장남 황정순
(그림 29) <장남>(이두용, 1984)에서 어머니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

1972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 황정순장학회를 설립하여 서울예술대학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1984년에는 극단 신협 ‘황정순 연기생활 45주년 기념공연’ <안네의 일기>를 공연했다. 1988년에는 혜화동에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을 개관했고, 2005년에 뮤지컬 <팔도강산>에서 노부부의 어머니 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녀는 2007년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을 수상하였는데, 주최하는 여성영화인모임은 “여성영화인의 큰 숙제 중 하나는 부침 많은 영화계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살아남는 것” 이라며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와 연극, TV를 넘나들며 ‘한국의 어머니’가 되어준 그녀의 열정과 성실함에 박수를 보낸다” 고 밝혔다.13) 

황정순은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를 찾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 “특별히 영역을 두어 벽을 쌓지 않고”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역을 소화하며 배우 인생을 사랑했다.“14) ‘카메라를 보는 배우’는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여, 촬영 첫 날 반드시 현장에 모셔야 작품 운이 트인다는 ‘크랭크 인 배우’로 각광받았고, 60여년 동안 400편에 가까운 영화와 200여편의 연극, 수십편의 방송 드라마 등을 통해 꾸준히 활동했다.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이라고 여겼던 그녀의 혼신을 다 하는 연기자로서의 열정을 떠올리면서, 이 뛰어난 예술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극단 신협 황정순
(그림 30)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 개관식(1988년)에서 황정순(왼쪽에서 두 번째)15)

“온 몸과 맘으로, 온 정성으로 연기에 취해 정신없이 지나온 젊은 시절, 그러나 시간은 붙들어 맬 수 없는 것.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연기자가 되고 싶다.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 황정순16)


1) 명사가 본 한국배우의 실루엣”, 《여원》, 1967년 3월, 225~226쪽.
2) 김남석,“배우로 보는 한국연극사|황정순 선생과 함께 1”,《(국립극장)미르》,2004년 3월호, 39쪽 참고.
3)  유민영,「무대와 영상에 표현된 한국의 전형적 모상/ 황정순」,『한국 인물연극사 1』,태학사, 2006, 687쪽 참고.
4) 나의 데뷰시절⑥ : 황정순”,《Screen》,1988년 12월1일, 251쪽.
5) 「작년도 방화의 수지결산서」,《국제영화》,국제영화사, 1960년 4월호, 81쪽.
6)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3쪽.
7) 김수용,「배우의 변신」,한유림 외,『위대한 여배우 황정순』,한국영화인복지재단, 2007, 138쪽.
8) 김수용,“한국배우론① : 황정순”,《신여성》 제1호, 1970년 4월, 272쪽.
9) 신봉승,「한국의 어머니 황정순 선생」,한유림 외, 위의 책, 132쪽.
10) 김수용, 앞의 글, 271쪽.
11) 김수용, 앞의 글, 270쪽.
12)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4쪽.
13) 강병진,“올 한해 영화계를 빛낸 여성들_2007 여성영화인축제서 공로상 수상한 배우 황정순 외”,《씨네21》, 2007.12.17.
14)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앞의 글, 82~84쪽 참고.
15) “〈그의 생활〉 만년 어머니 배우 황정순의 예술과 삶”,《오늘의 한국》통권72호, 1989년 1월, 77쪽.
16) 황정순,「다시 태어나도 여배우의 길을 가련다」, 한유림 외, 위의 책, 2007, 119쪽.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