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
Gang Ho / 姜湖
출생·사망
1908 ~ 1984
대표분야
제작/기획, 배우, 감독,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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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지하촌 (강호, 1930)
암로 (강호, 1929)

주요경력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날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미술 공부
1927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가입
1930년 카프 조직 개편 이후 미술부 책임자 겸 영화부 위원
1932년 극단 신건설과 동방키네마 창설에 참가
1938년 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 협의로 구속, 4년 복역
1942~45년 연극 무대장치가로 활동
해방 후 조선연극동맹 산하 극단의 무대미술 담당
1946년 월북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카프에 가입한 강호는 김복진의 뒤를 이어서 미술부장이 되었다. 이 때 수원에서 미술전을 열었다고 한다(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강호는 <암로>를 통해서 영화계에 참여하였다. 강호는 민우양 등과 함께 경남 진주에 남향키네마를 설립하고, 제작한 것이 <암로>라는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제목을 <쫓겨 가는 무리들>이라고 했지만, 후에 <암로>로 제명을 바꾸었다. 강호는 박경옥과 함께 주연배우로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고성이란 이름으로 이 작품의 감독도 맡았다(중외일보a; 중외일보b; 동아일보a).
1930년에는 서울키노에서 제작한 <화륜>에서 자막을 맡았다고 한다(조선일보a). 이 시기에 카프 영화부가 설치되면서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 내부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강호는 카프의 통제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임화와 함께 카프의 통제를 받던 청복키노를 조직하고, 1931년 제1회 작품인 <지하촌>의 감독을 맡았다. 노동자의 투쟁생활을 그린 지하촌은 신당리의 빈민굴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조선일보b; 동아일보b; 조선일보d).
그리고 1933년 강호는 카프의 통제를 따라 김태진(남궁운), 나웅, 민우양, 추적양 등과 함께 영화제작소 동방키노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연극부대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연극부대’는 동방키노의 기관지 이름이었다. 연극부대 사건은 동방키노의 인물들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과 접촉하며, 「영화 구락부(映畵クラブ)」라는 유인물을 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배포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京鍾警高秘).
이 사건으로 3년을 복역한 강호는 1930년대 말에 ‘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가 1942년 석방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 박헌영의 문화노선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송영, 박세영 등과 함께 발표하고 월북하였다. 1951년에는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의 시나리오와 무대미술을 맡았다. 이 영화는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상하였다(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 참고문헌
중외일보a 1928년 4월 29일 3면.
중외일보b 1928년 6월 1일 3면.
동아일보a 1929년 1월 26일 8면.
동아일보b 1931년 3월 11일 4면.
조선일보a 1930년 10월 8일 석간 5면.
조선일보b 1931년 1월 28일 석간4면.
조선일보c 1933년 5월 2일 2면.
조선일보d 1933년 5월 28일 석간 3면.
京鍾警高秘 第1937號 「演劇運動社員竝映畵部隊社員等檢擧ニ?スル件」, 1933년 2월 10일.
<북한문화예술인명사전>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8년 8월 6일 경상남도 진전면 봉곡리의 가난한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부터 다닌 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의 한 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중도 하차.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솜씨를 보였으나 물감 한 번 제대로 갖지 못한 가운데 부모의 승낙없이 일본으로 건너가 빵집 심부름, 우유 배달, 신문 배달을 하며 고학으로 교토 중학과 동경 미술학교를 마쳤다. 귀국 후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으로 들어가 김유영, 서광제등과 사귀며 영화공부를 하는 한편 1927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 미술부를 책임지고 1929년부터 영화부 일까지 맡았다. 그는 순수회화보다 실효성 있는 예술 창작을 위해 무대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자라사신>과 같은 동화극에서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뒤 진주 남향키네마의 창립작 <암로>(1929)를 각색,감독,무대 미술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에 스스로 나서는 것이 쑥스러웠던지 감독 명의는 독고성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였다. 처음 제목은 <쫓겨 가는 무리들>이었다. 이 영화는 무산대중의 계급해방에 대한 저항의식이 깔려 있었으나 세평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이 영화의 원작은 강윤희군의 것인데 원작으로 대단 실패하였다. 다만 취할 것이라고는 물레방아간이 정미소로 변하여 봉건시대의 생활이 날로 몰락하여 간다는 것을 보여준 것 뿐이다. 이것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면 다소 원작의 골자를 찾았을 것을 너무나 '사랑! 사랑!'하고 애욕에만 기울어졌다."(윤효봉/영회시평 '암로' 비판,1929.3) 그런가하면 "이 '암로'는 영화라느니 보다도 서너장의 그림 엽서라고 하였으면 좋을 것 같다. 스토리의 모순이 적지 않다. 그러나 먼저 기도만은 좋다. 농촌에도 기계문명이 수입되어 예전의 모든 시설이 퇴폐하여 나간다는 것만은 수긍된다"(서광제/조선영화소평 '암로'를 보고, 조선일보, 1929.1.29)고 평가하여 그 내용과 수준을 엿보이게 했다. 두 번째 연출작 <지하촌>(1931,남향키네마 제작)은 실직자의 양산 속에 일어나는 노동자의 투쟁을 그린 것으로, 그가 각본과 감독, 미술은 물론 출연까지 했다. 강춘희,김정숙,임화 등이 공연한 이 영화는 한남철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장을 반대하여 싸우는 것을 주축으로 전개된다. 공장장은 당시 일본 위정자의 사주를 받는 약탈자로 등장한다. 이에 격분한 빈민촌의 자유노동자들과 직공들은 파업투쟁으로 맞선다. 이 작품에 대한 반응 또한 기대에 못미쳤다. 카프영화를 보는 일제 관계 당국의 시선이 차가웠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는 <지하촌>을 끝으로 영화 활동을 중단한 대신 필봉을 들었다. 거의가 '조선영화운동의 신방침'(조선중앙일보,1933.4. 8회 연재)따위의 카프를 옹호하는 글이었다. 해방 후 월북. 대학 교수 등으로 활약하다가 1984년 7월 3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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