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일
Mun Su-il / 文秀一 / 1899  ~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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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장화홍련전 (홍개명, 1936)
아리랑고개 (홍개명, 1935)
놀부흥부 (김조성, 1925)
비련의 곡 (하야카와 마사다로, 1924)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

주요경력

1921년 청진형무소 간수로 근무. 수감 중이던 윤봉춘과 만나 배우가 됨
윤봉춘을 따라 상경하여 윤백남의 민중극단에서 활동
1923년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에 출연
민중극단 해체 후 민립극단, 취성좌, 삼청가극단, 조선연극사에서 활동
1931년 조선연극사 탈퇴, 극단 연극시장 창립 운영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문수일은 1922년 윤백남이 조직한 민중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동아일보d). 윤백남이 감독한 <월하의 맹서>에 다른 민중극단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g; 삼천리). 이후에 동서문화협회가 제작한 <비련의 곡>(1924)과 <흥부놀부전>(1925)에도 출연하였다(삼천리).
민중극단이 해산한 이후, 문수일은 변기종, 이원규 등과 함께 민립극단을 설립하고 인사동에 있는 조선극장에서 공연을 진행하였다(동아일보b). 흥행부진으로 민립극단이 해산한 후에는 취성좌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동아일보c). 이후 취성좌를 탈퇴하고 지두환이 이끄는 조선연극사에 참여하였지만, 다시 탈퇴하고 이경설과 함께 극단 연극시장을 설립하였다. 문수일은 권일청, 심영, 신은봉 등이 합류한 연극시장의 대표를 맡았다(한지수; 중외일보 1930년 1월 18일 3면; 동아일보e).
1935년 경성촬영소의 제2회 작품인 <아리랑 고개>에 딸인 문예봉과 함께 출연하였다. <아리랑 고개>는 홍무토가 감독을 맡았으며, 한국최초의 동시녹음 영화라고 한다(동아일보f). 1937년에도 경성촬영소의 <장화홍련전>에 문예봉과 함께 출연하였다(삼천리).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3년 4월 11일 3면
동아일보b 1925년 12월 31일 3면
동아일보c 1927년 5월 7일 5면
동아일보d 1931년 7월 4일 5면
동아일보e 1933년 9월 27일 8면
동아일보f 1935년 12월 28일 5면
동아일보g 1972년 10월 31일 5면
중외일보 1930년 1월 18일 3면
한지수, 「現下 半島 劇界-본 대로 生覺 난 대로」『삼천리』제5권 제4호, 1933년 4월호.
「朝鮮文化及産業博覽會, 映畵篇」『삼천리』제12권 제5호, 1940년 5월호.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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