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채
Park Gi-chae / 朴基采 / 1907  ~ 
대표분야
감독
활동년대
1930, 1940
DB 수정요청

필모그래피 (6)

더보기
감독 :
밤의 태양 (박기채, 1948)
조선해협 (박기채, 1943)
나는 간다 (박기채, 1942)
무정 (박기채, 1939)
춘풍 (박기채, 1935)

주요경력

1930년 교토 시의 동아키네마 사에 의탁생으로 입사
1937년 조선영화주식회사 설립
1945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영화 부문과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
한국전쟁 중 납북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1927년경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수학했다. 1930년, 교토 시에 있는 동아키네마에 의탁생으로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영화 촬영에 대하여 공부했다. 그후 이곳에서 감독으로 승진하여 제1회 작품 <청춘비가>를 만들었다. 1935년 귀국한 뒤 <춘풍>을 연출했다. 다음해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영화화해 주목 받는 신진 감독이 되었다(박누월; 대중예술인 사전). 1937년에는 최남주, 오영석과 함께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조선일보).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나는 간다>(1942), <조선해협>(1943)을 제작하여 친일인사로 지목받았다(친일인명사전). 해방 후에는 <밤의 태양>(1948)을 연출했다. 한국 전쟁 중에 북한으로 납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조선일보 1937년 7월 21일 석간 6면.
박누월, <<영화배우술>>, 삼중당서점, 1939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6년 7월 24일 전라남도 광주 출생. 일본 동지사 대학을 다녔다. 경도(京都) 동아키네마에 입사하여 수년 간 감독 수업을 받고 첫 작품으로 <청춘비가>를 선보였다. 귀국 후 안석영 각본 <춘풍>(1945)을 복혜숙, 이경선, 문예봉 출연으로 만들어 한국영화계에서의 활동 발판을 마련했다. 이 영화는 하숙생을 사랑하는 주인집 딸이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못이루게 되자 애인을 따라 가출한다는 내용. 이어 발표한 작품이 춘원 이광수 원작을 자신이 각색한 <무정>(1936). 최남주의 조선영화사가 제작하고 황운조 촬영, 최인규 녹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반일운동가의 딸인 박영채의 파란많은 생애를 통해 개화기 여성의 고귀한 사랑과 순결을 그렸다. 주연은 김신재, 이금룡. 이 영화로 한은진이 배출되기도 했다. <춘풍>의 제작자이기도 한 월간 영화시대사 대표 박누월은 “그는 명랑하면서도 퍽 사색적인 인물이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은 좋아하는 성질이다. 그리고 인정가요 교제가이다. 박기채의 존재는 <춘풍>과 <무정>이후 경이적으로 빛나게 되었다”(조선영화인약전·1939, 삼중당 서점)고 그의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정책이 강화되면서 발족된 관제(官制) 조선영화주식회사(대표 田中三郞)의 군국주의 어용영화 <나는 간다>(1942)의 감독을 맡음으로써 그 평가에 손상을 입는다. 징병을 기피한 친구를 설득하여 입대케 하는 계몽영화로 최운봉, 남승민 등이 출연, 유장산이 촬영을 담당했다. 지원병으로 나가 부상당한 남편을 아내와 만나게 해주는 간호원 이야기. 앞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조선영화주식회사 제작. 이명우 촬영, 서월영 문예봉 김신재 등이 출연했다. 해방 후에는 <밤의 태양>(1948) 한 편을 내놓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는데, 이 영화는 카바레를 아지트 삼아 암약하는 대규모 밀수단을 민완형사들이 일망타진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김정혁 각본, 이명우 촬영, 최은희·김동원 주연의 밀수근절을 위한 계몽용 액션영화. 그는 6·25전쟁 중에 납북된 후 행방이 알려진 바 없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